나는 외로운 것 몇 가지를 생각한다
어깨로 기대어 와 심장 소리를 듣던
꽃향기 얼굴
깍지 낀 채 더는 세게 움켜잡지 못한
땀 배인 손
촛점을 맞출 수 없던
취한 눈동자
그리고 깊게 눈을 감으며
한숨
한숨
그 한숨이 나는 외로웠다
아무도 너를 받아주지 않을 때
너는 나에게로 오라
나는 너무나 연약해져 간다.
그냥 신기할 뿐이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너무나 잘 자라 주어서. 너무나 현실에 충실하는 것 같아서. 절정(絶頂)의 모습, 그대로여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고있어서살고있어서살고있어서
과거에 끄달리는 건, 우리가 살아낸 삶에 지치우는 건 나뿐인가.
잘 지내 보여 기분이 좋아. 완벽한 불행을 바라지만.
균형을 찾아서
나는 천천히 극으로 향한다.
시간을 유보하며 사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꿈도 미래도 과거도 머릿속에서만 뒤적이는,
마땅치 않은 권위에 따라야만 하는
스스로 그 권위에 속박되는 삶을
알고 있다. 이 기분을. 수년간 느껴왔던 이 막막함, 몸의 뜨거움. 일탈의 온도.
그러나 제행무상(諸行無常)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다시
시간을 유보하며 살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꿈도 미래도 과거도 머릿속에서만 뒤적이고
마땅치 않은 권위에 따라야만 하고
스스로 그 권위에 속박되어 살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하품 같은 삶이다
용기 없는 삶이다
무욕을 가장한 무책임함이다
코피라도 흘리고 싶다
조병(躁病)에라도 걸리고 싶다
효봉 스님은 목 아래 칼을 세워두고 이레를
용맹정진했다는데
혹시 앉아서 자는 법을 터득했던 건 아닐까
모기가 난다. 아직도.
가을 모기는 죽이지 말랬다 불쌍하니까, 라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한 구절이 생각났지만
죽였다.
귓가에서 앵앵되어 나를 잠에서 깨게 했으며 (이 정도면 죽이지는 않았다)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죽였다.
어제, 머리를 깎고 돈을 건네자 미용사가 하는 말,
살이 빠졌단다.
5년전부터다. 마치 주문에 걸린 사람들처럼 잠깐이라도 나를 안 본 이들은 나에게
살이 빠졌단다.
만약 실존이 여론에 의해 좌우된다면 나는 5년전부터 계속 살이 빠져 지금쯤 말라비틀어
죽었다.
그러나 오늘 미용사의 말은 조금 와닿았다. 정말 살이 빠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 한 달간 매일 술을 마셨다. 그 기간 술을 권하던 친구는 손이 떨려서 더 이상 못 마시겠다고 했다.
헬스를 시작한 그 친구의 금주는 일주일을 가지 못했다.
다시 술자리에 나타난 그는 술을 먹기 위해 헬스를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아 도대체 그게 무슨 논리인가, 싶지만
술이 들어가면 완벽한 논리가 된다.
티비를 돌리니 달라이 라마가 나왔다. 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뇌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자기에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함께 하려 한다는 것, 달라이 라마는 엉뚱하게도 그것을 용기라고 표현했다.
나는 아직도 달라이 라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는 술을 먹지 않는가.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Love Itself, Leonard Cohen
내가 하는 얘기는 늘 나라고 하는 개인의 역사 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을 답답해 하거나, 나태하다고 욕하거나, 혹은 비속하다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후세 사람이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사조를 살필 때 소위 역사가들이 쓴 책보다 우리가 늘 쓰는 한 개인의 하찮은 삶의 묘사 쪽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 『나의 소소한 일상』(김춘미 역)
나는 말한다.
되던 말던.
학승(學僧)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대처승(帶妻僧)과 동의어다.
신정아 사태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니,
뭐 아무렇지도 않다. 학벌권력의 뿌리 깊음과 그 각인을 다시금 확인했을 따름이다,
라고 말하지만 다소 놀랍기도 하다.
