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Articles, Search Results for 'Investing/Articles & Data'
- 2012/12/16 시장 실패(Market failure)
- 2012/12/12 경험(Experience)
- 2012/11/27 내가 받은 최고의 조언(The Best Advice I Ever Got)
- 2012/11/26 워렌 버핏의 기지와 지혜 (The wit and wisdom of Warren Buffett)
- 2012/06/01 Warren Buffett Transcript, 2008/02 (3)
- 2012/02/15 Warren Buffett Transcript, 2008/02 (2)
- 2011/10/16 Warren Buffett Transcript, 2008/02 (1)
- 2011/10/09 존 템플턴卿 인터뷰 (2004년 4월, SmartMoney)
- 2011/10/04 피터 린치의 불안한 시장에서 투자하기 (Peter Lynch on Investing in Volatile Markets)
- 2011/09/14 LGD, Digitimes 9/9~9/13
- 2008/09/30 슬픈 종부세
- 2005/12/26 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In an Uncertain World)
- 2005/11/30 투자의 심리학
- 2005/06/14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 2004/12/01 각국 증시 PER (2004년 11월 기준)
- 2004/10/24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시장 실패(Market failure)
2012, 12, 12, 버튼우드, 이코노미스트
주식 시장에서 일어나는 가장 미스터리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모멘텀(momentum)이다. 모멘텀은 빠르게 상승한 주식이 계속 상승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어떻게 이 명백한 시장의 이상 현상이 조정되어 사라지지 않을까?
이전 칼럼에서 이 문제에 대한 런던 경제 대학의 폴 울리(Paul Woolley)와 드미트리 바야노스(Dmitri Vayanos)의 논문을 언급했는데, 센트럴 뱅킹 저널 최근호에 그들의 새로운 논문이 실렸다. 이런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투자자들이 대리인(전문 펀드매니저)을 통해 돈을 투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투자자들은 과거 실적에 기반해 펀드 매니저를 선택한다. 그 과거 실적은 필연적으로 펀드매니저가 실력이 좋거나 운이 좋아서 선택한 주식에 의해 판가름 난다. 그래서 투자자들이 실적이 나쁜 펀드 매니저에서 실적이 좋은 펀드 매니저로 옮겨갈 때, 투자금도 필연적으로 실적이 나쁜 펀드 매니저가 선택한 주식(앞서 하락한 주식)에서 빠져나와 실적이 좋은 펀드 매니저가 선택한 주식(앞서 상승한 주식)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런 현상의 전형적인 사례가 1990년대 말에 있었다. 투자금이 가치 투자를 하는 펀드 매니저에게서 빠져나와 기술주를 사들이던 성장 투자를 하는 펀드 매니저에게로 흘러들어 갔었다.
이런 과정은 자산 버블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가격이 적정 가치와 너무 크게 차이가 나면 충격이 생기고, 이 과정이 반대로 진행된다. 펀드 매니저들이 한때 좋아했던 주식들에서 한 번에 빠져 나오는 탓에 때로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모멘텀은 최대 2년 동안 계속될 수 있으나 이후 반대 과정의 위력은 훨씬 크다는 것을 증거가 보여주고 있다.
나에게 이 이론은, 시장 실패를 부분적으로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고전 도서인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Manias, Panics and Crashes)”에서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가 개괄한 신용 팽창의 중요한 요소를 빼먹고 있다. 브레튼 우즈 체제(the Bretton Woods era)하에서는 자산 버블이 없었다. 신용이 빠르게 팽창하는 시기 이후로 여러 자산 버블이 생겼다.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울리와 바야노스는 또다른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 경제 속 금융의 확장된 역할이 그것이다. 이들은 금융 활동과 유통시장 활성화의 정도가 금융 시장이 팽창중인 불균형(expanding disequilibrium)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금융의 역기능에 대한 사회적 비용은, 경제 전반의 잘못된 자산 배분, 특히 금융 그 자체, 주기적인 금융 위기, 구제금융에 들어가는 비용과 규제 등등의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증거(즉 현재의 투자 수익률이 1980년대나 1990년대보다 훨씬 낮아졌다는 것)에 대해서 난 확신이 없다. 가치 평가가 시작된 결과로 수익률이 낮아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 발행 금리가 매우 높았을 때의 투자는 높은 장기 수익률을 보장했다. 반면 2000년대 발행 금리가 매우 낮았을 때의 투자는 낮은 수익률을 보장했다.
하지만 금융 분야가 이 혼란을 지나면서 어떻게 번영하였는지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정확하다.
대리인들은 금융 시장이 상품 시장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대칭 정보 상황하에서는 경쟁의 기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럴 해저드, 복잡성, 불투명성, 이 모든 것들이 대리인들이 이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대리인들은 잘못된 가격 책정, 변동성, 생산물의 급증에서도 이득을 얻었다. 중개 비용과 수수료는 비능률적으로 책정된 가격과 함께 예금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울리와 바야노스는 가치 투자에 집중하고, 낮은 회전률로 투자하고, 구조화된 상품과 높은 수수료를 내는 파생 상품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선언을 투자자들에게 요청한다. 내 생각엔 이 요청은 쇠귀에 경 읽기가 될 듯하다. 전통적인 투자로 얻을 수 있는 향후 수익률은 낮을 것 같고, 연금 펀드는 계약 수익률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 단지 파생 상품 투자에 대한 유혹만이 커질 것 같다.
http://www.economist.com/blogs/buttonwood/2012/12/financial-system
kiv.20121216
경험(Experience)
버나드 컨던(Bernard Condon), 포브스 매거진, 2008년 2월.
91세의 나이에도, 워렌 버핏이 칭한 “슈퍼투자자”로 잘 알려진 그 인물은 여전히 소외된 주식을 찾고 있다.
월터 슐로스는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일 때부터 시작해 열일곱 번의 불황을 지나왔다. 이 전통적인 가치 투자자는 이 불황들 속에서 여러 번 수익을 냈다. 경제는 앞으로 어떨 것인가? 그는 걱정이 없다.
가치 투자의 위대한 어른인 벤자민 그레이엄 아래서 한때 일했으며, 친구 워렌 버핏이 “슈퍼투자자”라고 칭한 슐로스는 그가 주목하고 있는 값싼 회사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곤란을 겪고 있는 자동차 휠 제조사나 적자를 내고 있는 가구 공급 업체 같은 회사다.
두터운 눈썹에 삼촌 같은 슐로스는 빠르게 돈을 쫓는 트레이더들은 이해할 수 없을 투자법을 갖고 있다. 슐로스는 한 번도 컴퓨터를 가져본 적이 없으며 보유 주식의 주가를 조간 신문에서 확인한다. 그가 보는 수많은 재무 자료의 출처는 우편으로 배달되는 사업 보고서나, 주식 정보 서비스 업체인 밸류 라인(Value Line)의 일반적인 보고서다.
슐로스는 투자 게임을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의 돈을 굴리는 일은 2003년에 그만두었다. 그의 계좌로, 슐로스는 50년간 독자적인 투자 운용자로서 수수료를 제외하고 평균 총 16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 기간 S&P 500의 수익률은 10퍼센트였다. 슐로스는 현재 자신의 수백만 달러짜리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일하는 한 사내와 함께 관리하고 있는데, 그의 나이는 슐로스의 삼분의 일이다.
리스크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하고 미스터리한 에너지를 측정한다고들 하는 컴퓨터 모델의 시대에, 슐로스의 단순하고 소박한 투자법을 듣는 건 기운나는 일이다.
“자, 봐볼까.”
슐로스가 보고서를 훑으며 기쁘게 말한다.
“주가가 폭락한 주식들 목록이지요.”
그레이엄의 회사를 떠나 홀로 자산 운용자로 활동하는 동안, 슐로스는 말 그대로 헤지 펀드였다. 운용 수수료는 받지 않았지만 이익의 25퍼센트를 가져 갔다. 그는 조사 보조원은 커녕 비서도 두지 않았다. 슐로스와 그의 아들(1973년에 합류한)은 단칸 사무실에서 밸류 라인의 차트와 표를 자세히 살폈다.
“그레이엄과 도드빌의 슈퍼투자자들”이란 제목의 유명한 1984년 연설에서 버핏은 슐로스를 효율적 시장 이론의 생생한 반증으로 소개했다. 효율적 시장 이론이란 싼값에 거래되는 주식은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 누구든 그런 주식은 언제나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이론이다. 스스로를 슈퍼투자자로 여기는지 묻자 슐로스는 난색을 표하면서 말했다. “음, 돈을 잃는 걸 좋아하진 않지요.”
슐로스는 대공황 시대의 절약 정신을 갖고 있는데, 이는 고객들에게 꽤 이득이 됐다. 아내 안나는 슐로스가 집에서 돈을 아끼려고 그녀 뒤를 따라다니며 불을 끈다고 농담을 한다. 그를 부추기면 집에 온 사람들에게 소인이 찍히지 않은 우표를 봉투에서 떼어내는 자신의 기술을 자세히 설명해줄 것이다. 슐로스가 사랑하는 밸류 라인 보고서도 58세 아들이 구독하는 것이다. “왜 제가 돈을 내야 하지요?” 슐로스의 말이다.
애덤 스미스가 쓴 고전 도서인 슈퍼머니(1972)를 보면, 슐로스는 제도하이랜드코울(Jeddo Highland Coal)과 뉴욕트랩락(New York Trap Rock) 같은 “담배꽁초” 주식들을 추천해서 스미스를 놀라게 했다. 슐로스는, 스미스의 표현에 따르면, 겸손함의 전형이었다. “전 그다지 똑똑하지 못해요.” 1930년대,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사환으로 월스트리스 생활을 시작했다. 오늘날 슐로스는 그의 맨해튼 아파트에 앉아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생각하며 소박한 기쁨을 즐긴다. “저 매를 봐요 !” 센트럴 파크 위를 날고 있는 한 마리 매를 보며 그가 외쳤다.
슐로스가 현재 관심을 두고 있는 한 회사를 보면 그의 투자법을 알 수 있다. 이 회사는 자동차 휠을 만든다. 슈퍼리어인더스트리즈인터내셔널(Superior Industries International)의 매출 사분의 삼은 경영 사정이 좋지 않은 제네럴모터스(General Motors)와 포드(Ford)가 차지한다. 이익은 5년간 계속 떨어져 왔다. 슐로스는 거실 탁자 위의 밸류 라인 보고서를 들고 집게 손가락으로 숫자들을 짚어보더니,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빠르게 말한다. 이 주식은 장부가의 80퍼센트에 거래되고, 배당수익률은 3퍼센트, 부채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년 수익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 자산에 주목하지요. 부채가 많지 않다면, 어떤 가치는 있는 거지요.”
슐로스는 부채가 없거나 적고, 경영진이 충분한 주식을 갖고 있어 주주에게 올바른 일을 하고자 하며, 장부가보다 낮은 가격에 이상적으로 거래되는 회사들을 골라낸다. 그 회사가 좋다면 약간 매입한 후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재무제표와 위임 설명서(proxies)를 요청한다. 슐로스는 이 문서들을 읽는데, 주석 내용을 특별히 신경 써서 읽는다. 이 재무 자료들에서 그가 얻고자 하는 한 가지는 경영진이 정직한가(너무 탐욕스럽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에겐 유능한 것보다 정직한 것이 더 중요하다. 홀린저인터내셔널(Hollinger International)을 운영하던 이들은 똑똑했지만 탐욕스러웠다. ㅡ 투자자들에겐 좋지 않다. ※거대 언론지주사인 홀린저인터내셔널의 회장 콘래드 블랙(Conrad Black)은 주주배당금을 빼돌리고, 공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슐로스는 회사의 사업 내용을 상세히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경영진과 거의 얘기해본 적이 없다. 타이밍이나 모멘텀에 대해서도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ㅡ 저점에서 사는 건가? 고점에서 파는 건가? ㅡ 경제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는다. 펀드를 운영할 당시 업무 시간은 9시 30분에서 4시 30분까지였는데, 뉴욕 주식 시장이 마감하고 겨우 한 시간 후였다.
슐로스는 그레이엄이 쓴 소중한 1934년판 증권분석을 여전히 읽어 본다. 책의 제본 부위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스카치 테이프 세 조각이 붙어 있다. 지금 슐로스가 투자하는 작은 방과 그의 아파트 홀을 가로지르는 벽 한 면에 버핏을 찍은 웃긴 사진 여섯 장이 걸려 있다. (풍만한 가슴의 치어리더와 함께 있는 오마하의 현인, 또는 탑처럼 쌓인 버크셔 헤더웨이의 소득 신고서와 함께 있는 오마하의 현인) 모든 사진의 아래쪽에는 농담 하나와 슐로스의 예전 별명이 인삿말로 쓰여 있다. 빅 월트(Big Walt).
슐로스는 더 유명한 가치 사냥꾼을 대형 상점인 마샬웰즈(Marshall Wells)의 주주총회에서 처음 만난다. 이 미래의 백만장자는 슐로스와 같은 이유로 그 주주총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 주식은 순유동자산(현금, 재고자산, 매출채권에서 유동부채를 제외한 것)보다 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이 수치는 그레이엄-뉴먼에서 제일 좋아하는 가치 판단 기준으로, 그레이엄-뉴먼은 슐로스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입사한 투자 회사였다. 마샬웰즈 주주총회 후에 버핏은 그레이엄-뉴먼으로 오게 되고, 슐로스와 함께 뉴욕시 42번가 동쪽에 위치한 채닌 빌딩의 한 사무실을 함께 쓴다.
슐로스는 1955년 그레이엄의 회사를 떠난다. 19명의 투자자로부터 받은 십만 달러로 직접 “운전 자본 주식(working capital stocks)”들을 사기 시작한다. 매트리스를 만드는 버튼딕시(Burton-Dixie)와 주류 도매회사인 셴리인더스트리즈(Schenley Industries) 같은 회사였다. 성공은 투자자를 불러들였고, 결국 92명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슐로스는 한 번도 광고를 해본 적이 없고 두 번째 펀드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투자 요청이 없으면 투자자들의 이익을 연말에 모두 돌려줌으로써 그가 투자할 자금의 액수를 적당한 크기로 유지했다.
1960년에 S&P는 배당금을 포함해서 0.5퍼센트 포인트 상승했다. 슐로스는 수수료를 공제하고도 7퍼센트의 수익률을 거뒀다. 한 회사를 꼽자면, 장갑을 만드는 파운즈브라더스앤코(Fownes Brothers & Co.)로, 주당 2달러에 사들였는데 운전 자본 이하의 좋은 가격이었고, 15달러에 팔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주가가 크게 상승한 회사들이 있었다. 이후 재고자산과 매출채권이 덜 중요해지자, 슐로스는 장부가 이하로 거래되는 주식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사고 파는 박자가 빨라졌다. 슐로스는 때때로 여전히 길게 하락할 주식을 사거나 너무 일찍 파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리만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1994년 상장되고 얼마 안 있어 장부가 아래에서 사들였고 몇 달만에 75퍼센트의 이익을 보고 팔았다. 그리고 나서 리만브라더스는 세 배로 올랐다.
그래도 슐로스가 내리는 여러 결정들은 정확하다. 그는 2000년도 시장이 폭락하기 전에 야후(Yahoo)와 아마존(Amazon)을 공매도 해서 큰 이익을 보았다. 이후 값싼 주식을 많이 찾을 수 없어서 슐로스와 그의 아들은 펀드를 청산하여 투자자들에게 1억3천만 달러를 돌려주었다. 슐로스 부자(父子)는 멋지게 퇴장했다. 펀드는 2000년과 2001년에 28퍼센트, 12퍼센트 상승했고, 그 기간 S&P는 9퍼센트, 12퍼센트 상승했다.
현재 S&P는 고점에서 15퍼센트 하락한 상태다. 하지만 슐로스는 값싼 주식은 아직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30퍼센트를 현금으로 들고 있다. 만약 불황이 와도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에 그레이엄을 읽은 돈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지요.” 슐로스의 말이다.
