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자의 불안, 그 악몽
이정원
Ⅰ
“영화는 진작 끝났다.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은 손님. 고개는 꺾여 있었다. 영상(映像)에서 영원으로. 기형도는 스스로 노래했듯이 ‘가면을 벗는 삶’(시「겨울ㆍ눈ㆍ나무ㆍ숲」)으로 떠났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 극장.”1) 기형도는 자신이 시적 스승으로 삼았던 보들레르(C. Baudelaire)가 마지막으로 밟은 길을 따라서, 그러나 더욱 급작스럽게, 뇌졸중2)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만 29세,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안개」가 당선되고 4년 만에 첫 시집 출간을 앞에 두고 있었다. 기형도의 유고시집『입 속의 검은 잎』은 그해 5월 발간되었다.
중ㆍ고등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학업에 뛰어났던 기형도는,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쓰러져 집안이 몰락하고 중학교 때는 바로 윗누이를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다. 그래서 일까, 그와 같이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한 시인 원재길은 “불안의 인상”으로 기형도를 기억하고 있다. 유고시집에『입 속의 검은 잎』이란 제목을 정하고, 평론을 쓴 문학평론가 김현은 기형도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 거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
첫 행을 읽으면 불현듯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기형도가 생각난다. 아주 오래된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혹은 아주 오래돼 보이도록 효과를 준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스크린 위로 어지럽게 그어져 내리는 필름의 하얀 상처들을 보았을 것이다. 화자는 흩날리는 진눈깨비로 채워지는 거리를 보면서 자신의 다 낡아버린 필름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기형도의 시 전체를 통틀어 눈(雪)은 부정의 이미지를 발산함과 동시에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이런 과거로의 회귀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더 세분하자면, 눈은 공중의 액체와 추위의 결합이다. 그리고 기형도에게 이들은 불안의 요소로 작용한다. 온도가 내려가면 갈수록, 물이 얼어 딱딱해 질수록 점점 더 자신과 동일시된다. “딱딱한 손”(「진눈깨비」,「정거장에서의 충고」)을 가진 그가 흘리는 눈물은 “한 點 눈”(「새벽이 오는 方法」)이며 “몸은 얼음으로 꽉차”(「聖誕木-겨울版畵3」)있다. 추위의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길은 그 세계를 꿈꾸는 길 뿐이다.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밤 눈」). 결국 그는 불안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이른다. 마치 보들레르가,
라고 노래한 우울처럼.3)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이 느껴지고, 눈발은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황망히 거리를 헤매인다. 급기야 화자는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를 떨”군다. 서류 봉투가 가진 날카롭고 강인한 “사각의” 모서리가 눈길 위에 꽂힐 때, 그의 각오는 깨어지고 현재의 자신은 과거 속으로 녹아든다. 그리고 더 많은 진눈깨비가 거리를 뒤덮는다.
이 시는 진눈깨비를 기점으로 이루어진 3막의 영화다. 진눈깨비는 켜켜이 쌓여있는 추억들을 스크린 위로 불러들일, 과거로 향하는 존재의 입구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 오고, 다리는 본능적으로 이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은 스스로가 써내려간 비망록(備忘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추억이 적혀진 책을 가슴속에 갖고 있다. 어쩌면 삶의 가치는 각자가 가진 책의 내용과 두께에 의해 결정이 나는 지도 모른다. 태어남에 이유가 있던가. 한 사람의 삶은, 죽고 나면 태어난 이유가 된다. 살아낸 삶이 곧 태어난 이유다. 우리는 추억의 책을 펼쳐볼 때라야 비로소 우리가 그 두께만큼의 시간을 살아왔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형도에게는 결코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은 삶이다.
진눈깨비는 비망록에 꽂힌 수많은 “書標서표”(「오래된 書籍」)들 가운데 하나다. 그 서표를 따라간들 그러나 이미 스스로에 의해 폐지가 되어버린 페이지만을 보게 될 따름이다. 그가 가진 영혼의 흰 종이가 수없이 쓰였다 지워져 “검은 페이지”가 된 것처럼,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은 떠오르기도 전에 “구두 밑창”에 밟혀 사그라진다.