삼불정책 폐지와 대학입시 자율안 같은
신자유주의 담론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는 일련의 헛소리들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이고 친기업적인 내 눈에.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 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균등, 평등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틀 안에서 정치는 표퓰리즘을 띌 수 밖에 없고, 소위 성장 분배의 논란에서도 당연히 분배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열며, 일단의 페미니스트들은 -- 그리고 그에 영향을 받은 시인들은 -- 논리를 부정하고 언어를 뭉게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논리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돼 이어져 온 남자들의 논리이며, 우리들의 언어는 그 논리적 맥락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재료들이 이미 앞선 세대의 남성들에 의해 구축된 것이기에.
헌법 역시, 당대 일단의 권력-식자층이 제정한 것이다. 또한 헌법의 해석과 하위 법률의 제정, 집행은 모두 '교육 받은 이들'이 전담하고 있다. 헌법이 그 어떤 위대하고 고결한 사상을 담고 있다한들 그 한계는 명백하다.
학위검증센터를 만들고, 학위인증 가능 대학을 선정한다는 것은 권력의 성곽을 더 높게 둘러치는 짓일 뿐이다. 학벌파괴를 아무리 외쳐도 성곽은 공고하다. 외치는 이들이 학벌의 세례를 흠뻑 받은 자들이라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까. 학벌이 받쳐주는 이들이 학벌파괴를 외쳐야 들어주는 건 아이러니를 넘어선다.
모든 논리는, 그 전제가 합당하지 않을 때 수 많은 오류를 낳는다. 하지만 이 오류에 당황한 논자는 전제를 다시 살펴보는 대신 수 많은 예외 사항을 마련한다. "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 라는 격언을 수없이 되뇌이면서.
예외 조항은 넘쳐흐르고 예상치 못한 결론들이 도출되는 상황의 한 가운데서,
우리의 문제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사실이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승가에서는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을 모두 들어 계정혜삼학(戒定慧三學)의 익힘을 공부라 한다. 몸과 말과 의식, 곧 인간의 모든 조건을 다 들어 공부해야 함이다. 말이나 글로 함이 몸으로 행위함과 다를 수 없으며, 몸 깊이 가려진 의식이 몸 그 밖의 행위들과 어긋남은 공부라 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지켜감과 다스림과 지혜로움이 하나 되는 공부를 삼학(三學)이라 하다. 계학(戒學)은 지범지계(止犯持戒)함이어서 돌이켜 다시 하지 않아야 할 것과 애써 맹세코 지녀야 할 아름다운 행위들을 가늠해 지켜가는 공부다. 정학(定學)은 분출하는 의식의 파고를 진정시켜 제법의 실상에 점입하는 관건이니, 매사에 평등일여(平等一如)한 삼매를 견지함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혜를 체득하고 발현함이 혜학(慧學)이다.
... 요즘 공부하는 이들이 시대와 스승을 탓하나 길이 없어 가지 못함이 아니다. 선현의 가르침이 있으나 배워 따르려 하지 않음이다. (不習誦이면 無以記니라). 우리 의식의 불순(不純)함을 돌이켜 원숭이와 폭류(暴流)에 비유했다. 순간의 순일함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pp.262-264
지관 스님, 「나를 비우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공부의 즐거움』, 위즈덤하우스, 2006
이성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게 하고,
감성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싶게 만든다.
여자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술을 마시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모든 마주침은
슬프다.
2000년 십이월의 마지막 날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오래된 기적을 믿지 않는다.
...
근데 배고프다.
오래된 書籍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Famous Blue Rain Coat
Leonard Cohen
It's four in the morning, the end of December
I'm writing you now just to see if you're better
New York is cold, but I like where I'm living
There's music on Clinton Street all through the evening.
I hear that you're building your little house deep in the desert
You're living for nothing now, I hope you're keeping some kind of record.
Yes, and Jane came by with a lock of your hair
She said that you gave it to her
That night that you planned to go clear
Did you ever go clear?
Ah, the last time we saw you you looked so much older
Your famous blue raincoat was torn at the shoulder
You'd been to the station to meet every train
And you came home without Lili Marlene
And you treated my woman to a flake of your life
And when she came back she was nobody's wife.
Well I see you there with the rose in your teeth
One more thin gypsy thief
Well I see Jane's awake --
She sends her regards.