상황이 이렇기는 하지만, 슐로스는 어느 시점에는 오를 것 같은 값싼 주식을 몇 개 찾았다. 그의 관심 목록에서 첫 번째는 씨엔에이파이낸셜(CNA Financial)로, 장부가의 10퍼센트 아래에서 거래되고 있다. 주가는 올해 18퍼센트 하락했다. 이 보험사는 부채가 적고, 의결권이 있는 주식의 89퍼센트를 백만장자 티쉬(Tisch)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로우스콥(Loews Corp)이 가지고 있다. 주가가 더 내려가면 사라고 슐로스는 말한다. “이 주식을 사서 부자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보다는 안전한 게 더 낫지요.”, “만약 주가가 더 하락해도 전 걱정하지 않아요. 걱정은 티쉬 가족이 하라고 하지요.”
슐로스는 다시 밸류 라인 보고서를 넘겨 보다 885쪽에서 멈춘다. 바셋퍼니쳐(Bassett Furniture), 형편없는 주택 시장 상황에 한 방 맞은 회사다. 의자와 식탁을 만드는 이 회사는 장부가의 40퍼센트 아래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주당 80센트의 배당금을 지급하는데, 수익률이 7퍼센트에 달한다. 슐로스는 장부가가 왜 수년간 오르지 않았는지, 배당금 지급은 어떨는지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의 결정: 회사가 배당금을 줄이면 매수를 고려한다. 바셋퍼니쳐는 더 싸지겠지만 결국 주가는 회복할 것이다.
슐로스가 자동차 휠 제조업체인 슈퍼리어사를 사기 전에도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이 년전에 이 주식을 사들였다. 주가는 30퍼센트 하락했다. 하지만 그런 주가 하락을 수도 없이 봐온 이 슈퍼투자자는 냉철하게 확신한다. 이 회사는 적어도 장부가만큼의 가치는 있다고. “당신은 얼마나 잃을 수 있지요?” 슐로스가 묻는다.
kiv.20121212
http://www.forbes.com/forbes/2008/0211/048.html
내가 받은 최고의 조언(The Best Advice I Ever Got)
워렌 버핏, 74세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다른 사람이 너에게 동의해서 네가 옳은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사실이 옳기에 네가 옳다.
“저에게는 두 명의 조언자가 있었어요. 제 아버지 하워드 버핏과 벤 그레이엄이죠. 제가 존경했으며 오랜 기간 좋은 조언을 매우 많이 해주신 두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두 분의 조언을 생각해보면, 실은, 처음 떠오르는 건 나쁜 조언이에요.”
“그 때 아직 채 스물 한 살이 되지 않았지요, 1951년인데, 전 콜럼비아 비즈니스 스쿨을 갓 졸업했어요. 거기서 벤 그레이엄의 강의만 들었고, 그 강의를 제일 흥미롭게 들은 학생이었죠. 전 그레이엄-뉴먼 회사에 들어가 벤 그레이엄 밑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당당하게 벤에게 가서는 공짜로 일하겠다고 했죠. 거절하더군요.”
“하지만 증권업을 하리라는 제 결심은 여전했는데, 벤 그레이엄과 아버지께서 제게 나쁜 조언을 주신 게 그 당시예요. 두 분은 증권업을 시작하기엔 시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셨어요. 다우 지수가 그 해 내내 200 포인트 이상이었는데, 다우 지수는 언제나 200 포인트 밑으로 내려갔었다는 걸 알고 계셨죠. 그래서 두 분 모두 ‘잘 할 수는 있겠지만 시작하기에 좋은 때는 아니야’ 라고 말씀하셨죠.”
“그런 사실이 아마 아버지와, 어쩌면 벤 그레이엄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전 너무 어린애 같았죠. 어려 보일 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어렸어요. 빼빼 말랐었고, 머리도 엉망이었죠. 어쩌면 그 충고는 제가 증권업을 시작하기 전에 좀 더 성숙해져야 한다거나, 앞으로 성공할 수는 없을 거라는 두 분 나름의 정중한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두 분은 그렇게 말씀하시진 않으셨어요. 다른 말씀을 하셨죠. 어쨌든 전 신경쓰지 않았어요. 오마하로 돌아와 아버지의 회사인 버핏 폴크(Buffett-Falk)에서 주식을 팔기 시작했죠.”
“아버지께서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셨어요. 아버지가 독립적으로 생각하셨다는 사실이 주식을 사는 제 생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벤 그레이엄도 그렇게 가르쳤어요. 벤은 ‘다른 사람이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맞거나 틀리는 것이 아니야. 네가 가진 사실과 추론이 맞기에 네가 맞는 거야.’라고 했죠”
“전 네브라스카 대학에 다닐 때 벤 그레이엄이 쓴 책을 통해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 때까지 온갖 종류의 투자법을 써봤지요. 그런데 벤의 말, 특히 『현명한 투자자』 에서의 ‘안전 마진’ 그리고 ‘미스터 마켓’ 에게 이용당하기보다 어떻게 이를 이용하는가와 같은 말들이 제 눈에서 비늘을 걷어 갔지요. (※기독교 성경에서, 장님이 된 바울이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앞을 보게 된 것에 비유) 그래서 저는 단지 벤의 수업을 들으러 콜럼비아 대학에 갔고, 나중에 그에게서 일자리를 얻길 원했지만 거절 당했죠. 하지만 전 오마하로 돌아와서도 벤의 투자철학을 계속 추구했어요. 벤에게 계속 주식을 추천하고, 말하자면 귀찮게 굴었죠. 그리고 결국 1954년 어느 날 벤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다음에 뉴욕에 올 일이 있거나 하면 얘기 좀 하자는 내용이었죠. 무척 행복했죠! 그 즉시 뉴욕에 가기로 했어요.”
“1954년 8월에 일을 하러 벤에게 갔어요. 급여가 얼마나 되는지는 묻지도 않았죠. 나중에 보니 1만2천 달러였고, 다음 해에 2천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어요. 전 양쪽 회사에서 모두 일했는데, 그레이엄-뉴먼 회사는 규제 회사(a regulated company)였고, 뉴먼 & 그레이엄 유한회사는 우리가 오늘날 헤지 펀드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죠. 그런데 다 합해서 겨우 1200만 달러 밖에 운용하고 있지 않았어요!”
“월터 슐로스(Walter Schloss)와 전 작은 방에서 함께 일했지요. 비록 그가 헤지 펀드를 시작하려고 얼마 안 되서 떠났지만 말이죠. 우린 서로 정말 웃겼고, 기업 편람을 샅샅이 읽으면서 싼 주식을 찾았죠. 기업 방문을 하러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벤은 그걸 사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엄청난 걸 찾으면 벤은 5만 달러어치를 매입했죠.”
“1956년 초에 벤은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위해 회사를 정리할 계획이었어요. 그 때 이미 저는 오마하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상태였어요. 떠난다는 얘기를 하려니 곤욕스러웠죠. 벤의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다시 나왔어요. 그러다 들어가서는 떠난다는 얘기를 정말 오랫동안 못했죠. 하지만 벤은 제 아버지가 보여줬을 그런 반응을 보여줬어요. ‘네게 좋을대로 하렴’”
“1950년 말에 전 9천8백 달러를 갖고 있었어요. 1956년에는 15만 달러를 갖고 있었죠. 왕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오마하에서 무얼 할지 몰랐어요. 어쩌면 로스쿨에 갈지도 몰랐죠. 계획이 없었어요. 투자 조합을 시작할 줄은 정말 몰랐지요. 그런데 다음 몇 달 후에, 일곱 분께서 제가 대신 투자를 해주길 바라셨어요. 그러려면 투자 조합을 만드는 게 방법이었죠.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kiv.20121128
http://money.cnn.com/magazines/fortune/fortune_archive/2005/03/21/8254830/index.htm
워렌 버핏의 기지와 지혜 (The wit and wisdom of Warren Buffett)
캐롤 루미스(Carol Loomis)
1966년 포춘(Fortune紙)은 워렌 버핏을 우연히 만났다. 난 또 다른 투자자인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Alfred Winslow Jones)에 대한 투자 기사를 쓰고 있었고, 존스는 그 당시 유명한 투자자는 아니었지만 그 기사로 인해 막 유명해지려던 참이었다. 존스는 헤지 펀드라 불리는 것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설명한 포춘의 기사는 헤지 펀드 사업이 가질 작은 호황의 시작이었다.
얼마 뒤에 내 남편인 존 루미스는 버핏을 만나고 와서 말한다. “나 이 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투자자를 만나고 온 거 같아.” 분명 난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 후에 나 역시 워렌(그리고 그의 훌륭한 첫 아내인 수지)을 알게 되었고 이 무척이나 알려지지 않은 친구가 얼마나 인상적인지 깨달았다. 우리 가족은 버핏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인 버크셔 헤더웨이의 주식을 샀다. 우린 버핏 가족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결국 나는 버핏이 주주에게 보내는 점점 더 유명해지는 연례 편지의 무상 편집인이 되었다.
그 사이 포춘은 버핏에 대한 긴 여정의 첫 기사를 내보냈다. 1970년 포춘의 “헤지 펀드에게 힘든 시간이 오고 있다.(Hard Times Come to the Hedge Funds)” 라는 기사에는 버핏에 관한 두 단락과 한 장의 사진이 실렸다. 버핏의 펀드는 희귀했는데, 13년 연속으로 수익을 내고 있었다. 1977년에 포춘은 버핏의 7,000 단어로 쓰여진,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주식 투자자에게 사기치는가(How Inflation Swindles the Equity Investor)” 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제 포춘이 버핏을 만난 지 46년이 흘렀고,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일하러 갈 때 탭댄스를 춰요(Tap Dancing to Work)” 그에 관한 중요한 모든 것(그리고 약간의 가벼운 것들도)을 우리가 모아낸 책이다. 내가 해설을 썼다.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 이야기를 시작으로 위에 거론된 모든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버핏에 관한 한 권의 진수성찬이다.
이어지는 것들은 책 내용 가운데서 발췌한 몇몇 문구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버핏은 투자자, 경영자, 자선사업가로서 모두 역사적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 확실하다.
마치는 말: 1966년, 포춘이 워렌 버핏을 처음 만났을 때, 버크셔 헤더웨이의 주식(현재의 클래스A 주식)은 22달러였다. 11월 초, 이 주식은 130,000달러 정도가 되었다.
1970년대
1970년 1월 : 헤지 펀드에게 힘든 시간이 오고 있다.
“버핏의 투자 기록은 지금까지 유별나게 좋았다. 13년간 운영하면서 … 버핏은 투자자들의 돈을 복리로 매년 24퍼센트씩 불렸다. … 이제 버핏은 헤지 펀드 게임을 그만두려 한다.”
1977년 5월 :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주식 투자자에게 사기치는가.
버핏은 이렇게 썼다. “정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이해 가능하게도, 인플레이션을 싫어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정책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 정부의 모순된 정책에 대한 풍자
1980년대
1983년 8월 22일 : 회장 버핏의 편지
“시장은, 하느님처럼, 스스로를 돕는자를 도우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달리,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자를 용서하지는 않으십니다.”
1983년 12월 26일 : 당신은 시장을 이길 수 있습니까?
투자에 있어서, 버핏이 말한다, “3볼 0스트라익까지 기다리세요.”
1986년 1월 20일 : 생각을 왜곡하는 합병 비용
“버핏은 무척 똑똑해요.” 브루스 바서스타인은 기억한다. “그에게 선택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986년 9월 29일 : 이 모든 걸 아이들에게 물려줄 건가요?
“올림픽 대표팀을 뽑는 최고의 방법이 20년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아들과 딸을 뽑는 건가요? 이 경쟁 사회에서는 미친짓이죠.”
1987년 12월 7일 : 지수 선물(index futures)에 대한 앞선 두려움
“이 나라에 주식시장과 관계된 본질적이지 않은 수단으로 도박을 벌이는 사람들은 더 필요하지 않아요. 그 짓을 부추기는 브로커들 역시 더 필요하지 않아요. … 우린 투자 자산에 대한 지적인 책임이 필요하지, 부채로 가득한 도박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1988년 4월 11일 : 워렌 버핏의 내막
“몇몇은 예외로 하고, 훌륭하다고 알려진 경영자가 형편없는 경제 기반을 가졌다고 알려진 회사와 씨름하게 되면, 변하지 않는 건 형편없는 회사뿐입니다.”
1989년 10월 30일 : 이들이 새로운 워렌 버핏일까?
“로켓 과학자는 필요 없어요. 투자는 IQ 160이 IQ 130을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 다른 사람들이 단기적인 욕심과 공포로 투자 결정을 내릴 때 합리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때 돈이 벌리지요.”
1990년대
1991년 4월 22일 : 버핏이 쓰레기를 산다
“지나고 나서 보면 제가 했었으면 하는 일이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투자 결정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듯하군요. 당신은 당신이 한 일에 대해 보상을 받을 뿐입니다.”
1994년 1월 10일 : 이제 이걸 들어봐
“폴 모저(Paul Mozer)는 벌금 3만 달러를 내고 4개월간 수감형을 선고 받았죠. 살로몬의 주주들은 (저를 포함해서) 2억 9천만 달러를 냈고, 저는 10개월간 CEO가 되는 형벌을 선고 받았죠.”
※ 부정 입찰로 살로몬을 위기에 빠뜨린 채권 트레이더 폴 모저의 낮은 형량에 대한 풍자
1995년 3월 20일 : 엉망진창이 된 파생상품 풀어내기
“버핏은 그가 파생상품을 다룬다면 모든 CEO들에게 그들의 회사가 계약 맺고 있는 각각의 파생상품을 이해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연차 보고서에 기입하도록 요구할 거라고 했지요. ‘넣어요’ 버핏이 말하죠, ‘지금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네요’”
1996년 2월 5일 : 버핏에 관하여 게이츠가
“바보라도 운영할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해야 합니다. 왜냐면 언젠가는 바보가 운영할 거니까요.”
1997년 10월 27일 : 살로몬에서 워렌 버핏의 위험한 질주
살로몬 위기를 되돌아 볼 때 : 버핏이 살로몬의 임시 회장이 되었을 때, 뉴욕과 오마하 양쪽에서 그를 필요(needing)로 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한 리포터가 물었다. “어머니가 제 속옷에 이름을 바느질(sewn) 해놓으셨죠.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그가 답했다.
※ 바느질(needling, sewn)과 필요(need)의 발음에 착안한 버핏의 유머
1998년 7월 20일 : 빌과 워렌의 쇼
“대부분의 합병에서, 인수자보다는 인수대상이 되는 게 더 낫습니다. 인수자는 획득한 동물을 다시 자기 동굴로 가져오는 것에 돈을 지불하는 거지요.”
1999년 11월 22일 : 주식 시장에 관하여 미스터 버핏이
“주식이 향후 17년간 거둘 실적이 지난 17년간의 실적과 비슷하리라는 설득력 있는 경우는 거의 생각나지 않네요. 만약 제가 가장 가능성 있는 수익률을 꼽아야 한다면, 배당금과 주가차익을 더해서, 투자자들이 총 … 얻을 건 … 6% 정도가 되겠네요.”
2000년대
2001년 2월 19일 : 밸류 머신
“버크셔는 만화영화 판타지아에서 마법사의 제자로 나왔던 미키 마우스를 떠올리게 해요. 그의 고민은 물이 넘쳐나는 것이었죠. 우리는 현금이 넘쳐나지요.”
2001년 12월 10일 : 주식 시장에 관하여 워렌 버핏
“제 개인적 취향에 따르자면, 남은 생애 동안 햄버거를 사먹을 거예요. 햄버거 가격이 내려가면, 저희 집에선 ‘할렐루야 합창’을 부르겠죠. 햄버거 가격이 올라가면, 우린 울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입하는 대부분의 것들도 이와 똑같죠. 주식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주가가 내려가면 여러분의 돈으로 더 많이 살 수 있어요. 사람들은 더 이상 좋아하지 않지요.”
