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한 명이 내년 초 쯤에 결혼을 할 예정이란다. 학교 선배는 아니고 공익 선배. 26살 먹고 들어와서는 한참 어린 애들에게 반말이나 들어가면서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선배. (물론 안 할 수 없기에 하는거다.)
오래 알고 지내던 여자고, 그리고 연상이며, 올해 초 부터 급격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결혼까지 고려할 정도는 아닌 관계 - 라고 말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물론 그 나이 즈음 되면 여자건 남자건 결혼을 전제로 깔지 않을 수 없는 거 겠지만) - 에서, 문득 여자의 월경 주기가 늦어졌다는 알싸한 소리를 듣고는 부랴부랴 날짜를 잡기에 이르른 것이다.
" 넌 능력이 없잖아 "
생긴 것도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연하의 선배란 놈이 내뱉는 소리가 고작 리의 신분이 겨우 이 정도인데 너 따위가 결혼해서 1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냐는 조롱 섞인 한마디였다.
" 배추라도 팔아야죠 "
치기어린 선배의 머리속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는 말을 툭 뱉고서는 ' 너 같이 어린 자식이 결혼을 아느냐? ' 는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 선배 제대가 언제죠 ?"
내가 물었다. 그래도 현실 속에서 생활하기 위해선 현실적이어야 하니까.
" 이천.....삼..년... 일월... 즈음 "
그는 반쯤 타버린 담배를 오른손에 끼워 넣으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앞으로 1년 4개월. 배추장사를 해서 1년이라도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1년 후에는? 아이는? 산후조리에 지쳐있을 아내는?
" 그래도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네, 한 번 일 냈다고 결혼할 생각을 하는걸 보면 말이야... "
기수가 제일 높기에, 그거 하나로 최고참으로 대접 받는 왕고(王古)의 말에 그는 씁쓸한 마지막 반 모금의 담배 연기를 뿜어 날리곤 떨떠름히 웃었다.
'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
누구의 말인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전혜린, 혹은
기형도일테지. 어린 나의 생각이 점점 통속화 되가는 이 하루하루가 가끔은 살인적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지금은 용납이 안 되는.
사랑 여자 결혼 낙태
…그러나 빈번히 일어나는
200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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