골목길은 분명 어디론가 이어져 있는 길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길로부터 고립되어있는 길이기도 하다. 골목길을 따라 더 큰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또는 그대로 골목길에 갇혀있을 수도 있다. 개방성과 폐쇄성을 모두 보여주는 골목길의 성격을 규정해주는 것은 결국 골목길을 채우고 있는 그 무엇이다. 이 시에서 “어두운 골목길”을 채우고 있는 것은 “불켜진 빈 트럭”이다. 이 트럭은 그냥 골목길을 채우고 있지 않다. 불이 켜진 채로 “정거”해 있다. ‘정차’가 아닌 ‘정거’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위해 잠시 멈춰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운전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트럭은 골목길에 갇혀 있다. 진눈깨비 흩날리는 거리 위에 우두커니 서서 상념에 쌓인 화자 자신처럼.
정신이 빠져버릴 대로 빠져버린 “취한 사내들”은 쓰러져 꽂힌다. 진눈깨비 내린 길바닥으로. 그들이 술에 취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취해야 하는 아픔은 화자를 더 깊은 과거 속으로 꽂히게 한다. 그 과거 속에서도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매이는” 진눈깨비처럼 화자는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눈’을 터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화자는 버스의 차창을 통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투명하지만 통과할 수 없는 차창 유리, 그 너머로 화자의 눈에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눈에 쌓인’ “낡고 흰 담벼락”의 ‘집’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유리창은 화자가 자기 불안의 실체를 마주할 때 안전판으로 그 사이에 가로 놓인다.4) 집안이 몰락하기 전 행복한 추억들이 가득했을, 그러나 이제는 눈에 쌓인 “낡고 흰 담벼락”의 집, 몰락을 초래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놓아버린 아버지, 이 모든 불행과 절망에 좌절하는 자신의 자아. 이들과는 도저히 맨 몸으로 대면할 수 없는 것이다. 흩날리던 진눈깨비는 이 순간에 이르러 쏟아지기 시작한다. “진눈깨비가 (…) 무수한 총알이 되어”(「환상일지」) 화자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불안은 화자의 온 몸에 녹아들고 추억의 추위가 엄습한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필름은 더 먼 과거를 향해 돌아가고 있지만, 스크린 위에는 온통 하얀 상처만이 그어져 내리고 있다. “나는 불행하다” 더 이상 돌아갈 필름이 남아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사랑이건, 욕망이건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간에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과거 언젠가의 행복한 순간들을 다시 사는 것이다.5) 그러나 그런 행복한 순간에 다다르지 못할 때가 있다. 과거 언젠가 입은 깊은 상처가 드리워 놓은 절망의 안개가 그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릴 때, 그래서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을 느끼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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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갈피 속의 오늘> 1989년 시인 기형도 영화관서 변사」,『동아일보』, 2007.03.08.
2) 대학 친구인 소설가 성석제는 중앙일보사 시절의 기형도를 이렇게 회고한다. “편집부 수습을 할 때 그는 교정에 대해 배워온 것을 내게 가르치려 했다. 그가 낸 문제는 ‘뇌졸증’인가 ‘뇌졸중’인가, 또 ‘내출혈’인가 ‘뇌출혈’인가였다.” 성석제,「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솔출판사, 1994. pp.232-233.
3) 우울과 불안은 동일한 축을 따라 도는 듯하다. “한 연구에서 제안하기를 불안과 우울증은 같은 장애의 변종들로서, 한 가지 질병(예를 들면 불안)이 진행됨에 따라 다른 질병(우울증)은 압도당해 버리는데, 심한 불안은 일차적으로 심한 우울증보다 앞서 나타난다고 한다.” 루이스 월퍼트,『우울증에 관한 희망의 보고서』, 청어람, 2000. p.38.
4) “요컨대 유리는 옛날에는 어둠의 구체적인 층 속에 퍼져 있던 모든 불안하고 모호한 두께를 자신의 응고된 반죽 속에 동결시킴으로해서 깊이를 더욱 깊게 하고 어둠을 더욱 순수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허공은 위험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다. 따라서 유리를 부수지 않는 한 관객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유리는 심연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훨씬 유용한 작용을 행한다. 즉 심연을 암시하고 동시에 그것에의 접근을 금지시킨다.” 장 피에르 리샤르,『詩와 깊이』, 민음사, 1986(제2판), p.121.
5) “참된 안락이란 과거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 우리들은 역설적이지만 정신분석식으로 말해 고착(固着)을, 행복 고착을 사는(體驗)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pp.7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