2002년 11월 11일 : 모든 것을 아는 현자
“거품은 터졌고, 그러나 주가는 아직도 싸지 않고…”
2003년 5월 17일 : 대재앙 피하기
“파생상품은 대량 살상용 금융 무기예요. 위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지금은 잠재되어 있지만, 치명적일 수 있지요.”
2005년 3월 11일 : 내가 받은 최고의 조언
“1950년 말에 전 9천8백 달러를 갖고 있었어요. 1956년에는 15만 달러를 갖고 있었죠. 왕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2006년 7월 10일 : 워렌 버핏 베풀다
“전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지요. 이제 시작하기에 알맞네요.”
2008년 4월 28일 : 워렌이 생각하는 것
“모두가 경기침체는 짧고 얕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딱 그 반대로 보입니다. 부채축소는 그 자체로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2008년 6월 23일 : 버핏의 큰 베팅
“똑똑한 많은 사람들이 헤지 펀드를 운영하고 있어요. 하지만 넓게 보자면, 그들의 노력은 자기중화적(self-neutralizing)이고, 그들의 IQ는 투자자들에게 부과하는 비용을 능가하지 못해요. 투자자들은 평균적으로 오랜 동안 저비용 인덱스 펀드로 펀드의 펀드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어요.”
2010년 7월 6일 : 나의 기부 서약
“제 재산은 미국에 살면서 얻은 여러가지들이 합쳐진 겁니다. 몇몇 행운의 유전자들, 그리고 복리 … 남자와 백인으로 태어난 것 역시 미국의 다수가 맞닥뜨려야했던 거대한 장애물을 없애주었죠 … 긴 빨대들과 연결된 운명의 분배는 무척 변덕스럽지요. (Fate's distribution of long straws is wildly capricious)”
kiv.20121125
http://management.fortune.cnn.com/2012/11/19/warren-buffett-wit-wisdom/
질문: 시장에서 수많은 기관과 헤지펀드가 형성한 주가를 개인투자자들이 평가할 수 있을까요?
워렌 버핏: 크게 저평가된 주식은 지금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 그런 것들을 찾으라는 압력을 받고 있죠. 이런 상황이 아닌 여러분이 저보다는 유리합니다. 몇 년 전에 한 친구가 제게 한국 주식을 살펴보라고 했어요. 우리는 당기순이익의 3-4배에 포스코를 매입했습니다. 전 이익의 2-3배에 거래되고 건전한 대차대조표를 가진 20개의 다른 회사들도 찾아냈죠. 한국 주식시장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분산투자했지요. 우린 매우 특이한 것들을 찾습니다. 주식시장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요. 수족관 속의 생선을 잡는 것도 쉽지만, 물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훨씬 쉽습니다.
이런 상황이 몇 년전에 있었어요. 30년물과 29년6개월물 국채가 그랬죠. 유동성이 부족한 탓에 기발행채들은 30베이시스 포인트 낮게 팔리고 있었는데, 이건 액면가의 3% 였어요. LTCM은 10베이시스 포인트 때 거래에 참여했지만 너무 큰 레버리지를 쓴 탓에 포지션을 유지할 수 없었죠. 만약 여러분이 롱숏전략을 썼다면 매우 빨리 돈을 벌 수 있었을 겁니다.
시장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대부분의 주식에 대해 효율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생겼을 때는 누구도 여러분에게 말해주지 않아요. CNBC를 봐도 안 나오고, 증권사 리포트를 봐도 없어요. 여러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한 1951년에는 무디스와 S&P매뉴얼이 정보원이었죠. 한 장 한 장 넘겨봤습니다. 2미터가 넘는 선수를 찾는 농구 코치와 같았지요. 찾는다해도 그가 건강한지, 학교에는 잘 나올지 알아내야 했습니다. 근데 170cm도 안 되는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자신이 농구공을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면 전 사양하겠죠. 무디스 매뉴얼의 1443페이지에서 전 웨스턴인슈어런스시큐리티즈를 찾았습니다. 이 회사는 2년 전에 주당 21.66달러를 벌었고 전년도에는 29.09달러를 벌었어요. 전년도 내내 이 회사의 주식은 3달러에서 13달러 사이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 수익이 제대로 된 건지 알아내는 일은 남아 있었죠. 시장은 결국엔 주가를 제대로 쳐줄겁니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있어요. 너무 많은 걸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일생에서 이런 기회들 중 10개만 찾아낸다면 큰 부자가 될 거예요. 하지만 잘못된 걸 고르면 안 됩니다. 그 어떤 망할 회사도 골라선 안 됩니다. 아무리 큰 수라도 0을 곱해버리면 결국 0이 됩니다. 계산기 버튼을 다시 눌러봐도 소용없어요.
질문: 다음 세대의 위대한 투자자가 될 한 명을 꼽는다면 누가 될까요? 선생님과 비슷한 투자 스타일을 가진 투자자 가운데 선호하는 분이 계시나요?
워렌 버핏: 우린 그런 사람을 찾는 걸 막 마쳤습니다. 이사회는 CEO로서 절 대신할 3명의 후보와 투자자로서 절 대신할 4명의 후보를 선정했어요. 그들은 현재 직분에서 잘 해왔는데도 더 적은 급여로 버크셔에 오려고 합니다.
1969년에 전 제 파트너쉽을 해산했어요. 제 파트너들의 돈을 관리해줄 사람을 찾는 걸 도와줘야 했죠. 전 세코이아 펀드의 빌 루앤과 현재 버크셔의 이사인 샌디 고츠먼, 그리고 제가 “그레이엄과 도드빌의 슈퍼투자자들”에 언급했던 월터 슐로스를 추천했지요. 이들이 실패할 일은 없습니다.
전 요즘 투자자들은 잘 몰라요. 동시대인들이 아니니까요. 과거 실적만 봐서는 충분치 않습니다. 예상 가능하지도 않고 항상 소수의 괜찮은 투자자들은 있어요. 전 500만 달러로 1년에 50% 수익을 낼 수 있으나 10억 달러로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알아요. 괜찮은 투자자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너무 많은 돈을 끌어모으는 탓에 그들의 장점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괜찮은 투자자들을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만 투자금을 제한하는 건 더 어렵지요. 3살 때 우승경력이 있는 12살 먹은 경주마에 베팅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돈을 빌려 레버리지를 쓰는 매니저를 피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IQ 160짜리들을 날려버린 게 바로 레버리지예요.
질문: “성공하는 최고의 방법은 성공할 만 해지는 것입니다.”라고 작년 웨스코 정기총회에서 멍거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선생님이 어떻게 현재의 성공할 만한 위치에 올 수 있었는지 보여줄 가장 좋은 예를 그 무엇이라도 경험에 비추어 말씀해주실 게 있으신가요? 그리고 학생들 역시 어떻게 해야 성공할 만한 위치에 이를 수 있는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워렌 버핏: 건실한 행동을 하는 게 가장 큽니다. 학교를 나와 그레이엄에게 공짜로 일하겠다고 했을 때 그레이엄은 제가 고평가됐다고 말했지요. 전 그에게 유용하고 눈에 띄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레이엄에게 주식을 추천하고 계속 따라다녔죠. 거의 항상 좋은 일들은 좋은 행동에서 나옵니다. 살면서 점수를 매기지 마세요. 톰 머피는 매기지 않습니다. 톰은 저에게 좋은 일을 20개씩 해주고 있어요. 저는 제가 보답하길 바랄 뿐입니다. 점수를 매기는 건 결혼과 사업에서 끔찍한 일이예요. 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보답하고자 하는 매우 큰 갈망이 있어요. 여러분이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면, 상대방은 그 두 배를 해줄 겁니다. 점심시간에 일을 하고, 아침에 제일 먼저 출근하는 게 얼마나 드문가요. 뭔가 더 특별한 일을 한다면 눈에 띌 겁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도 기꺼이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 찰리와 저는 1959년에 동업자가 됐습니다. 우린 항상 우리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습니다. 서로의 머리 속에 과거의 실수들을 담아두지 않았어요. “가난한 찰리의 연감(Poor Charlie's Alamanack)”을 읽어보세요. 환상적입니다. 5만부가 팔렸고 여전히 독자적으로 팔립니다.
질문: 투자를 해오시면서 선생님의 전략을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셨던 때가 있었나요?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바로 잡으셨습니까?
워렌 버핏: 전 그런 타입도 아니고, 규율적이지도 않아요. 전 그저 상식에 맞는 일들을 자연스레 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전 다른 부자들이 뭘 하는지 상관하지 않아요. 전 다른 사람이 120미터짜리 보트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125미터짜리 보트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몇의 제 친구는 55명이 14명에게 서빙하는 큰 보트를 갖고 있어요. 55명 중에는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겠죠. 전 그런 일들을 겪긴 싫어요. 친구가 보트를 갖고 있으니 전 최고의 무임승차자죠. 전 여러 채의 집은 필요 없어요. 만약 제가 뭔가 미친짓을 하고 싶다면 하겠죠. 하지만 안나 니콜 스미스는 죽고 없네요. 25살 여성과 결혼하게 된 60살 노인 얘기가 생각나는군요.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노인의 친구가 묻자 그가 답했답니다. “내 나이가 90이라고 했지”
질문: 낮은 법인세율이 전세계적인 경향으로 보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미국이 현재 법인세율을 유지한다면 경쟁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보십니까?
워렌 버핏: GDP로 보면 정부세수는 18.5%고 정부지출은 20%예요. 적자재정인 거죠. 국가부채 문제는 겁나는 주제는 아니고 GDP 비중을 유지하는한은 증가된 것도 괜찮습니다. 18.5%는 어디서 온 걸까요? 정부수입은 2.7조 달러였습니다. 2.2조 달러는 개인들에게서 왔는데, 이 중 상속세는 1%가 안 됩니다. 1.1조 달러는 소득세였고, 9000억 달러의 급여세가 포함된 거죠. 하지만 이것도 연봉 10만 달러까지만 적용된 거예요. 우린 최대의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조세 시스템을 원합니다. 하지만 가족도 돌볼 필요가 있어요.
우린 사무실에서 간단한 조사를 했습니다. 전체 세금 납부액과 총 수입을 비교해봤죠. 전 4천6백만 달러를 벌었고 세율은 17.5% 였죠. 제 세율이 제일 낮았고, 평균은 33% 였어요. 청소 아주머니가 40%더군요. 조세 시스템이 부자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겁니다. 포브스 400대 부자의 총 순자산은 2천200억 달러에서 1조5천4백억 달러로 늘었어요. 7배로 늘어난 겁니다. 입법부에선 상속세와 개인 투자 자산의 이자에 대한 법안들에 권력자들의 로비가 있어요. 우린 소득세와 급여세의 차이를 줄여야 합니다. 이건 연소득 30만 달러 이하의 사람들에겐 별 상관도 없어요.
상상해봅시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24시간 전에 요정 지니가 와서 당신이 태어날 사회와 경제 시스템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한 가지 문제점은 여러분이 시스템을 만들고 난 이후에는 여러분이 누구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 결정할 쪽지를 통 속에서 뽑아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이 만들고자 하는 시스템의 목표는 뭘까요? 번영을 이룰 시스템을 만들어야겠죠. 능력주의 사회라서 알맞은 사람이 알맞은 자리에 가야겠고, 강력한 교육 시스템을 가져야겠죠. 그리고 수많은 물자와 서비스를 구비해야겠죠. 또한 여성과 소수자를 차별해서도 안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미국의 1인당 GDP가 4만7천 달러지만 20%는 2만 달러 이하를 벌고 있습니다. 우린 질병과 노화의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세법은 한 나라의 가치를 집대성한 겁니다. 하지만 번영이라는 이름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서도 안 되죠.
질문: 선생님의 성공 가운데는 오마하에 살았기 때문에 월스트리트에서 좋아하는 주식을 사지 않은 덕분이라는 얘기가 항상 있습니다. 일과 삶을 지속하는데 어떤 것에 중점을 두어 균형을 맞추시나요? 그리고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무얼 하십니까?
워렌 버핏: 전 무척 즐겁고 이건 일이 아니예요. 전 제가 원하는 걸, 원하는 곳에서 합니다. 보트 위나 어디에서든지 말이죠. 제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는 역할을 맡았죠. 우리 둘 모두 이런 역할 분담에 문제가 없었어요. 아담 스미스가 말한 “분업”의 개념에도 맞는 겁니다. 여성은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려울 거예요. 그리고 항상 불공평함도 있지요. 개인적인 삶에서 제가 하기 싫었던 역할이나 만남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전 간단히 재미로 하는 일들이 있지요. 온라인으로 브릿지 게임을 일주일에 12시간씩 합니다. 빌 게이츠와 하지요. 빌의 아이디는 “chalengr”고 전 “tbone” 이예요.
하버드에서의 강연이 끝나고 전 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 밑에서 일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들 모두 자영업자가 됐지요. 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람이나 회사에서 일하는 건 중요한 겁니다.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남성들을 본 적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여성들은 힘든 상황을 겪지요.
kiv.2012.06.01
질문: 어떠한 자질이 경영자와 위대한 경영자를 구분 짓습니까? 하드스킬(기술/업무적)과 소프트스킬(인성/감성적)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이 어디라고 보십니까?
워렌 버핏: 버크셔 헤더웨이에는 45명의 경영자가 있습니다. 그들 중 몇몇과는 1년에 한 번 대화하죠. 몇몇은 한 달에 한 번, 몇몇은 매일 대화합니다. 전 블럼킨 가족과 매달 같이 식사합니다. 휴가도 같이 가죠. 우린 친구니까요. 우린 사업에 열정을 가진 경영자를 찾습니다. 보통 그런 이들이 우리를 찾아오죠. 우린 금융업자에게서 회사를 사본 적이 없어요. 매입한 회사를 우리가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운영을 잘 해줄 경영자들에게 의지하는 거죠. 우린 계약서도 아주 간소하게 씁니다. 제가 수표를 넘긴 뒤에도 회사는 그 전과 똑같이 운영되야 합니다. 저의 가장 큰 의문거리는 경영자들이 회사를 팔아 5억 달러를 받고도 여전히 6시에 일어나 일하러 가서 수익을 오마하로 보내줄 건가 하는 겁니다. 그들의 눈을 쳐다보며 이들이 회사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돈을 사랑하는지 판단해야 해요. 돈을 사랑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회사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왜 너무 일하고 싶어서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할까요? 저만의 작품을 그리고 있고 박수갈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벤브릿지(Ben Bridge)라는 보석 회사를 매입했습니다. 4대에 걸쳐 운영된 100개가 넘는 매장을 가진 회사죠. 가족들은 회사를 버크셔 헤더웨이에만 팔길 원했어요. 다른 이에게는 팔기 싫어했고, 종업원들도 그랬습니다. 전 소유주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도 팔고 싶어하지 않았죠. 하지만 가족들에겐 필요했습니다.
