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밴드는 대열을 맞춰 행진했고
브라스 밴드는 내가 알 수 없는 선율로 진행했지
창문은 열린 채, 비가 들이쳐
밤색, 노란색, 파란색, 황금색 그리고 회색
술 취한 이들은 이리저리 튀고
시내의 낡은 건물들은
비어버린 지 오래
창문은 깨졌고, 꿈도
내 집이었던 곳을 떠나니 너무 행복해
하늘, 파란 하늘과
이 썩어버린 시간
그렇게 나쁘진 않아 보여
아, 난 죽지 않았어
만족해야지
살아남았으니
그걸로 충분해 지금은
하늘, 파란 하늘과
이 썩어버린 시간
그렇게 나쁘진 않아 보여
아, 내가 죽지 않았다면
만족해야지
살아남았으니
그걸로 충분해 지금은
이사 했고, 살아남았고, 불안해. 그걸로 충분해 지금은.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했고… 이해한다는 건, 원인과 결과를 안다는 것.
“이봐, 전쟁이 더 치열해져서 주먹밥 하나 놓고 다퉈가며 살아야 한다면, 난 사는 걸 그만둘래. 주먹밥 쟁탈전 참전 권리는 포기할 생각이니까. 안됐지만, 당신도 그땐 아이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하라고. 그게 지금의 나한테 남은 최소한의 프라이드니까.”
ㅡ 다자이 오사무, 『나의 소소한 일상』, p.101 |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신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의 신을 꾸짖고 나무라는 자를. 그런 자는 그 신의 노여움을 사 파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상처를 입고도 그 영혼이 심오하며, 하찮은 사건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이렇게 하여 기꺼이 저 교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니. ㅡ F. 니체(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전집13), pp.20~22 |
처음이고 싶었다. ... 그러나 이제는 결코, 처음은 될 수 없구나. 이럴 때면, 너무 오랜 시간을 놓아버린 것 같은, 처음이 되기에 난 너무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모든 영화와 소설은 결말이 중요하지. 주인공들은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 그래도 난, 첫 장면에서, 첫 단락에서 잠깐 나타났다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처음이고 싶었는데. 딱 한 번, 단 한 사람, 오직 하나의 과거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네. 나 역시 아무런 추억이 없네.
리필 음료수가 된 것 같아.
ㅡ 알렉스니? 니 애비다. ㅡ 안녕하셨어요. ㅡ 잘 있다. ㅡ 몇 시죠? ㅡ 6시 39분이다. ㅡ 전화하셔서 놀랬어요. 일종의 환각상태 같아요… 현재의 기억처럼요. 그래서 어지러운가봐요. ㅡ 숙모 얘기 들었니? ㅡ 아니오. ㅡ 죽지 않았다더라. ㅡ 돌아가실 이유가 없잖아요. ㅡ 병원 주사로 연명하고 있어. 끔찍한 일이야. 정말 환멸스러워! ㅡ 새로울 것도 없잖아요. ㅡ 널 믿는다. 내가 노망부리거든, 탕! 식물인간이 되긴 싫다. 우리 약속을 잊지 마라. 내 머리에 총알을 갈겨. 약속해라! 농담 아니다, 알렉스! 맹세해! ㅡ 벌써 했잖아요. 내가 먼저 죽지 않는다면요… ㅡ 닥쳐, 몹쓸 자식! 망할 놈!
ㅡ 난 비열한 기회주의자 희생양이야. 내 더러운 엉덩이와 물집. 안 맞는 신발… 사람들은 신발로 우리를 평가해. 그는 발바닥이 아플 땐 얼음을 신발에 넣었댔어. 나도 그렇게 해봤지. 처음엔 낫는 듯 했는데 나중에 더 아팠어. 내 발이 자라듯… 내 영혼도 자란다. 난 모든 면에서 고상해졌어.
ㅡ 다시 태어날 순 없을까? 난 낙오자가 될 거야. 기회가 있었지. 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비행사, 여행가, 음악가… 다시 태어날 순 없을까? 우린 처음 만났어. 내겐 처음만이 중요해. ㅡ 그럼 오래 가지 않겠네. ㅡ 내게 애가 있다면 말을 배운 순간부터 무시할 거야. 몇 년간 섹스를 갈망해왔어.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까 전혀 반대였어. 난 꿈을 이루려 애쓰지 않고 꿈만 꿔왔어. 차 마시겠어? ㅡ 좋아. ㅡ 컵이 하나뿐이야. ㅡ 상표가 떨어졌어. 뭔지 모르겠는걸.
ㅡ 사랑에… 자주 빠지곤 해? ㅡ 그래, 쉽게 빠져. ㅡ 그럴 줄 알았어. ㅡ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오래 가. 난 떠났을 때 더 가까운 느낌이 들어. 사랑은 오래된 언덕과 같아서 닳아지기 마련이야. 욕망은 극복하기 힘들고, 요즘은 돈도 많이 들어. 정열은 많은데 사소한 일로 낭비되지. 그건 사라지지 않아. 나도 그렇고.