And what can I tell you my brother, my killer
What can I possibly say?
I guess that I miss you, I guess I forgive you
I'm glad you stood in my way.
If you ever come by here, for Jane or for me
Your enemy is sleeping, and his woman is free.
Yes, and thanks, for the trouble you took from her eyes
I thought it was there for good so I never tried.
And Jane came by with a lock of your hair
She said that you gave it to her
That night that you planned to go clear
Sincerely, L. Cohen
학력위조가 성행인가 보다. 아니, 성행이었나보다.
학원가 강사들 상당수가 출신 대학을 속였고, 강단에 선 교수들조차 그렇다고 하니.
언젠가 도올은 대학을 나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과거에는 책을 구해 볼 수 있는 곳이 대학 도서관 뿐이었지만
요즘엔 어떤 학술서적이건 구해볼 수 있다면서.
어쨌든 그런 그도 화려한 학위 증명서를 갖고 있다.
그저 학위를 따 온 것이라고 늘상 말하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최소한 녹여내야 할 서적이 50권이라고 한다.
한 분야의 책 50권만 열심히 읽어내면 최소한 석사 학위 정도의 실력은 되는걸까.
나는 된다고 본다, 그러나 상아탑의 석사들은 턱도 없다- 할런지도.
뭐 한글만 읽을 줄 알면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소위 손에 꼽히는 진보주의자, 노동운동가들 중에는 유독 S대 출신이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S대 폐지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도 S대 출신이 많다는 것이다.
7-80년대 노동운동으로 옥살이를 하고 현재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수가 그렇다.
노동운동 x 옥살이 x 정치의 확률은?
그들은 가르치려든다.
너희들은 우매한 중생들이니 내가 의식 개혁을 해줘야 한다는, 뭐랄까 사명감이랄까 자아도취랄까.
신분을 속이고 막일에 침투해도,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한다해도
가르치려드는 그 의식은 생생히 살아남아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건,
가르침을 원하지 않는 이들까지 가르치려 들 때다. 그러나 그들에겐,
가르침을 원하지 않는 건 무지몽매하기 때문이고 기존의 부덕한 사상에 경도된 때문이므로
가르침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가르쳐야 할 첫번째 대상이 된다.
그들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다.
아무리 자신을 낮추어도 불쑥불쑥 엘리트 주의에 경도된 내면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그들이 스스로를 낮추는 일은
엘리트 중에서도 보다 월등한 엘리트이기 위한 필수적인 태도다.
재밌는 건,
그들은 '고전'과 '객관'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그들에 의해 조장되는 측면이 크다.
그들의 학문은 과거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다.
과거에 논의된 오만가지 결과물의 총체를 체에 걸러낸 그것을 습득하는데
그들은 수만 시간을 들였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오만하고 자존심이 높다.)
그들에겐 그것이 '고전'이고 '객관'이다.
그리고 이는 학위라는 상징으로 권위를 획득한다.
믿고 있는 바와 합치되지 않을 때
그들은 상대방을 미성숙한 사고체계의 소유자, 의식개혁의 객체 정도로 여긴다.
그리고 그들의 고전을 토대로 획득한 객관성을 무기로
신랄한 비판을 해나간다.
문제는
고전은 단지 그들만의 합치된 결과물일 뿐이고
아무런 객관성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래 인문학은
인간이 학문을 규정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급기야 그들에 의해, 학문이 인간을 규정하게 되었다.
인간이 학문을 규정할 때는 주관적이었는데
학문이 인간을 규정할 때는 객관적이 되버린다.
덕분에 학력만으로도 업그레이드 완료된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위조된 학력이라 할 지라도
학문이 인간을 규정하는 이상.
진정한 엘리트, 세상을 변혁하는 힘이 되고 싶다면
자기의 말이 아닌
상대의 말로 하길 바라며.
100분 토론, 평론가 J씨의 히스테리적 주둥이질과
수 많은 헛점에도 듣고만 있는 상대편 패널들, 그들.
최근 학력위조 파문
기존의 인문학 위기에 관한
짬뽕. 뭐 어쨌든 나도 대학국물 좀 먹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