보쉐하임즈(Borsheims)에는 짐바브웨 출신의 여성 경영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MBA조차 없습니다. 우린 이력서나 학점, 추천서를 보지 않아요. 열정을 보고 공정한 급여를 지불합니다. 불공정함으로부터 발생하는 불만을 원하지 않거든요. 우린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일할 사람을 원합니다. 우린 포레스트리버社(Forest River)의 피트에게서 팩스를 받았어요. 우리가 갖고 싶어할 유형의 회사라는 내용이었죠. 피트는 혹시 그가 내일 죽게 되면 남겨질 아내와 딸이 걱정됐던 거지요. 계약을 마친 후에 우린 저녁을 먹었고 전 급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죠. 전 그에게 어떤 숫자를 말하든 수표에 써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피트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숫자를 묻더군요. 전 10만 달러를 말했고, 피트는 제가 말한 숫자 이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래서 10만 달러에 합의 봤습니다. 어제 피트가 전화를 해서는 또다른 사업을 제안하고 싶다더군요. 우린 5분간 얘기를 했고, 몇 가지 조언을 했지만, 전 그에게 정말 많은 선택권을 줍니다. 전 회사를 사는 데 17억 달러를 썼지만 가본 적도 없어요. 적어도 회사가 거기에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버크셔 헤더웨이의 경영자들 중에 위대한 경영자가 될 세 사람이 누군지 알 수는 없어요. 그들이 해나가는 걸 어느 정도 보고 나야지 알 수 있습니다. 블럼킨 여사를 보세요. 그녀에겐 같이 사업하는 아들 하나와 사업과는 관계없는 딸 셋이 있었죠. 그녀는 사업에서 나온 이익금을 공정하게 배분할 방법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했죠. 그녀는 103세 때까지 일하고 104세에 눈감았습니다. 상점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집안 가구의 가격표를 그대로 두었어요. 그러면 가게에 있는 것만 같아서 그녀가 더 편안했거든요. 그녀는 러시아를 떠나 아이오와州의 포트닷지(Fort Dodge)에 정착했습니다. 그녀는 16년간 500달러를 모아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제 전국에서 두번째로 큰 가구업체가 됐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이런 사람을 고용할 수는 없죠. 1965년부터 경쟁자들에게 이 경영자를 뺏기지 않은 우린 참 운이 좋았습니다. 몇몇 경영자는 은퇴했고 몇몇은 해고됐죠. 하지만 우린 그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질문: 만약 선생님께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건 누구이며 이유는 무엇입니까?
워렌 버핏: 아이작 뉴튼과 벤자민 프랭클린이겠네요. 전 수많은 재밌는 사람과 몇몇의 재미없는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저 두 사람은 그들이 살았던 세상에 관해 더욱 폭넓은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피아 로렌과 점심 먹을 기회를 포기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질문: 선생님께서는 연방준비제도(the Federal Reserve)가 도덕적 해이를 조장해서 자산의 잘못된 배분을 가져오고, 결국 자산 버블을 만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떤 리스크가 있을까요?
워렌 버핏: 정부가 누군가를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공익을 위한다며 개입할 때는 항상 어떤 도덕적 해이가 시작됩니다. LTCM을 구제할 때 도덕적 해이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지요. 하지만 그걸 알기란 어렵습니다. 도덕적 해이의 결과들은 15-20년 후에나 나타나니까요. 1987년 대폭락 때 그린스펀(Alan Greenspan,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장)은 임명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스페셜리스트 시스템(The specialist system, 가격안정을 위해 자기자본으로 유동성 공급 등 매매 업무가 가능한 스페셜리스트를 두는 시스템)은 실패했죠. 대부분의 스페셜리스트는 매우 적은 자본을 갖고 있었고 파산했습니다. 연방준비제도는 그들에게 자본을 공급했죠. 앞으로의 행태에 변화가 있을까요? 어쩌면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생겼습니다. 프레디맥(Freddie Mac), 패니매(Fannie Mae) 같은 매우 큰 은행들은 정부가 그들을 망하게 내버려두지 않을거라 생각했고 경영자들도 그걸 알았죠.전 지금에 와서 연방준비제도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군요. 연방준비제도는 더 많은 정보를 가졌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문: 사업에서의 성공과 엄청난 재산, 그리고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어쩜 그렇게 겸손하실 수 있죠? 그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난 세월 선생님을 가르친 특별한 인물이나 교훈이 있습니까?
워렌 버핏: 전 운좋게도 올바른 영웅을 가질 수 있었어요. 누가 여러분의 영웅인지 제게 말해준다면 전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될지 말해드리죠.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는 아이를 키우는 겁니다. 아이는 초등학교에서보다 당신에게서 더 많은 걸 배웁니다. 전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그레이엄으로부터 그랬죠. 저 역시 제 영웅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제 성공에 있어서 제가 할 일은 없었어요. 제 아버지는 주식중개인이었는데 대공황 이후에는 주식을 팔기 위해 전화를 할 사람이 없었죠. 그 결과 위대한 자본시장의 한 시기 1930년 미국에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전 자산 배분을 위한 전화배선이 되어있는 곳에서 태어났던 겁니다. 전 알맞은 전화배선을 알맞은 시기에 갖고 있었죠. 태생적인 거죠. 그리고 더 잘하기 위해 피드백을 받았죠. 오만해질 것도 없습니다. 빌 게이츠가 말하길, 제가 좀 더 일찍 태어났다면 몇몇 야수의 점심거리가 되었을거라더군요. 전 뛰지도 못하고 오르지도 못합니다. 전 자산 배분에 대해 얘기했을테고 야수는 생각했겠죠,“저거 정말 맛난 종류지.” 여러분은 모두 난소 복권에 당첨된 거예요. 이 점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 신용 위기와 그 결과 일어난 은행의 대손충당금 적립으로 인해 건전한 회사들의 효율성 상승, 사세 확장,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자금 대출이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성장을 제약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시장 유동성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하며, 유동성 공급이 가능하면 경기 침체에 도움이 된다고 보십니까? 또한 현재 대출 업무를 하지 않는 금융 기관들이 줄어든 자금 공급 상황에서 이득을 얻기 위해 대출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워렌 버핏: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건 엄청난 리스크 재조정과 평가입니다. 과거에 벌어진 문제들을 바로잡는 거죠. 현재는 합리적인 조건의 저금리 대출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12, 18개월 동안에는 없었던 것들이죠. 합리적이지 못했던 많은 고금리 대출들은 모두 시장 밖으로 쓸려 나가버렸죠. 나쁜 결정을 했던 이들에겐 고통이죠. 상대적으로 보자면 현재는 신용경색 상황이 아닙니다. 1982년의 우대 금리는 22% 였습니다. 돈이 매우 비쌌죠. 60년대 후반에는 괜찮은 조건에 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대출되는 돈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닙니다. 연방준비제도는 창구를 열었고, 금리는 떨어지죠. 그렇다고 경기 침체가 없을 거란 뜻은 아닙니다.
질문: 선생님께서 저질렀던 큰 실수나 후회는 무엇인가요?
워렌 버핏: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요. 그렇다고 괴로워하진 않아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린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사업을 하고 있어요. 실수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실행하지 않아서 손해본 실수들이 모두 100억 달러나 되는데 아무도 모르죠. 이런 실수들은 회계자료에는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1994년에 우린 신발 업체를 인수하는데 400만불 어치의 버크셔 주식을 지불했습니다. 그 업체의 가치는 현재 0 인데, 주식의 가치는 35억 달러지요. 그러니 이제 전 버크셔의 주가가 떨어지는 걸 보고 행복해합니다. 제 실수의 크기를 줄여주니까요. 1973년에는 톰 머피(Tom Murphy)가 35만불에 NBC를 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 제안을 거절했죠. 이게 바로 실행하지 않아서 손해본 큰 실수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도 달리 했었으면 좋았을 일들이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좋은 일들도 일어났죠. 나쁜 일들에 집착해봐야 얻는 건 없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찾는 게 인생의 90% 죠. 건강을 유지할 정도로, 좋은 배우자를 만날 정도로 운이 좋다면 다 된 겁니다.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불합격한 게 저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 가운데 하나죠. 불운이 행운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질문: 중동과 아시아 지역 국부 펀드의 부상에 대해서 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기업 자본 확충에 있어서 증대된 역할을 이 펀드들이 어떻게 맡을까요? 회사 현금흐름을 향한 이들 펀드와의 경쟁이 선생님의 투자 전략이나 투자 기회에 영향을 미치는지요?
워런 버핏: 어떤 경쟁이든 경쟁입니다. 국부펀드에 대한 현 상황은 흥미로와요. 대부분은 중국 때리기(China-bashing) 입니다. OPEC 때리기와 그 역할은 정치인들에게 맡겨졌죠. 오늘날 세계가 미국에서 사들이는 것보다 미국이 세계로부터 20억 달러 더 많이 사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작은 종이 쪽지를 주죠. 그럼 다른 나라들은 그 달러로 자산을 사야합니다. 우리가 생산 이상의 소비를 해온 오랜 기간만큼 다른 나라들이 미국에 투자하도록 해야 하죠. 결국 우리가 국부펀드를 만든 거고, 이 20억 달러에는 이자가 붙는 겁니다. 미국 펀드들은 이들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최고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최근엔 이들이 자산을 매입하도록 유인하고 있죠. 중국은 유노칼(Unocal)을 사고 싶어 했어요. 3등급 석유 생산 업체로 인도 같은 해외에서 생산하는 업체죠. 미국 의회는 흥분했고 395명의 의원들은 매매계약을 막는 반중국결의안에 서명했습니다. 100여년간 미국 기업은 다른 나라의 자산을 사들이며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줘놓고는 중국에게는 유노칼을 살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중국은 받아들였지만 좋아하진 않았죠. 우리가 외국 자산을 달러로 사들이고 나서, 그 달러로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립니다. 국부펀드는 우리가 만든 거예요. 이들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전 이들 국부펀드에 인덱스 펀드를 추천합니다. 그들이 미국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면서도 나쁜 조건의 계약을 하는 이들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질문: 건설 부문의 사회기반시설 투자(aggregate infrastructure investment)가 경제를 활성화시킬 거라고 보십니까?
워렌 버핏: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저소득층에게 돈을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돈을 쓸 거예요. 저 같은 사람에게 돈을 주면 안 되요. 사회기반시설 투자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투자되지 않았고 앞으로 6 ~ 12 개월간은 아무 효과도 없을 겁니다. 사회기반시설은 GDP와 큰 연관도 없어요. 미국은 소비 주도 사회(consumer-driven society)입니다. 생산량의 106%를 소비하죠.
kiv.20120215
워렌 버핏, 2008/02 (1)
질문: 부(富)의 공식과 켈리 공식(Kelly Criterion)의 인기와 함께, 가치 투자 커뮤니티에 분산투자인가 집중투자인가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느 쪽이신지는 알고 있지만, 혹시 투자 배분이나 분할매수법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워렌 버핏: 전 분산투자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전문적인 지식이 있고 자신감이 있다면 전 집중투자를 매우 옹호할 겁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이들은 전체적으로 분산투자를 해야 합니다. 경제는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겁니다. 잘못된 가격이나 잘못된 시기에 매입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게 모든 투자자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싼 인덱스 펀드를 매입하고, 천천히 정액분할매수(dollor cost average)하세요. 그저 조금 더 현명하게 투자하려 한다면, 일주일에 한 시간을 투자에 쓰세요. 투자할 때 바보 되기는 정말 쉽습니다.
만약 능력이 된다면, 분산투자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1순위 선택보다 20순위 선택에 돈을 넣는 건 미친 짓입니다.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 스타 농구선수)로 비유를 들자면, 르브론 제임스가 게임을 뛰고 있는데 다른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르브론 제임스를 빼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40명의 아내가 있다면, 그 중에 한 명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찰리 멍거와 저는 대개 5개의 종목에 투자합니다. 제가 5천만, 1억, 2억 달러를 운용한다면 80%를 5개 종목에 넣고, 가장 큰 종목에 25%를 넣을 겁니다. 1964년에 전 비중을 더 높이고 싶은 종목을 찾았습니다. 40%까지 높이고 싶었죠. 전 고객들에게 투자금을 빼가도 된다고 말했죠. 아무도 빼가지 않았습니다. 그 종목은 샐러드 오일 스캔들 후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였습니다. 1951년엔 제 순자산의 대부분을 가이코(GEICO)에 넣었죠. 후에 1998년 LTCM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재무부 30년물 채권의 신규발행채와 기발행채의 스프레드에 제 포트폴리오의 75%를 투자하려고 했었습니다. 심지어 지난 몇 년 동안에도 75%까지 투자하려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능력이 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잘 안다면, 해도 됩니다.
지난 50~60년 동안, 찰리와 저는 한 종목에 투자한 개인 자산을 2% 이상의 손실을 보고 팔아본 적이 없습니다. 평가손은 봅니다. 50% 변동하죠. 그래서 돈을 빌려 투자하면 안 됩니다. 제 발 밑의 카페트를 누군가 잡아 당길 수 있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군요.
주식시장은 물건이 팔릴 때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한 회사가 마음에 든다면, 30달러 때보다 20달러 때 더 사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만약 맥도날드가 햄버거 가격을 내린다면, 정말 멋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21세기의 다음 성장 동력은 어떤 산업이 될까요?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지요?
워렌 버핏: 그건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1930년대를 살펴 본다면, 그 누구도 자동차와 비행기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에는 2000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3개만 남아 겨우 살아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엄청났지만 투자자에겐 끔찍했죠. 투자자들은 좋은 회사 뿐만 아니라 알맞은 시간을 알아야 했습니다. 오빌 라이트(처음 동력비행을 한 라이트 형제 가운데 한 명) 이후로 항공사가 창출한 부는 거의 제로입니다. 만약 자본가 한 사람이 키티 호크(첫 동력비행이 성공한 지역)에서 그를 쏴버렸다면 투자자들에게는 크게 유리했을 겁니다. TV 제조업체들도 보세요. 세상엔 수백만 대의 TV가 있습니다. RCA와 GE가 만들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 미국에 남아 있는 TV 제조업체는 없습니다.
만약 위대한 회사를 원한다면, 코카 콜라를 보세요. 콜라는 그대로 입니다. 122년이 지난 지금 8온스 콜라를 매일 15억 달러씩 팔지요. 해자(moat)를 갖고 있는 거죠. 만약 당신이 성주라면 누군가 당신 뒤를 쫓으려 할 겁니다.
질레트는 매출의 70%를 80%의 매출총이익을 내는 면도기 판매에서 얻습니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반복됩니다. 사람은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면도는 사람이 하는 단 하나의 창의적인 행동이죠. 시스틴 성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말이죠.
스닉커즈는 지난 40년간 넘버원 초코바 업체였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스닉커즈를 꺾으라고 10억 달러를 줘도, 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좋은 회사를 가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코카 콜라나 질레트를 꺾을 수 없습니다. 리차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은 마케팅 천재입니다. 그는 버진 콜라를 들고 나왔었습니다. 콜라 이름이 무얼 뜻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한 가지만 생각나겠죠, 어쨌든 그는 코카 콜라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린 경제적으로 훌륭한 성(城)을 둘러친 넓게 파인 해자를 찾습니다. 성장 역시 좋지만 우린 강력한 경제적 조건을 가진 회사를 더 선호합니다. 앞으로 나올 연차보고서에 이런 내용에 대해 얘기한 “위대한, 좋은, 그리고 섬뜩한(The Great, the Good, and the Gruesome)”이란 제목의 제 섹션이 있습니다.
질문: 선생님께서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시고, 어떤 삶이 선생님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요? 좋은 투자를 했을 때는 흥분하면서 그 성공을 스스로 즐기시나요? 반대로 투자가 잘 안 될 때는 역시 침울해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시나요. 혹은 가급적이면 많이 일에서 감정을 배제하려고 하시나요?
워렌 버핏: 전 제가 하는 일을 즐깁니다. 전 매일 탭댄스를 추며 일하러 갑니다. 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하며 제가 사랑하는 것을 합니다. 돈을 지불해서라도 없애고 싶은 유일한 한 가지는 사람들을 해고하는 겁니다. 전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는 데 제 시간을 씁니다. 미래는 흥미진진 합니다. 버트란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은 당신이 원하는 걸 얻는 것이고, 행복은 당신이 얻는 걸 원하는 것이다.” 전 제가 태어난 날 난소 복권에 당첨 됐고(사람에게서 태어났고),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린 모두 성공했습니다. 지능적이고 교육 받았죠. 갖지 못한 것에 집중하는 건 끔찍한 실수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여러분 스스로의 잘못입니다.