ㅡ 그는 늦게 돌아왔어. 난 자고 있었지. 그는 어두운 내 침대 곁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어. 열쇠 소리에 깼지만, 난 자는 척했어. 그의 눈길이 느껴졌지. 아주 집요한… 처음이 아니었어. 그리곤… 내 침대에 들어와… 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날 사랑했어. 그는 그런 식을 좋아했어. 때론 이런 말도 했지. “우리 죽은 척 해볼까?” 그를 만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어. 너무나 편안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내가 모르는 일까지도. 그에겐 모든 게 문제야. 나의 과거, 미래, 현재, 죽음까지도… 난… 그냥 나야.
ㅡ 당신과의 시간이 꿈같이 느껴져. 평범하지 않은 꿈. 깊이 잠들어야 꿀 수 있는 꿈. ㅡ … ㅡ 당신 옆에 앉아 있는 게, 영원처럼 느껴져. ㅡ … ㅡ 당신을 본 순간 운명처럼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 딱 한번만 얘기할께. 사랑해 미레이유, 당신을 사랑해! 그걸 모른다면… 너무 늦는 거야. 못들은 척 해. 침묵할 때야. 20년간 떠들었으니 침묵해야지. 당신 몸이 늙는 것을 생각하면… 처진 가슴에 주름살도 늘겠지, 미레이유, 당신 배에도 엉덩이에도… 다 내 잘못이야. 두고 봐, 미레이유. 후회없는 사랑, 망설임 없는 사랑이 될 거야. 오라면 오고 웃으라면 웃을께. 원하는 만큼 함께 잠을 자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팀을 이뤄 함께 일하고 우리의 운명이 무엇이든 뛰어들거야. 키스도 우리의 입을 봉하지 못해. 내게 날개를 줘. 몸이 1톤은 되는 것 같아. 트럭도 아닌데 말이야. 난 결코 다시 생을 살진 않겠어, 결코!
ㅡ 알렉스, 도와줘… 여기서 나가게 해줘…
![]() ㅡ 큰돈이 걸린 일이야. 자네 눈빛도 동하는군. 젊음은 돈을 필요로 하니까. 게다가… 여자에게 돈을 쓰면 늙는 것도 덜 느끼는 법이지. ㅡ 리즈, 내 귀여운 리즈, 난 떠나! 먼저 바다로 갈 거야. 그럼 우린 알게 되겠지. 하나의 변화가 전부를 바꾼다는 걸. 끊어진 하나의 관계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다는 걸. 살인과 비슷해. 그리고 난 살인자야. 난 범죄현장에 총을 떨구고 온 거야. 하지만 넌 그 총에서 내 지문을 지워야만 해. 네 젊음은 이 혼란스런 불가사의함을 떠안고 가겠지. 그건 괜찮아. 난 떠나. 리즈,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지 마.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나를 잊어. 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해. 네 첫 그림이 기억나. 네가 그린 최고의 그림 중에 하나였어. “소녀가 다리를 벌리면 그녀의 비밀은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다”는 제목이었지. 하지만 피임없는 섹스는 하지마. 리즈, 다신 널 보거나 만질 수 없겠지. 인생이 내 지문을 너에게서 씻어내지 않는 한…. 날 잊어. 멋지게 살아. 사랑해, 리즈, 정말 사랑해. 영원히 그리고 결코, 안녕. ㅡ 일은 꼭 성공해야 돼. 마크가 빚을 갚아서, 그의 두려움이 사라지도록. 그러면 그의 사랑이 다시 살아날 거야. 그 후에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갈 수 있겠지. 그는 날 정말 사랑해. 너는 몰라. ㅡ 아뇨, 알아요. ㅡ 그가 내 어떤 점을 사랑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인생이 무척 쉬울텐데. ㅡ 안나. ㅡ 응. ㅡ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사랑을 믿나요. 순간적으로 엄습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ㅡ …. ㅡ 우린 끔찍했어. ㅡ 얘기해 봐요. ㅡ 그는 의대생이었어. 그가 연구실에서 주사기를 가져왔지. 한번은 서로의 피를 뽑아서 마셨어. ㅡ 그만요! ㅡ 어느 여름,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어. 그가 처음으로 포기했고, 그에게 화가 났었지. 우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같이 죽기로 했는데… 그 전에 깨져버렸어. ㅡ 리즈도 비슷했어요. 날 놀래켰죠. 어느날 밤… 오토바이를 타고 볼로뉴 숲을 최고 속도로 달리는데… 그녀 혼자 뛰어내렸어요. 다치진 않았지만, 죽을 수도 있었죠… 나중에 그녀가 얘기하길, 문득 내 사랑이 의심스러워져서 “만약 그가 다음 신호등에서 날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난 뛰어내릴거야”라고 생각했데요. ㅡ 잠깐! 