전 80대인 한 여자분을 압니다. 가족과 함께 강제 수용소에 끌려 갔던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여성이었는데 모두 살아서 나오진 못했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길, “전 친구를 사귀는 게 느리답니다. 왜냐면 제가 사람들을 볼 때면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거든요. ‘저들이 날 숨겨줄까?’” 만약 여러분이 제 나이가 된다면, 혹은 더 젊다면, 그리고 여러분을 숨겨줄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매우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 자식도 그들을 숨겨주지 않을 세계적인 부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빠는 다락방에 숨어 있어요, 다락방에요!” 그들 중 몇몇은 이사회에 들어가거나 명예 학위를 얻음으로써 계속해서 이를 보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친구 중 한 명과 그가 거둘 미래 수익의 10%를 살 수 있다면 누굴 선택할까요? 가장 IQ가 높은 친구나, 최고의 성적을 거둔 친구, 단지 제일 효율적이기만한 친구는 아닐 겁니다. 여러분은 너그럽고 자기 일에 열심히고 정직한 사람을 선택할 겁니다. 이번에는 친구 중 한 명과 그가 거둘 미래 수익의 10%를 공매도한다고 상상해보세요. 보통 여기서 여러분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면 더 재밌어지지요. 여러분은 가장 성적이 나쁜 친구를 선택하진 않을 겁니다. 그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불쾌하고, 자기 혼자 잘난 사람을 선택하겠죠. 만약 여러분이 500마력의 엔진을 갖고 있는데 단지 50마력만 쓰게 된다면, 300마력의 엔진을 갖고 있지만 250마력의 출력을 내는 이에게 지게 될 겁니다. 가능성과 실제 성과 사이의 차이는 인격에서 기인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자질과 경멸하는 자질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그 자질들에 대해 여러분 자신이 보이는 반응이 바로 여러분의 자질에 대해 세상이 보일 반응입니다. 습관의 사슬은 너무 두꺼워져 끊어지기 어려워질 때까지는 너무 가벼워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순 살이 되어서는 습관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리스트를 살펴볼 때입니다.
질문: 선생님의 투자법은 모두에게 공개되었는데도 왜 상대적으로 적은 수만이 선생님의 성공사례를 따르려 할까요?
워렌 버핏: 전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컬럼비아 비즈니스 스쿨에서 그레이엄이 강의 할 때, 그는 수업을 들은 모두가 학기가 끝날 때는 돈을 벌 수 있었을 실제 사례로 강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업을 들었던 90%는 딴짓을 하기 바빴죠. 그레이엄은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 더 많은 돈을 쌓아놓을 수 있었지만 나누었기 때문에 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돈은 종이에 찍힌 숫자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레이엄은 4200만 달러가 아니라 8600만 달러를 벌고 죽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 11살 때 시티 서비스 우선주 3주를 사면서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오마하 도서관에서 투자에 관련된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차트와 기술적 분석을 매우 파고들었습니다. 이 분석 기법들을 정말 좋아했지만, 한 푼도 돈을 벌 수가 없더군요. 19살 때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를 읽었고, 이 책은 제 투자관을 바꿔놓았죠. 제가 이 책을 읽어서 그레이엄이 돈을 잃었을까요? 어쩌면 경쟁자가 늘어서 돈을 좀 덜 벌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그레이엄에게 문제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투자 철학은 즉시 받아들여지거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빠르게 돈을 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돈은 그렇게 벌리지 않지요. 그레이엄의 투자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충분한 약속을 해주지 못합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능력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치기 좋은 공을 기다려야 하죠. 주가가 내일 오를지 내릴지 예측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죠. 인터넷 회사에 투자한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회사의 가격을 몰랐어요. 주식이 오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샀던 것이죠. 만약 그들에게 “나는 이 회사 주식을 6조원에 산다. 왜냐하면…” 의 문장을 완성하라고 했다면 아마 한 문장의 반도 못 채웠을 겁니다. 이건 옛날 얘기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랑 똑같아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죠. 찰리와 저는 경쟁자들에게 가르쳐 줬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저희랑 경쟁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우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법니다.
kiv.20111016
존 템플턴卿 인터뷰
by Eleanor Laise
1 April 2004 SmartMoney
질문: 테네시 시골 출신의 소년이 어떻게 글로벌 가치 투자의 개척자가 되었을까요?
존 템플턴: 테네시에서 살 때 저는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보질 못했지요. 예일 대학에 있을 때 부유한 집안 출신의 아이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 단 한 명도 미국 이외의 나라에 투자하고 있지 않더군요. 전 이해가 안 됐어요. 분명 그들이 자신들의 투자처를 한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많은 나라에서 찾았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겠죠. 그래서 전 투자자문업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미국 이외의 나라에 대한 투자자문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폭넓은 기회를 본 거죠.
질문: 1939년에 템플턴경께서는 주당 1달러 아래에서 거래되는 뉴욕 주식 시장의 모든 주식을 100달러씩 매입하셨습니다. 모두 104개 회사였고, 그 중 37개 회사는 이미 부도가 난 상태였죠. 왜 그런 투자를 하셨습니까?
존 템플턴: 히틀러가 폴란드를 점령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전 맨하탄에 있는 록펠러 플라자 30번지의 제 사무실에 앉아 있었지요. 이 사건이 곧 2차 세계대전을 불러오리란 건 확실했습니다. 전시 기간 중에는 과잉된 상태에 있는 모든 것들, 그래서 수익성이 없던 모든 것들이 부족해지고 수익성이 생기죠. 3년 뒤에 전 104개 회사 가운데 100개 회사에서 수익을 올렸습니다.
질문: 2000년 미국 기술주의 거품이 터지리란 걸 알게 해준 신호가 있었습니까?
존 템플턴: 만약 대중보다 더 나은 실적을 올리길 원한다면 대중과는 다른 방식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4년 전에 사람들은 기술주에 몰려 들고 있었습니다. 주가는 하늘 높이 치솟았죠. 전 제 고객들의 기술주를 팔았습니다. 또 많은 기술주를 공매도했습니다. 이런 투자 철학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대중을 도우라. 사람들이 절실히 팔고자 할 때, 그들을 도우라, 사주어라.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사려 할 때, 그들을 도우라, 팔아주어라.”
질문: 잘 생각해볼 좋은 방법이군요.
존 템플턴: 농담에 가깝죠.
질문: 1992년에 템플턴경께서는 “앞으로 10년 동안은 가장 행복한 시기가 될 것이고, 가장 진보적인 시기가 될 것이다.“ 또한 “유럽과 미국이 빠르게 번영할 할 것이다.”라고 예측하셨습니다. 다음 10년 역시 긍정적이십니까?
존 템플턴: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최고로 영광스러운 시기를 살고 있지요. 지난 어떤 세기보다 더 많은 번영이 있었습니다. 100년 전만해도 다우 지수는 100을 넘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10700까지 올랐고, 한 세기만에 백 배나 오른겁니다. 아마 다음 세기도 증가폭은 똑같이 엄청날 겁니다. 더 엄청나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지만 이건 말해야 겠군요. 지금 주가는 대단히 높습니다. 한 산업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과 국가들의 주식이 그렇죠.
질문: 템플턴경께서 보시는 현재 미국 주식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존 템플턴: 앞으로 5년 동안 주식 시장이 하락할 확률은 거의 50:50 입니다. 주가 지수가 30퍼센트 이상 하락하거나 30퍼센트 이상 상승할 수 있죠. 주가는 현재 매우 높습니다. 나스닥 지수는 다음 해 수익의 36배에 거래되고 있고, 지난 해 수익의 95배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건 높은 겁니다. 대부분 제 인생에서 전 수익의 12배 아래에서 거래되는 싼 곳들을 찾았습니다.
질문: 지금 시장 환경을 1972년의 주식 시장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다우 지수가 60년대 말의 최고치인 1000 포인트대로 다시 상승했지만 1982년까지 그 수준을 벗어나질 못했죠.
존 템플턴: 주식 시장이 낙관적이던 시기였죠. 순환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모든 세기마다 적어도 5번의 이런 순환기가 있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그 기간은 평범한 순환기였습니다. 이번 순환기는 과도해보이는군요. 그 시기의 주가는 지금처럼 높이 오른적이 없었습니다.
질문: 주가가 저렴해 보이는 미국의 산업 부문이 있습니까?
존 템플턴: 없습니다. 있길 바라지만 찾을 수가 없군요. 안전하게 투자하는 게 정답입니다. 안전하게 투자하라는 말의 뜻은 국가별로, 산업별로, 증권별로 분산 투자하라는 얘기입니다. 현재로선 누구도 자본의 반 이상을 주식에 투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그럼 템플턴경께서는 한 나라에 자본의 50퍼센트 이상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고 보십니까?
존 템플턴: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산업에 25퍼센트 이상 투자해서도 안 됩니다.
질문: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있다고 보십니까?
존 템플턴: 그렇습니다. 부동산은 주식과 매우 다릅니다. 부동산은 지역적이고 유형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지역과 여러 유형의 부동산들의 가격은 현재 위험할 정도로 높습니다. 부동산에서는 무엇이 위험할 정도로 높은 것인지 말하기 쉽지요. 그저 재건축 비용을 살펴보면 됩니다. 여기 바하마에서 전 최근 재건축 비용의 4배에서 5배에 달하는 돈을 주고 집을 산 사람들을 봤습니다.
질문: 미국 채권이 주식보다 더 매력적일까요?
존 템플턴: 생계비용(인플레이션이 감안된)과 비교해보면, 계속 미국 채권을 사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안전해 보이는 다른 나라의 채권도 있습니다. 불리한 무역수지나 정부 적자가 없는 나라들에 투자하는 게 현명하죠.
질문: 어떤 나라들이 안전해 보입니까?
존 템플턴: 많지는 않습니다. 지구에는 거의 200개 나라가 있고 150개 외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미국보다 심각한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 홍콩, 대한민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 몇 년 전에 템플턴경께서는 STRIPS(Separate Trading of Registered Interest and Principal Securities), 즉 이자가 없는 미국 국채에 투자하였습니다. 여전히 이것들을 좋아하십니까?
존 템플턴: 제가 STRIPS에 투자했던 것은 만기까지 이자율이 미국 국채보다 10%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 미국 국채 STRIPS를 우리가 방금 말한 더 강한 외화를 가진 나라의 STRIPS로 바꿔 투자한 게 더 성과가 좋았다는 걸 알았죠.
질문: 미국 달러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까요?
존 템플턴: 미국 달러가 유로화에 비해 하락할 가능성은 50:50을 넘지 않습니다. 유로화는 지난 2년간 이미 47퍼센트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엔화는 단지 25퍼센트 상승했죠. 일본은 엄청난 달러를 미국 돈을 사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이죠. 엔화는 앞으로 오를 것 같습니다.
질문: 인플레이션을 고려하고 계십니까?
존 템플턴: 장기적으로 우리 세계는 더 많이 민주화 되고, 우린 더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게 될 겁니다. 재선출되는 정치가들은 기꺼이 너무 많은 돈을 쓰는 정치가들 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세요. 인플레이션은 매년 평균 약 2퍼센트씩 상승해왔습니다. 아마도 다음 세기에는 더 높은 상승률을 기록할 겁니다. 하지만 단기적인 관점에서, 아직 어떤 상품의 공급부족도 우려되진 않습니다. 공급부족이 있을 때까지는 높은 물가를 보게 되진 않을 겁니다.
질문: 미국 경제의 회복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존 템플턴: 경제 회복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높은 수준에서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제 활동 유지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부채입니다. 전세계의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이 이렇게 높은 부채율을 기록했던 시기는 없었습니다. 제 생각엔 모기지 대출자의 20퍼센트는 압류로 집을 잃게 될 것 같습니다. 집이 부도가 나면, 경매로 팔립니다. 그럼 가격은 떨어지고 다른 집의 가격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질문: 미국의 국가 부채 수준도 우려하십니까?
존 템플턴: 오, 네. 세상 어느 나라에도 저렇게 큰 적자 예산을 편성하는 정부는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어느 나라도 저렇게 무역불균형인 나라도 없었죠. 하지만 국민총생산에서 국가 부채와 무역수지가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 본다면, 나쁘긴 하지만 보기 드문 일은 아닙니다.
질문: 이런 상황이 투자자에겐 어떤 의미가 될까요?
존 템플턴: 주식을 갖고 있기에 위험한 시기라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죠.
질문: 다른 나라의 주식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존 템플턴: 그렇습니다. 제 투자 역사에서 전 항상 절실하게 주식을 팔려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 그럼 템플턴경께서는 중국 투자 열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 템플턴: 정보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투자 사이클은 더 확대되고 더 잦아질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투자를 하려 한다면, 총 자산의 꽤 많은 부분을 중국에 투자해야 합니다. 왜냐면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중국은 어떤 나라도 이룩하지 못했던 최대의 국민총생산을 해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질문: 인도에도 중국과 같은 엄청난 기회가 있을까요?
존 템플턴: 그렇습니다. 인도에 대해서도 거의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속도면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의 발전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빠르진 않습니다. 인도 주식 시장은 12개월간 80퍼센트 넘게 상승했습니다. 이는 위험 신호입니다. 일년 전에는 감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지요.
질문: 지금 현재 세계 최고의 주식 시장은 어디입니까?
존 템플턴: “없다”가 최고의 대답입니다. 그 질문에 매달려있는 수많은 주식분석가들이 있습니다. 다른 주식 시장들의 주가들은 기준에서 보통때보다도 덜 벗어나 있습니다.
질문: 밀려드는 정보가 글로벌 가치 투자자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까?
존 템플턴: 제가 투자자문가가 됐을 때, 지구상에는 단지 17명의 주식 분석가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하나만 놓고 봐도 32,000명이 있고, 싼 곳을 찾아 조사하는 그들이 주가에 영향을 미칩니다.
질문: 만약 템플턴경께서 이제 처음 투자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신다면, 무얼 하시겠습니까?
존 템플턴: 안전하게 투자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주식에 돈을 넣지 않는다면, 투자할 곳을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금은 이미 올라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넣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사람들은 돈을 파운드화로 저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확신했었죠. 하지만 몇 년 안 되서 파운드화는 전쟁 때문에 5달러당 1파운드에서 1.5달러당 1파운드로 하락했습니다. 금과 은행 계좌가 안전하지 않다면 어디다 돈을 넣어야 할까요? 분산투자하세요. 한 가지에 너무 많은 돈을 넣지 마세요.
질문: 최근 어디에 투자하셨습니까?
존 템플턴: 제가 지난 91년간 봐온 것보다 적은 투자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해에 저는 시장중립적 헷지 펀드를 이용했습니다. 상승과 하락에 같은 비중을 두는 방침을 갖는 펀드죠. 최근에는 제가 투자 업계에 있을 때 저를 위해 일했던 이들이 운영하는 두 개 펀드에 투자했습니다. 제인 시벨즈-클라인즈의 시벨즈 멀티 펀드와 마크 홀로웨스코의 홀로웨스코 글로벌 펀드입니다. 하지만 미국증권거래위원회에는 등록되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 브로커들은 그 펀드를 팔 수가 없죠.
질문: 최근 몇 년간 기업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시장의 신뢰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존 템플턴: 정답은 상대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스캔들에 걱정이 된다면 멈춰서서 생각해보세요, 어떤 나라가 더 투자하기 안전하게 느껴질까? 세계 역사에서 어떤 시기가 더 투자하기 안전하게 느껴질까? 전 당신이 정보의 수준과 정직성의 수준에 있어서 오늘날보다 더 나은 시기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정부가 해야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존 템플턴: 없습니다. 정부는 손을 떼고 있어야 합니다. 최고의 규제는 자유 경쟁이라는 것이 누누이 증명되어 왔습니다. 국민들에게 쓸모 없는 일을 하는 것들은 짜내어져야 합니다. 이미 규제가 많지 않은 나라는 한 나라도 생각할 수 없군요.
질문: 템플턴경의 펀드를 인수했던 프랭클린 리소시즈가 시장 조작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며칠 전 기소되었습니다. 이 스캔들에 대한 템플턴경의 입장은 어떠십니까?
존 템플턴: 제가 방금 말한 모든 것들이 이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미국 뮤추얼 펀드보다 덜 미심쩍은 운영을 하는 다른 산업이나 다른 나라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저는 생각이 안 나는군요. 만약 그 뉴스에 나온 모든 청구액이 더해진다면, 한 사람의 뮤추얼 펀드 가입자가 치뤄야 할 비용은 어느 정도가 될까요? 1센트입니다.
질문: 이곳 바하마에서 31년간 살아오셨는데요.
존 템플턴: 그렇습니다. 투자 고객들을 위한 제 성과가 록펠러 플라자 30번지에 사무실을 가졌던 때보다 여기 있을 때 훨씬 좋다는 걸 알았습니다. 맨하탄에 있게 되면 대중들과 반대로 가기가 훨씬 더 힘듭니다.
kiv.20111009
피터 린치의 불안한 시장에서 투자하기 (Peter Lynch on Investing in Volatile Markets)
2011/10/04 01:27 / Investing/Articles & Data피터 린치의 불안한 시장에서 투자하기
질문: 시장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게 있습니까?
피터 린치: 저는 직업적으로 32년이 넘게 주식시장을 봐왔고, 1987년의 대폭락(다우 지수가 하루에 23% 하락)과 6번의 불경기와 같은 여러 어려운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불황, 공산주의의 영락, 자유시장경제의 번영, 은행 시스템의 실패 말이죠. 9/11의 비극은 국가적으로 끔찍했지만 제가 주식 시장에서 겪은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아닙니다. 우리 경제는 다수의 완충장치를 갖고 있으며 계속 성장해나갈 강력한 요소들을 여럿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보장지급금은 훌륭하고 실업급여는 아주 유용하죠. 연방 정부는 흑자 재정으로 2001년 불경기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9%의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고 있고, 집값은 매우 안정적이죠(집값은 지난 몇 년간 상승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경제를 돕습니다.
질문: 시장의 하락과 함께 자기 포트폴리오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있는 투자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피터 린치: 10개월 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해야겠네요. 10년 전에 했던 말과도 똑같은 말이죠. 주식시장은 변덕스러운 동물입니다. 지난 해 주식시장에는 충격적인 하락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린 약 2년에 한 번씩 10%가 넘는 폭락을 경험합니다. 단기간의 시장 방향을 예측하는 건 헛수고입니다. 주식 시장의 표면을 덮고 있는 온갖 연기들과 소음 밑에는 시장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기업들(작건 중간치건 크건)이 있음을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업의 이익이 주가를 이끌죠. S&P 500에 속한 500개의 회사들을 살펴본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10번의 불경기가 있었지만, 수익은 연평균 7%씩 성장해왔습니다. 이건 매우 좋은 기록입니다.
질문: 조정 장세(a market correction)와 하락 장세(bear market)의 공식적인 정의는 뭔가요?
피터 린치: 전 주식 시장에서 나타난 폭락들의 차이점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조정 장세라는 건 매우 빠른 시간에 많은 돈을 잃었다는, 월스트리트의 완곡한 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토론해보는 건 가치가 있는 일이죠. 제가 보기에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정상적이라는 겁니다. 네, 정상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시장이 얼마나 자주 그렇게 움직이는지 말이예요. 1970년부터 우린 21번 10% 이상의 이런 조정(다른 말로 하락)을 거쳤습니다. 하락 장세라는 건 확실히 조정 장세보다는 덜 나타나는데, 20% 이상 하락하는 시장을 뜻합니다. 지난 50년간 투자자들은 11번의 하락 장세를 경험했습니다. S&P 500 지수가 극단으로 치달은 하루들이죠. 시장의 근간을 이해하고 있는 투자자들은 하락을 경험할 때 패닉 상태로 시장에서 탈출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장기적으로는 주식 시장이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질문: 당신은 항상 장기 투자를 하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장기 투자란 무엇인가요?
피터 린치: 수많은 사람들이 장기 투자라고 하면, 다음 주 수요일부터 3주 동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장기 투자라고 할 때는 5년, 10년, 20년을 말하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 시장은 등락을 거듭할 수 있습니다. 제가 칭하는 “배경 소음(background noise)” 때문이죠. 사건들이 생깁니다. 허리케인, 전쟁, 정치적 불안, 환율과 은행 위기. 이런 것들이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시장을 요동치게 합니다. 때때로 매우 지독하지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투자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신체 부위는 당신의 간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능을 갖고 있죠. 하지만 모든 사람의 간이 큰 건 아닙니다.
질문: 당신은 시장의 변동성이 분산 투자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분산 투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변한 게 있나요?
피터 린치: 분산 투자는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현명하게 투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주식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거뒀던 21번의 기간에 채권은 19번을 플러스 수익률을 보여줬습니다. 확실히 저는 채권이 주식보다 높은 수익률을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건 자본을 채권과 다른 종류의 자산에 폭넓게 분산하는 것에 대한 매우 좋은 논거가 됩니다. 당신이 만약 시장이 어려운 시기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잘못된 분산 투자의 함정에 빠지지는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다수의 기술주와 기술주 펀드를 사서 그것만으로 자산을 구성합니다. 나스닥이 하락하면, 그 포트폴리오는 모두 함께 하락하겠죠.
질문: 투자자들을 위한 다른 조언이 있습니까?
피터 린치: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만약 당신이 12개월 안에 결혼이나 주택 계약금으로 돈을 쓸 일이 있다면 주식 시장은 돈을 둘만한 곳이 아닙니다. 당신은 내년에 주식 시장이 어떻게 될지 동전을 던져볼 수는 있겠죠. 전 다우 지수와 나스닥 지수의 다음 천 포인트가 상승할런지 하락할런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오랜 기간(5년, 10년, 20년) 있는다면 시간은 당신 편이고, 당신은 장기 투자 계획을 고수해야 합니다. 전 시장의 다음 1만 포인트 그리고 2만 포인트는 상승이라고 주장하고 싶군요. 그게 장기 추세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의 투자에 대한 책임질 수 있는 계획을 갖는 것과, 당신이 무얼 갖고 있는지, 그걸 왜 갖고 있는지를 아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척 위태롭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 실적은 미래의 결과를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산 투자가 하락장에서 이익을 보장하거나 손실에서 보호해주지는 않습니다.
kiv.20111004
LG디스플레이가 품질 문제 때문에 줄일 수밖에 없었던 LCD패널 공급량을 전달과 같은 수준으로 되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LG디스플레이의 아이패드2 패널 공급량은 6월 400만개에서 7월에 250~260만개로 줄었는데, 백라이트유닛의 품질에 문제가 생겨서 애플측에서 주문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그 기간 삼성으로부터 200만개, CMI로부터 50만개 정도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품질 문제가 해결되어 9.7인치 아이패드2 패널 공급량은 8월에 400만개를 다시 채웠고, 비슷한 수준으로 9월에도 공급될 것이라고 합니다. LG디스플레이는 애플로부터 줄었던 주문을 다시 받기 시작했지만, LCD TV와 노트북 패널의 출하량 감소로 인해 전체적인 공장가동률은 감소했다고 합니다.
애플의 3분기 아이패드2 출하량은 1200~1500만개 정도로 예상됩니다.
ㅡ LGD iPad 2 panel shipments return to previous levels, Digitimes, 2011.09.09
대형 LCD 패널 생산업체들이 침체된 패널 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생산량을 줄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LG디스플레이는 8.5G 생산라인의 가동률을 낮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1년 4분기에는 그 가동률이 50~70% 까지 더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패널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4분기가 전통적인 성수기지만 LCD TV의 높은 시장침투율과 경기둔화로 인해 LCD TV의 판매량이 줄었고, 대형 패널 생산업체의 판매량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패널 생산업체들은 노트북 관련 제품의 판매에서도 역시 저조한 실적을 내고 있는데, 이는 타블렛PC의 판매량 증가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존과 소니는 4분기에 새로운 타블렛PC를 출시할 계획입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2011년 타블렛PC의 출하량이 6천만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에이서(Acer)와 아수스텍(Asustek)은 올 4분기에 울트라북(Ultrabook)을 출시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울트라북의 출시가 대형 패널 업계 4분기 매출에 눈에 띌만한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으로 봤습니다. 대형 패널 업계가 울트라북에서 이익을 얻으려면 2012년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노트북 패널의 4분기 주문량은 기존 예측치보다 10% 정도 더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ㅡ Large-size LCD panel makers reducing output, Digitimes, 2011.09.13
… 또한 나는 주식시장에 더 관심을 갖고 아버지의 매우 분석적인 투자기법을 적용해 보았다. 그것은 벤저민 그레이엄 -- 워런 버핏이 그의 제자라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 이 1934년 데이비드 도드와 함께 쓴 고전 『증권분석』이라는 책에서 제안한 방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레이엄과 도드는 주식시장이 단기적으로는 합리성보다 감정과 유행을 반영하는 '투표 계산기'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익전망과 자산, 위험도 그리고 다른 근본요소들에 근거하여 주식의 가치를 매기는 '저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주가가 이들 요소들을 반영하여 계산된 가치 이하일 때만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이런 방식으로 주식을 분석하고 장기보유한다는 예상 아래 투자했다. 만일 아버지가 단 몇 년 뒤에 주식을 처분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주가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고 할 정도로 많이 올랐다는 표시였다.
오늘도 나는 이것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주식투자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업 전체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식 한 주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해야 한다. 제철소건, 기술집약적 기업이건 주식은 회사의 기대 미래수익의 현재가치에 대차대조표상의 보이지 않는 자산 같은 기본요소와 위험도를 감안한 만큼 가치가 있다. 비록 주가가 상당기간 동안 주식의 경제적 가치와 많이 괴리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주가는 이 경제적 가치를 반영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주기적으로 예측 가능한 결과와 함께 이런 현실을 보지 못한다. 가장 최근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닷컴 기업과 전화회사들이 몰락한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가치 계산보다 유행을 쫓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또한 시장에 대한 사고방식인 그레이엄-도드 방식은 하버드 시절에 형성된 내 회의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을 바라보고 주가가 지배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 주식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은 내게 호소력이 있었다. 잘 확립된 한 가지 학술이론은 시장이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주가가 모든 알려진 정보들과 해당 주식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장효율 이론의 부속 원리는 아무도 오랫동안 시장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서의 내 근무 경험 -- 그리고 재무이론에서의 최근 이론들 -- 에 따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의에 따르면 대부분의 투자자들, 심지어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시장을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약간의 사람들은 보다 나은 분석과 판단 그리고 뛰어난 훈련을 복합적으로 거치면 가능하다고 본다.
pp. 89~91
… 지적인 답은 하버드 시절에 발전 시키기 시작한 추론과 확률론적 정신자세와 관련이 있다.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투자란 확실히 도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구리 사업을 하고 싶었던 크레인사가 광산회사인 아나콘다사 주식을 매집하려고 할 때, 그는 아나콘다사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하고 있었다. 나는 제안이 공표된 그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확률적으로 믿으면서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드문 경우에는 골드먼삭스사가 흡수할 수 있는 잠재손실 범위에서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 반독점법이 합병을 막았고 그 거래는 무산되었다. 우리는 거액의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내 친구는 직장 상실을 포함하여 용납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나의 접근방식은 내 기본적인 기질, 라파엘 드모스 교수의 철학적 접근방법과 하버드에서 겪은 모든 경험, 뉴헤이븐에서 있었던 조지 레포와의 논쟁, 그리고 예일 대학 법대의 윤리의식으로부터 성장했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정거래에서도 분석을 하고 분석의 맹점을 찾으며 함께 유효한 결론을 모색한다. 하지만 정교한 분석이 철학에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재정거래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재정거래 -- 정책 입안처럼 -- 에서는 정보가 불완전하고 추론으로 모든 답을 얻을 수 없더라도 방아쇠를 당겨야만 한다. 즉,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이 투자 결정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의문점을 심사숙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들 중의 일부는 불완전한 대답을 얻는 것 또는 대답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러므로 위험과 기꺼이 상대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pp. 99~100
… 나는 모형에 대한 찬사와 회의를 함께 느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재무모형들은 유용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현실이 언제나 모형보다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도 하다. 모형들은 반드시 가정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블랙-숄즈 모형은 주가의 미래 변동성을 과거 변동성과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나는 MIT의 정교수 피셔를 골드먼삭스사에 채용했는데, 그는 후에 골드먼삭스사에서의 근무 경험이 모형의 가치와 한계 양쪽 모두에 대해 더 복잡한 경해를 갖게 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거래자는 그 한계를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모형에 사로잡히면 거래자는 가정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확실한 것으로 취급한다. 한참 뒤 숄즈와 머튼이 파트너로 참여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사의 거래자들은 모형의 단점을 적절히 감안하지 않은 채 사용하여 지나치게 많은 부채를 짐으로써 어려움을 겪었다. 현실이 모형과 괴리되었을 때 그들은 수십억 달러를 잃었고, 전 세계 금융체제의 안정성이 위협을 받았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말했다고 보도되었듯이 "시장은 당신이 지불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비합리적일 수 있다." 왜곡을 불러일으킨 심리적 요인과 다른 요인들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해도 단기적으로는 죽을 수도 있다. 또는 많은 가능한 이유 때문에 가치를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 경제적 전망과 시장 전망이 바뀌는데도 잔고가치를 재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깨달았다. 기존 투자를 보유하는 것은 투자를 다시 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시장이 나빠지면 그때까지의 손실을 잊어버리고 바뀐 사실에 근거하여 기대가치를 새로 분석해야 한다. 기대가치가 매력적일지라도, 유가증권의 크기와 위험도는 조건이 계속 어려워도 오랫동안 견딜 수 있는 수준에 있어야 한다. 잔고가치를 위해 기도하는 것 -- 불황 때 영업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경향 -- 은 역경을 헤쳐 가기 위한 분별 있는 방식이 아니다.
pp. 109~112
『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In an Uncertain World)』, 로버트 루빈.
그레이엄과 도드는 주식시장이 단기적으로는 합리성보다 감정과 유행을 반영하는 '투표 계산기'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익전망과 자산, 위험도 그리고 다른 근본요소들에 근거하여 주식의 가치를 매기는 '저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주가가 이들 요소들을 반영하여 계산된 가치 이하일 때만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이런 방식으로 주식을 분석하고 장기보유한다는 예상 아래 투자했다. 만일 아버지가 단 몇 년 뒤에 주식을 처분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주가가 너무 과대평가되었다고 할 정도로 많이 올랐다는 표시였다.