끊지마요. 그래, 이제 당신을 볼 수 있어요.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당신 곁을 지나간다면 난 오랫동안 세상 모든 것의 곁을 지나가게 될 거란 것. 아니, 인생을 말하는 게 아니예요. 만약 그렇다해도 난 상관치 않아. 하지만 그건 인생이 아니야, 안나. 사랑해요. 알게 될 거예요. ㅡ 아니, 당신은 이해 못해. 그가 얼마나 다정한지. 그가 저런 건 두려움 때문이야. 그가 이성을 잃는 걸 단 한 번 본적이 있어. 서랍에서 우연찮게 연애편지를 찾아냈을 때, 3년전 편지였는데, “안나, 나의 천사”로 시작하는 편지였어.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아 끌고 계속 소리를 질렀지. “말해!, 말해!” 나는 계속 울었고. “그 편지를 줘봐요!” 결국 그는 날 놔줬고 난 편지를 읽었어. 그 편지는 스위스의 샤토데에서 그 자신이 내게 쓴 거였어.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 왼손으로 썼던 거야. 자기 필체도 못 알아본 거지. ㅡ 잘 들어요 안나, 난 그 일을 할 거예요. 그가 나에게 돈을 주겠죠. 그리고 당신은 나와 함께 떠나요. ㅡ 싫어. 마크는 내 인생의 전부야. ㅡ “내 인생의 전부”라니, 역겹네요. 서른 살이고, 광장공포증인… 당신은 “당신 인생의 전부”가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내 돈 일부를 주고 안나를 떠날거야” ㅡ 지어내지 말아. ㅡ 아뇨. 들어봐요. 그가 말했어요. “안나는 날 우울하게 만들어, 그녀의 젊음은 너무 빨리 시들어가. 그녀를 볼 때면, 그녀가 이상해보여. 쓸모없어. 마치 차가운 보온병처럼 말이야.” 그가 했던 말이예요. 그가 말하길, “나는 살인자고. 그녀는 내가 범죄현장에 떨구고 온 권총이야. 내 유일한 희망은 내 지문이 씻겨나가는 것 뿐이지.” ㅡ 그만해. ㅡ 당신은 이별할 때를 알아야 해요. ㅡ 우린 항상 서로를 사랑했어. ㅡ 합선되버린 사랑이지요. ㅡ 그래, 그건 더 굳게되지. ㅡ 그건 암울한 거예요. 금고처럼 봉인되죠. 너무 늦었어요. 열쇠가 금고 안에 있을 땐 문을 열 수 없죠. ㅡ 바다로 간 줄 알았는데. ㅡ 눈은 왜 그래? ㅡ 눈병이야. 널 믿어선 안 됐어. 넌 늘 말하곤 했지, 단 하나의 문장이 인생을 바꿔버릴 수 있는, 그런 소설들을 더 좋아한다고. 하지만 모든 일엔 댓가가 따르는 법이야. 넌 문장들을 칼처럼 던져댔어. 이젠 댓가를 치러야 해. 넌 자신의 인생을 또 다시 농락했어. 니가 읽고 또 읽은 수많은 책들이 널 끔찍할 정도로 일찍 어른으로 만들어 버렸어. 넌 정말 빨리 늙어버릴거야. 알렉스, 어느날 TV가 터지듯 너도 안쪽에서 터져버릴 거야. 리즈는 널 사랑해. 난 리즈를 사랑하고. 널 사랑했지. 하지만 오늘, 너를 보고 나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단 한가지는, 혹시 네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혐오스런 시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거야. ㅡ 스위스에 가면 뭐 할 거야? ㅡ 숲속을 거닐 거예요… 도로에 키스하고… 계단 하나하나에 고마워 해야지… 만약 살아 남는다면요… 그러지 못한다면 몹시 화가 날 거예요. 전 제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왔어요. 대충한 스케치처럼… 엉망으로… 바다 한가운데서 계속 부서지는 파도처럼 해안이나 암초에도 닿지 못하는… 사는 법을 배우기엔 너무 늦었어요… 아직 내 앞에 가야할 많은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을 되돌려 놓을…. 여자들은 항상 내게 말했죠. 복잡하게 살지 말라고… 최선을 다했지만… 단순하게 사는 건 어려웠어요… ㅡ 리즈, 내 귀여운 리즈, 눈물을 삼켜. 다시 우는 널 보고 싶지 않아. 그게 이유지. 다 끝났어. |
쫓기는 기분. 급하다. 붕 떠 있다. 뱃살이 늘었다. 말이 많아졌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온 거다. 생각없이 말을 시작하고, 돌아서서 후회한다. 최악의 단어만 내뱉는다. 살아갈수록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되고 있다. 말을 줄여야 돼. 좀 더 천천히 말해야 돼... 문장을 완성하고... 규칙을 따르고... 되도록 말은 말고... 웃기만 하자... 내 속을 그대로 내보이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어떤 상처도 주기 싫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싫다. 이미 너무 많아...
말과 글을 통해야만 소통할 수 있는 관계는 위험해. 그저 눈으로, 표정으로, 서로의 감촉으로 완전할 수 있다면.
입을 다물자. 글도 줄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