오늘도 나는 이것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주식투자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사업 전체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식 한 주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해야 한다. 제철소건, 기술집약적 기업이건 주식은 회사의 기대 미래수익의 현재가치에 대차대조표상의 보이지 않는 자산 같은 기본요소와 위험도를 감안한 만큼 가치가 있다. 비록 주가가 상당기간 동안 주식의 경제적 가치와 많이 괴리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주가는 이 경제적 가치를 반영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주기적으로 예측 가능한 결과와 함께 이런 현실을 보지 못한다. 가장 최근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닷컴 기업과 전화회사들이 몰락한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가치 계산보다 유행을 쫓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또한 시장에 대한 사고방식인 그레이엄-도드 방식은 하버드 시절에 형성된 내 회의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을 바라보고 주가가 지배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 주식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은 내게 호소력이 있었다. 잘 확립된 한 가지 학술이론은 시장이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주가가 모든 알려진 정보들과 해당 주식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장효율 이론의 부속 원리는 아무도 오랫동안 시장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서의 내 근무 경험 -- 그리고 재무이론에서의 최근 이론들 -- 에 따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의에 따르면 대부분의 투자자들, 심지어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시장을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약간의 사람들은 보다 나은 분석과 판단 그리고 뛰어난 훈련을 복합적으로 거치면 가능하다고 본다.
pp. 89~91
… 지적인 답은 하버드 시절에 발전 시키기 시작한 추론과 확률론적 정신자세와 관련이 있다.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투자란 확실히 도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구리 사업을 하고 싶었던 크레인사가 광산회사인 아나콘다사 주식을 매집하려고 할 때, 그는 아나콘다사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하고 있었다. 나는 제안이 공표된 그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확률적으로 믿으면서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드문 경우에는 골드먼삭스사가 흡수할 수 있는 잠재손실 범위에서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 반독점법이 합병을 막았고 그 거래는 무산되었다. 우리는 거액의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내 친구는 직장 상실을 포함하여 용납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나의 접근방식은 내 기본적인 기질, 라파엘 드모스 교수의 철학적 접근방법과 하버드에서 겪은 모든 경험, 뉴헤이븐에서 있었던 조지 레포와의 논쟁, 그리고 예일 대학 법대의 윤리의식으로부터 성장했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정거래에서도 분석을 하고 분석의 맹점을 찾으며 함께 유효한 결론을 모색한다. 하지만 정교한 분석이 철학에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재정거래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재정거래 -- 정책 입안처럼 -- 에서는 정보가 불완전하고 추론으로 모든 답을 얻을 수 없더라도 방아쇠를 당겨야만 한다. 즉,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이 투자 결정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의문점을 심사숙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들 중의 일부는 불완전한 대답을 얻는 것 또는 대답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러므로 위험과 기꺼이 상대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pp. 99~100
… 나는 모형에 대한 찬사와 회의를 함께 느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재무모형들은 유용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현실이 언제나 모형보다 더 복잡하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도 하다. 모형들은 반드시 가정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블랙-숄즈 모형은 주가의 미래 변동성을 과거 변동성과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나는 MIT의 정교수 피셔를 골드먼삭스사에 채용했는데, 그는 후에 골드먼삭스사에서의 근무 경험이 모형의 가치와 한계 양쪽 모두에 대해 더 복잡한 경해를 갖게 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거래자는 그 한계를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모형에 사로잡히면 거래자는 가정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확실한 것으로 취급한다. 한참 뒤 숄즈와 머튼이 파트너로 참여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사의 거래자들은 모형의 단점을 적절히 감안하지 않은 채 사용하여 지나치게 많은 부채를 짐으로써 어려움을 겪었다. 현실이 모형과 괴리되었을 때 그들은 수십억 달러를 잃었고, 전 세계 금융체제의 안정성이 위협을 받았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말했다고 보도되었듯이 "시장은 당신이 지불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비합리적일 수 있다." 왜곡을 불러일으킨 심리적 요인과 다른 요인들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해도 단기적으로는 죽을 수도 있다. 또는 많은 가능한 이유 때문에 가치를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 경제적 전망과 시장 전망이 바뀌는데도 잔고가치를 재평가하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깨달았다. 기존 투자를 보유하는 것은 투자를 다시 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시장이 나빠지면 그때까지의 손실을 잊어버리고 바뀐 사실에 근거하여 기대가치를 새로 분석해야 한다. 기대가치가 매력적일지라도, 유가증권의 크기와 위험도는 조건이 계속 어려워도 오랫동안 견딜 수 있는 수준에 있어야 한다. 잔고가치를 위해 기도하는 것 -- 불황 때 영업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경향 -- 은 역경을 헤쳐 가기 위한 분별 있는 방식이 아니다.
pp. 109~112
『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In an Uncertain World)』, 로버트 루빈.
사람들은 흔히 자기과신에 빠진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자기과신은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고 위험을 과소평가하며, 자신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기과신 현상이 발생하는가?
투자종목의 선정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유형의 업무에서 자기과신 현상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가?
*
투자는 힘든 과정을 거친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하지만 자기과신으로 인해 투자자들은 정보의 정확성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정보 분석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이것이 그릇된 투자결정을 유도하는데, 너무 빈번하게 거래를 한다든지 과도한 위험을 부담한다든지 하여 궁극적으로 포트폴리오에 손실을 초래한다.
자기과신 문제를 지닌 투자자는 거래를 너무 빈번하게 한다. 또한 자기과신으로 인해 자신의 투자의견을 지나치게 확신하기 때문에 투자금액을 늘린다. 투자자들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의 정확성 및 자신의 정보 분석 능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의견을 도출한다.
일반적으로 투자자는 자신이 입수한 정보의 정확성을 과대평가하고, 그러한 정보를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투자자는 특정 주식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더 기울인다.
*
자기과신은 투자자의 위험부담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합리적인 투자자는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수익률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러나 자기과신 성향이 있는 투자자는 위험부담 수준을 잘못 해석한다. 자신이 선정한 종목이 높은 수익률을 거둘 것으로 확신한다면, 위험을 염두에 두겠는가?
자기 과신 성향을 지닌 투자자의 포트폴리오가 보다 높은 위험을 부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은 고위험 주식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고위험 주식은 일반적으로 소형주나 신생기업의 주식이다. 둘째, 포트폴리오의 분산투자를 과소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
자기과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부분적으로 지식 착각에서 나온다. 이것은 정보가 많을수록 예측이 정확해진다고 믿는 경향을 말한다. 즉, 정보가 많은수록 지식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의사결정의 정확성도 향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내가 6면체 주사위를 던진 경우, 여러분은 어떤 숫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 다시말하면, 새로운 정보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예측을 보다 신뢰하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정답을 맞힐 확률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
투자자는 인터넷을 통해 방대한 정보에 접근한다. 이러한 정보에는 과거의 주가 추이나 수익률, 회사의 영업실적 등과 같은 역사적 자료뿐만 아니라 실시간 뉴스나 가격정보 및 거래량 등 현재의 정보도 포함된다. 개인투자자는 투자전문가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능숙하게 정보를 획득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인투자자는 투자전문가처럼 전문적인 훈련도 받지 않았고 경험도 쌓지 못했으므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지 잘 모른다. 즉, 개인투자자는 정보를 적절하게 해석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동일한 정보를 갖더라도 투자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대다수의 개인투자자는 투자정보를 해석하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터넷을 통해 도움을 구한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을 얻기도 하고, 전문가 서비스나 뉴스 그룹에 가입하고, 대화방이나 웹 게시물을 통해 다른 투자자의 의견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온라인 투자자는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투자의견들을 신중하게 받아들어야 한다. 모든 투자의견이 전문가의 견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정보 가운데 전문가의 견해는 별로 없다.
*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해리 마코위츠는 50년 전에 모든 투자대상을 하나의 완전한 포트폴리오로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마코위츠의 이론에 의하면, 투자자는 자신이 정한 위험수준에서 최고의 기대수익률을 제공하는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형성해야 한다. 다양한 투자대상을 조합하여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려면, 투자자는 분산투자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분산투자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이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산투자를 한다.
포트폴리오 이론을 실천하려면, 개별 투자대상의 세 가지 중요한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처음 두 가지 변수는 투자대상의 기대수익률과 위험수준(수익률의 표준편차로 측정)이다. 위험과 수익률의 조사에 대해서는 투자자들이 쉽게 이해한다. 세 번째 중요한 특성은 투자대상 수익률 간의 상관관계이다. 이것은 각 투자대상이 다른 투자대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나타낸다. 심리회계는 이와 같은 세 번째 특성의 실행을 어렵게 만든다.
…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 이론을 따르지 않고 투자대상별로 매수결정을 하여 포트폴리오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은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고르듯이 투자대상을 선택한다.
"이건 특이하구만. 맛을 좀 봐야지. 이것도 한번 먹어볼까. 이 요리도 들어 본 적이 있디."
투자자들은 새로운 종목을 매수하여 새로운 심리계좌를 개설하면서 투자대상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리계좌 간에는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투자자는 심리계좌 상호 간 및 투자자산 간의 상호작용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투자자의 분산투자는,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이론에 따른, 의도적 자산 다양화가 아니라 투자목적의 다양화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실은 투자자가 효율적인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결국 투자자는 자신이 얻는 수익률에 비해 너무 많은 위험을 부담한다. 달리 말하면, 투자자는 현재의 위험수준에서 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예전의 평가척도는 이제 적합하지 않다."
군집행동이 극단으로 치닫는 기간에 항상 주장되는 코멘트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척도로는 엄청나게 높은 주가를 정당화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저울에 올라서니 체중이 30파운드가 늘었다면, 그 저울이 더 이상 가능하지 못함은 분명하다. 대중과 부화뇌동하여 투자하는 동안에는 재무자료 분석을 근거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바탕으로 투자한다.
* 존 R. 노프싱어, 『투자의 심리학』, 스마트비지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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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종목의 선정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유형의 업무에서 자기과신 현상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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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는 힘든 과정을 거친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하지만 자기과신으로 인해 투자자들은 정보의 정확성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정보 분석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이것이 그릇된 투자결정을 유도하는데, 너무 빈번하게 거래를 한다든지 과도한 위험을 부담한다든지 하여 궁극적으로 포트폴리오에 손실을 초래한다.
자기과신 문제를 지닌 투자자는 거래를 너무 빈번하게 한다. 또한 자기과신으로 인해 자신의 투자의견을 지나치게 확신하기 때문에 투자금액을 늘린다. 투자자들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의 정확성 및 자신의 정보 분석 능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의견을 도출한다.
일반적으로 투자자는 자신이 입수한 정보의 정확성을 과대평가하고, 그러한 정보를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투자자는 특정 주식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더 기울인다.
*
자기과신은 투자자의 위험부담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합리적인 투자자는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수익률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러나 자기과신 성향이 있는 투자자는 위험부담 수준을 잘못 해석한다. 자신이 선정한 종목이 높은 수익률을 거둘 것으로 확신한다면, 위험을 염두에 두겠는가?
자기 과신 성향을 지닌 투자자의 포트폴리오가 보다 높은 위험을 부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들은 고위험 주식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고위험 주식은 일반적으로 소형주나 신생기업의 주식이다. 둘째, 포트폴리오의 분산투자를 과소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
자기과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부분적으로 지식 착각에서 나온다. 이것은 정보가 많을수록 예측이 정확해진다고 믿는 경향을 말한다. 즉, 정보가 많은수록 지식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의사결정의 정확성도 향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내가 6면체 주사위를 던진 경우, 여러분은 어떤 숫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 다시말하면, 새로운 정보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예측을 보다 신뢰하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정답을 맞힐 확률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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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는 인터넷을 통해 방대한 정보에 접근한다. 이러한 정보에는 과거의 주가 추이나 수익률, 회사의 영업실적 등과 같은 역사적 자료뿐만 아니라 실시간 뉴스나 가격정보 및 거래량 등 현재의 정보도 포함된다. 개인투자자는 투자전문가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능숙하게 정보를 획득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인투자자는 투자전문가처럼 전문적인 훈련도 받지 않았고 경험도 쌓지 못했으므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지 잘 모른다. 즉, 개인투자자는 정보를 적절하게 해석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동일한 정보를 갖더라도 투자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대다수의 개인투자자는 투자정보를 해석하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터넷을 통해 도움을 구한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을 얻기도 하고, 전문가 서비스나 뉴스 그룹에 가입하고, 대화방이나 웹 게시물을 통해 다른 투자자의 의견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온라인 투자자는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투자의견들을 신중하게 받아들어야 한다. 모든 투자의견이 전문가의 견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정보 가운데 전문가의 견해는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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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해리 마코위츠는 50년 전에 모든 투자대상을 하나의 완전한 포트폴리오로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마코위츠의 이론에 의하면, 투자자는 자신이 정한 위험수준에서 최고의 기대수익률을 제공하는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형성해야 한다. 다양한 투자대상을 조합하여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려면, 투자자는 분산투자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분산투자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이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산투자를 한다.
포트폴리오 이론을 실천하려면, 개별 투자대상의 세 가지 중요한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처음 두 가지 변수는 투자대상의 기대수익률과 위험수준(수익률의 표준편차로 측정)이다. 위험과 수익률의 조사에 대해서는 투자자들이 쉽게 이해한다. 세 번째 중요한 특성은 투자대상 수익률 간의 상관관계이다. 이것은 각 투자대상이 다른 투자대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나타낸다. 심리회계는 이와 같은 세 번째 특성의 실행을 어렵게 만든다.
…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 이론을 따르지 않고 투자대상별로 매수결정을 하여 포트폴리오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은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고르듯이 투자대상을 선택한다.
"이건 특이하구만. 맛을 좀 봐야지. 이것도 한번 먹어볼까. 이 요리도 들어 본 적이 있디."
투자자들은 새로운 종목을 매수하여 새로운 심리계좌를 개설하면서 투자대상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리계좌 간에는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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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는 심리계좌 상호 간 및 투자자산 간의 상호작용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투자자의 분산투자는,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이론에 따른, 의도적 자산 다양화가 아니라 투자목적의 다양화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실은 투자자가 효율적인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결국 투자자는 자신이 얻는 수익률에 비해 너무 많은 위험을 부담한다. 달리 말하면, 투자자는 현재의 위험수준에서 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예전의 평가척도는 이제 적합하지 않다."
군집행동이 극단으로 치닫는 기간에 항상 주장되는 코멘트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척도로는 엄청나게 높은 주가를 정당화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저울에 올라서니 체중이 30파운드가 늘었다면, 그 저울이 더 이상 가능하지 못함은 분명하다. 대중과 부화뇌동하여 투자하는 동안에는 재무자료 분석을 근거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바탕으로 투자한다.
* 존 R. 노프싱어, 『투자의 심리학』, 스마트비지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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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ford Report, June 14, 2005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Jobs says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 이것은 2005년 6월 12일에 애풀컴퓨터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CEO인 스티븐 잡스의 졸업식 연설문입니다. )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전세계에서 최고 대학 중 하나인 스텐포드 대학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이번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제 삶에서 3가지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번째 얘기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 컬리지를 첫 6개월동안 다닌 후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자퇴하기 전에 그 후 18개월동안 청강생으로 주위에 머룰렀습니다.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제가 태어나기 전 내 어머니(생모)는 젊고, 결혼도 하지 않은 대학 졸업생이어서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 졸업자에 의해 양자삼아주기 강하게 원하셨고, 태어나면 변호사와 그의 부인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출생했을 때 그들이 여아를 정말 원한다는 결정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순진하게 스텐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계층인 부모님의 모든 돈이 내 대학 등록금으로 소진되었습니다. 6개월 후 저는 대학에서 가치를 발견치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뭘하고 싶은지, 어떻게 대학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에서 내 부모님이 전 생애를 통해 벌었던 모든 돈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퇴를 결심했고, 모두 잘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순간은 무척 두려웠었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한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그 순간 저는 관심 없었던 필수 과정들을 이수하지 않을 수 있었고, 관심 있어 보이는 과정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모두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숙사도 없었고, 친구 집의 바닥에서 잠을 잤고, 먹을 음식을 사기위해 콜라병을 모아 5센트씩 모았고, 매주일 밤에 일주일에 한번 훌륭한(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헤어 크리쉬나 사원까지 기꺼이 7마일을 걷곤했습니다. 그 일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름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든 많은 것들이 후에는 가치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그 당시에 리드 대학은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최고의 서법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전 캠퍼스의 모든 포스터, 모든 서랍의 라벨은 아름답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제가 자퇴하고 정규과정을 수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법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 위해서 서법 강좌를 수강하기로 결정했고, 저는 serif[(M, H등의 글자에서상하의획에 붙인) 가는장식선, 세리프 ]와 san serif 서체를 배웠습니다. 즉 다른 글자 조합간의 총 공간을 변경하는 것에 관해, 무엇이 서체를 멋지게 만드는 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것은 과학이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저는 그것에서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러한 어떤 것도 내 삶에서 실제적인 적용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처음 메켄토시 컴퓨터를 처음 디자인할 때, 그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활자(typography)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대학에서 그 과정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결코 다양한 서체와 균형 잡힌 자간을 띄운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윈도우스가 맥을 모방했기 때문에, 개인용 PC가 글자체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제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이러한 서체 강좌를 수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들은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에는 점들을 앞쪽을 보면서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만 10년이 지난 후 뒤쪽을 돌아보니 아주 아주 명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점들을 앞쪽을 보면서 연결할 수 없습니다. ; 점들을 뒤쪽을 보면서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들이 어느 정도 당신의 미래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신뢰해야 합니다. 즉 실질, 운명, 삶, 카르마(인연, 숙명) 그 무엇이든. 이런 접근법은 결코 저를 낙담시키지 못했고, 내 삶의 모든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 얘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제가 즐겨할 수 있는 일을 빨리 발견했습니다. Woz와 저는 20세에 아버지의 차고에서 APPLE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만에 애플은 차고의 2명에서 4000명의 직원을 가진 20억불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최상의 창조물 -매킨토시-을 1년 더 빨리(29세에) 출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될 수 있냐구요? 글쎄요,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저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매우 재능있는 누군가를 고용했고 첫해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젼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저는 나이 30세 해고를 당했습니다. 아주 공식적으로 해고를 당한 것이죠. 내 전 젊음을 집중했던 것은 사라졌고, 파괴되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저는 수개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전 세대 사업가들을 낙담시킨 것처럼 즉 내게 전달된 바톤을 떨어뜨린 것처럼 느꼈습니다. 저는 데이빗, 패커드과 밥 로이스를 만나서 일을 그르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공적으로 실패했고 심지어 벨리(실리콘?)에서 도망칠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제게 새벽이 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한 것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련의 사건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저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애플에서 쫓겨난 것은 저에게 있어 가장 최선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를 제 삶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간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했습니다. )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다음 5년 동안, 저는 NeXT라는 회사와, Pixar라는 또 다른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부인이 된 굉장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Pixar는 세게 최초 Computer animated feature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창조해냈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니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주목할만한 일련의 변화로 애플은 NeXT사를 샀고, 저는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NeXT에서 개발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에 핵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멋진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꺼라고 확신합니다. 지독하게 쓴 약이었지만 저는 환자에게 그런 약이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때때로 삶이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치게 됩니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저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 제가 한 것을 사랑하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일에도 진실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믿는 일을 하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세요. 마음의 문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발견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위대한 관계처럼, 세월이 흐르면 점점 좋아지게 됩니다. 찾을 때까지 계속 찾으시고 안주하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세였을 때 “매일 매일을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사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당신은 가장 확실하게 내가 옳았어”와 같은 인용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인상적이었고, 그 이후로 지난 33년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길 원하는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리고 연속으로 많은 날 동안 “아니오”라고 대답하게 될 때, 저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압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곧 죽게 될꺼라는 것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즉 제가 삶에서 큰(중요한) 선택을 하도록 돕는 우연하게 마주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 - 외부적인 기대들, 자신감, 창피함 또는 실패의 두려움- 이런 것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곧 죽게 될꺼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뭔가를 잃게 될꺼라는 생각의 덫을 피하게 하는 제가 아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벗었고,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전쯤,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전 7:30에 정밀조사를 받았고, 분명하게 췌장에 종양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심지어 췌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제게 이것은 치료할 수 없는 형태의 암이라는 것을 말해줬고, 저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살 수 있음을 기대해야 했습니다. 제 의사는 집에 돌아가서 일들을 정리하라고 조언했고, 그것이 의사의 죽음에 대한 준비절차였습니다. “그렇게하는 것은 단지 수개월내에 제가 앞으로 10년동안 자녀들에게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아래에서 위까지)해서 가족에게 가능한 쉬운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그런 진단을 받고 하루종일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검사를 했습니다. 즉 목으로 들어가서 위를 통해서 창자속으로 들어가는 내시경을 했습니다. 제 췌장에 바늘을 넣어서 종양으로부터 세포 몇개를 취했습니다. 저는 차분했지만 함께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검사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아주 특이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현재 건강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이것이 제가 죽음에 직면했던 가장 가까운 것이었고,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장 가까웠던 것이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저는 현재 여러분께 죽음은 유용한 것이지만, 순수하게 지적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길 원하는 사람조차도 죽어서 그곳에 도달하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유일한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대리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들을 위해 길을 만들기 위해 오래된 것들을 치우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것은 여러분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날 여러분은 점차 오래된 것이 되어 치워지게 될 것입니다. 너무 극적인 것 같아 미안하지만 완전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사람의 삶을 사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로 살아가는 독단에 빠지지 마세요. 내면의 소리를 소멸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허락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세요. 여러분은 이미 어느 정도 여러분이 진정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대 “The Whole Earth Catalog"라고 불리던 놀라운 출판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세대에 바이블과 같았습니다. 그 출판물은 여기서 멀지 않은 Menlo park의 Stewart Brand라는 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그의 시적인 솜씨를 더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때는 개인용 컴퓨터와 데스크탑으로 출판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출판물은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종이 형태로 만들어진, 구글이 사용되기 35년 전의 종이형태의 구글이었습니다. 이상적이었고 간결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들이 흘러넘쳤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스튜터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를 수차례 발행했고, 그 과정을 개설하면서 최종본을 발행했습니다. 그 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저는 여러분의 나이였습니다. 그 최종본의 뒤쪽 커버에는 이른아침 시골 길 사진이 있었고, 만약 당신이 모험심이 강했더라면, 히치하이킹하는 당신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림 아래에 ”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물라“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발행을 마치면서한 고별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항상 내 스스로를 그렇게 되길 바랬습니다. 그리고 현재 졸업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물라. 고맙습니다.)
춘천에서 경제노트 가족 김현중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Jobs says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 이것은 2005년 6월 12일에 애풀컴퓨터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CEO인 스티븐 잡스의 졸업식 연설문입니다. )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전세계에서 최고 대학 중 하나인 스텐포드 대학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이번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제 삶에서 3가지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번째 얘기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 컬리지를 첫 6개월동안 다닌 후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자퇴하기 전에 그 후 18개월동안 청강생으로 주위에 머룰렀습니다.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제가 태어나기 전 내 어머니(생모)는 젊고, 결혼도 하지 않은 대학 졸업생이어서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 졸업자에 의해 양자삼아주기 강하게 원하셨고, 태어나면 변호사와 그의 부인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출생했을 때 그들이 여아를 정말 원한다는 결정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순진하게 스텐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계층인 부모님의 모든 돈이 내 대학 등록금으로 소진되었습니다. 6개월 후 저는 대학에서 가치를 발견치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뭘하고 싶은지, 어떻게 대학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에서 내 부모님이 전 생애를 통해 벌었던 모든 돈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퇴를 결심했고, 모두 잘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순간은 무척 두려웠었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은 내가 한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그 순간 저는 관심 없었던 필수 과정들을 이수하지 않을 수 있었고, 관심 있어 보이는 과정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모두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숙사도 없었고, 친구 집의 바닥에서 잠을 잤고, 먹을 음식을 사기위해 콜라병을 모아 5센트씩 모았고, 매주일 밤에 일주일에 한번 훌륭한(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헤어 크리쉬나 사원까지 기꺼이 7마일을 걷곤했습니다. 그 일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름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든 많은 것들이 후에는 가치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그 당시에 리드 대학은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최고의 서법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전 캠퍼스의 모든 포스터, 모든 서랍의 라벨은 아름답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제가 자퇴하고 정규과정을 수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법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 위해서 서법 강좌를 수강하기로 결정했고, 저는 serif[(M, H등의 글자에서상하의획에 붙인) 가는장식선, 세리프 ]와 san serif 서체를 배웠습니다. 즉 다른 글자 조합간의 총 공간을 변경하는 것에 관해, 무엇이 서체를 멋지게 만드는 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것은 과학이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저는 그것에서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러한 어떤 것도 내 삶에서 실제적인 적용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처음 메켄토시 컴퓨터를 처음 디자인할 때, 그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활자(typography)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대학에서 그 과정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결코 다양한 서체와 균형 잡힌 자간을 띄운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윈도우스가 맥을 모방했기 때문에, 개인용 PC가 글자체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제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이러한 서체 강좌를 수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들은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에는 점들을 앞쪽을 보면서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만 10년이 지난 후 뒤쪽을 돌아보니 아주 아주 명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점들을 앞쪽을 보면서 연결할 수 없습니다. ; 점들을 뒤쪽을 보면서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들이 어느 정도 당신의 미래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신뢰해야 합니다. 즉 실질, 운명, 삶, 카르마(인연, 숙명) 그 무엇이든. 이런 접근법은 결코 저를 낙담시키지 못했고, 내 삶의 모든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 얘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제가 즐겨할 수 있는 일을 빨리 발견했습니다. Woz와 저는 20세에 아버지의 차고에서 APPLE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만에 애플은 차고의 2명에서 4000명의 직원을 가진 20억불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최상의 창조물 -매킨토시-을 1년 더 빨리(29세에) 출시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될 수 있냐구요? 글쎄요,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저와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매우 재능있는 누군가를 고용했고 첫해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젼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저는 나이 30세 해고를 당했습니다. 아주 공식적으로 해고를 당한 것이죠. 내 전 젊음을 집중했던 것은 사라졌고, 파괴되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저는 수개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전 세대 사업가들을 낙담시킨 것처럼 즉 내게 전달된 바톤을 떨어뜨린 것처럼 느꼈습니다. 저는 데이빗, 패커드과 밥 로이스를 만나서 일을 그르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공적으로 실패했고 심지어 벨리(실리콘?)에서 도망칠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제게 새벽이 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한 것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련의 사건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저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애플에서 쫓겨난 것은 저에게 있어 가장 최선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를 제 삶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간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했습니다. )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다음 5년 동안, 저는 NeXT라는 회사와, Pixar라는 또 다른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부인이 된 굉장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Pixar는 세게 최초 Computer animated feature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창조해냈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니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주목할만한 일련의 변화로 애플은 NeXT사를 샀고, 저는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NeXT에서 개발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에 핵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멋진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꺼라고 확신합니다. 지독하게 쓴 약이었지만 저는 환자에게 그런 약이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때때로 삶이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치게 됩니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저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 제가 한 것을 사랑하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일에도 진실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믿는 일을 하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세요. 마음의 문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발견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위대한 관계처럼, 세월이 흐르면 점점 좋아지게 됩니다. 찾을 때까지 계속 찾으시고 안주하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세였을 때 “매일 매일을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사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당신은 가장 확실하게 내가 옳았어”와 같은 인용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인상적이었고, 그 이후로 지난 33년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길 원하는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리고 연속으로 많은 날 동안 “아니오”라고 대답하게 될 때, 저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압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곧 죽게 될꺼라는 것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즉 제가 삶에서 큰(중요한) 선택을 하도록 돕는 우연하게 마주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 - 외부적인 기대들, 자신감, 창피함 또는 실패의 두려움- 이런 것들은 죽음의 면전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곧 죽게 될꺼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뭔가를 잃게 될꺼라는 생각의 덫을 피하게 하는 제가 아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벗었고,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전쯤,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전 7:30에 정밀조사를 받았고, 분명하게 췌장에 종양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심지어 췌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제게 이것은 치료할 수 없는 형태의 암이라는 것을 말해줬고, 저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살 수 있음을 기대해야 했습니다. 제 의사는 집에 돌아가서 일들을 정리하라고 조언했고, 그것이 의사의 죽음에 대한 준비절차였습니다. “그렇게하는 것은 단지 수개월내에 제가 앞으로 10년동안 자녀들에게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아래에서 위까지)해서 가족에게 가능한 쉬운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그런 진단을 받고 하루종일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검사를 했습니다. 즉 목으로 들어가서 위를 통해서 창자속으로 들어가는 내시경을 했습니다. 제 췌장에 바늘을 넣어서 종양으로부터 세포 몇개를 취했습니다. 저는 차분했지만 함께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검사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아주 특이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현재 건강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이것이 제가 죽음에 직면했던 가장 가까운 것이었고,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장 가까웠던 것이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저는 현재 여러분께 죽음은 유용한 것이지만, 순수하게 지적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길 원하는 사람조차도 죽어서 그곳에 도달하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유일한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대리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들을 위해 길을 만들기 위해 오래된 것들을 치우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것은 여러분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날 여러분은 점차 오래된 것이 되어 치워지게 될 것입니다. 너무 극적인 것 같아 미안하지만 완전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사람의 삶을 사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로 살아가는 독단에 빠지지 마세요. 내면의 소리를 소멸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허락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세요. 여러분은 이미 어느 정도 여러분이 진정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대 “The Whole Earth Catalog"라고 불리던 놀라운 출판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세대에 바이블과 같았습니다. 그 출판물은 여기서 멀지 않은 Menlo park의 Stewart Brand라는 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그의 시적인 솜씨를 더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때는 개인용 컴퓨터와 데스크탑으로 출판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출판물은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종이 형태로 만들어진, 구글이 사용되기 35년 전의 종이형태의 구글이었습니다. 이상적이었고 간결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들이 흘러넘쳤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스튜터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를 수차례 발행했고, 그 과정을 개설하면서 최종본을 발행했습니다. 그 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저는 여러분의 나이였습니다. 그 최종본의 뒤쪽 커버에는 이른아침 시골 길 사진이 있었고, 만약 당신이 모험심이 강했더라면, 히치하이킹하는 당신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림 아래에 ”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물라“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발행을 마치면서한 고별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항상 내 스스로를 그렇게 되길 바랬습니다. 그리고 현재 졸업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물라. 고맙습니다.)
춘천에서 경제노트 가족 김현중
Black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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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목요일
검은 목요일, 즉 월 스트리트의 붕괴는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거래소가 폭락하면서 일어났고 결국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몰고왔다.
이 붕괴는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주식 시장에 엄청난 투자를 하게 만들었던, 1920년대 후반기부터 지속된 투기적인 붐에 의해 일어났다.
이런 투자는 주가를 인공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오르는 주가에 힘을 얻은 더 많은 사람들은 주가가 더 오르길 희망하며 주식을 사들였다. 이리하여 투자액은 점점 더 늘어갔고 경제적인 거품이 만들어졌다. 은행은 이런 북새통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대출해주었다.
1929년 10월 24일, 거품은 결국 터지고 광적인 주식매도현상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알거지가 되기 전에 주식을 처분하고자 결사적으로 팔아댄 통에 1300만주가 하루만에 팔렸다.
이후 며칠 만에 또 1300만주가 팔렸다. 그리고 주가는 폭락했고 수백만의 투자자가 파산했다.
주식 매수에 수 많은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은 그들 자신이 부채더미에 올라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은 수 많은 은행을 파산으로 몰고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축을 잃는 동안에 회사들은 그들의 신용을 잃고 문을 닫아야했고 이것은 광범위한 실업으로 이어졌다.
이 붕괴는 이미 아슬아슬했던 경제 상황을 극적으로 나쁘게 몰아갔고 대공황의 주요 원인이되었다.
검은 목요일을 체험한 이후에 전 세계의 주식 시장은 광적인 매도사태를 막고자 과다한 폭락 시에는 순간적으로 거래를 정지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그 결과 이후 주식 시장의 붕괴는 1929년과 같은 극심한 타격을 주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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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목요일
검은 목요일, 즉 월 스트리트의 붕괴는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거래소가 폭락하면서 일어났고 결국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몰고왔다.
이 붕괴는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주식 시장에 엄청난 투자를 하게 만들었던, 1920년대 후반기부터 지속된 투기적인 붐에 의해 일어났다.
이런 투자는 주가를 인공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오르는 주가에 힘을 얻은 더 많은 사람들은 주가가 더 오르길 희망하며 주식을 사들였다. 이리하여 투자액은 점점 더 늘어갔고 경제적인 거품이 만들어졌다. 은행은 이런 북새통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대출해주었다.
1929년 10월 24일, 거품은 결국 터지고 광적인 주식매도현상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알거지가 되기 전에 주식을 처분하고자 결사적으로 팔아댄 통에 1300만주가 하루만에 팔렸다.
이후 며칠 만에 또 1300만주가 팔렸다. 그리고 주가는 폭락했고 수백만의 투자자가 파산했다.
주식 매수에 수 많은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은 그들 자신이 부채더미에 올라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은 수 많은 은행을 파산으로 몰고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축을 잃는 동안에 회사들은 그들의 신용을 잃고 문을 닫아야했고 이것은 광범위한 실업으로 이어졌다.
이 붕괴는 이미 아슬아슬했던 경제 상황을 극적으로 나쁘게 몰아갔고 대공황의 주요 원인이되었다.
검은 목요일을 체험한 이후에 전 세계의 주식 시장은 광적인 매도사태를 막고자 과다한 폭락 시에는 순간적으로 거래를 정지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그 결과 이후 주식 시장의 붕괴는 1929년과 같은 극심한 타격을 주지는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