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 1

2011/05/25 23:18 / My Life/Diary

20 대 1
ㅡ 장 도미니크 보비,『잠수복과 나비』











  ㆍ그래, 그거야. 나는 이제서야 그 말(馬)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미트라 그랑샹(Mithra-Grandchamp)이었다.

  뱅상은 지금쯤 아베빌 근처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파리에서 자동차를 타고 오면, 바로 이 부근에 도착할 무렵부터 여정이 길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차도 적고 얼마든지 속력을 낼 수 있는 고속도로가 끝나고 2차선 국도로 접어들면, 자동차와 트럭의 행렬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문다.

  ㆍ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 뱅상과 나는 다른 몇몇 동지들과 함께 지금은 없어진 한 조간 신문을 발행하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 소유주는 언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실업가로서, 생긴 지 5,6년 된 이 신문을 탐내는 정치계-금융계의 음흉스런 모의가 한창 진행중이던 시기에, 대담하게도 파리를 통틀어 가장 젊은 팀에게 자신이 탄생시킨 신문을 맡기는 일대 모험을 감행했다. 우리도 모르게 그는 이 싸움에 우리와 더불어 자기의 마지막 카드를 던졌으며, 우리는 이 모험에 기꺼이 우리 자신을 1백 퍼센트, 아니 1천 퍼센트 투자했다.

  뱅상은 이제 사거리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사거리에서는 루앙과 크로투아 방향을 왼쪽 옆으로 끼고 베르크 방향으로 들어선 다음, 크고 작은 시가지들은 지나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바람개비 같은 사거리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수가 많다. 뱅상은 벌써 여러 차례 나를 보러 왔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는 뛰어난 방향 감각에다가 지나칠 정도로 변함없는 우정까지 겸비했다.

  ㆍ그러므로 우리는 노상 일에 쫓겼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주말은 물론 때로는 밤샘도 불사해 가며 다섯 명이서 열두 명이 할 일을 유쾌한 기분으로 해치우곤 했다. 뱅상은 1주일 동안 거창한 아이디어만도 열 개 정도는 제안했다. 이 중 세 개는 뛰어나고 다섯 개 정도는 쓸 만했으며, 나머지 두 개는 황당한 것들이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당장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뱅상의 급한 성미를 누그러뜨리도록 유도하면서,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 중에서 취사 선택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도 뱅상이 운전석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토목 공사를 있는 대로 저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2년 후에는 베르크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될 테지만, 현재로선 캠핑 트레일러 틈바구니에 끼여 감속으로 우회해야 하는 공사장에 불과하다.

  ㆍ사실상 우리는 거의 헤어진 적이 없었다. 신문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연애했으며, 신문을 위해 함께 꿈을 꾸었다. 그날 오후에 누가 경마 이야기를 꺼냈더라? 화창한 겨울 일요일이었다. 기온은 차도 하늘은 푸르고 습기라곤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뱅센 숲에서는 경마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경마광은 아니었지만, 마침 경마 칼럼 담당자가 경마장 식당에서 우리에게 식사를 한턱 낸다고 하면서, 경마라는 신비스런 세계에 입문시켜 주겠노라고 장담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경마란 확실한 투자이며,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미트라 그랑샹이 20 대 1의 배당률로 출발하므로, 웬만큼 쩨쩨한 가장들의 재테크 방법보다 훨씬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있으리라고 점쳤다.

  뱅상은 이제 베르크로 들어서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이곳에 무얼 하러 왔는지 한동안 자문할 것이다.

  ㆍ우리는 경마장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식당에서 흥겹게 점심을 먹었다. 깡패와 포주 및 불법체류자 외에도, 경마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불량배들이 일요일이라 성장을 하고 식당에들 앉아 있었다. 배불리 먹고 흡족한 상태에서 우리는 길다란 시가를 입에 물고 열심히 빨아댔다. 범죄가 무성하게 피어오르는 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네번째 경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닷가에 도착한 뱅상은 방향을 꺾어 넓은 광장을 가로지른다. 여름 휴가를 즐기는 만원 인파 속에서, 베르크의 텅 비고 얼어붙은 겨울 풍경을 찾아볼 수는 없다.

  ㆍ뱅센 숲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결국 경주가 시작한 뒤에도 마권을 사지 못했다. 내가 미처 우리 편집국 직원들이 내게 맡긴 돈을 지갑에서 꺼내기도 전에 창구가 닫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함구무언하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미트라 그랑샹이라는 이름이 편집국 전체에 퍼졌으며,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 미트라 그랑샹은 소문을 거치는 사이에 어느새 누구나 판돈을 걸고 싶어하는 전설적인 경주마로 둔갑해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거라고는 직접 경주를 관람하면서 이기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커브에서 미트라 그랑샹은 선두로 나서기 시작하더니, 커브를 벗어나면서부터는 다섯 걸음쯤을 앞섰다. 우리는 그 말이 추적자를 40미터 가량이나 제치고, 마치 꿈 속에서처럼 결승선에 유유히 들어서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전투기 같은 돌격이었다. 편집국 TV 수상기 앞에서는 모두들 기뻐 날뛸 것이 뻔했다.

  뱅상의 자동차가 병원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방문객들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나와 세상을 갈라 놓는 마지막 몇 발자국을 옮겨 놓기 위해서 특별히 용기를 내야 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유리로 된 자동문, 7번 승강기, 그리고 마침내 119호 병실에 이르는 짧은 복도. 반쯤 여린 문틈으로는, 마치 운명의 신이 삶의 낭떠러지에 던져 버린듯 드러누워 있는 환자들만 보인다. 이런 광경을 접하면 숨이 막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병실에 도착해서 울컥 목이 메이고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지 않으려면, 다른 중환자들의 병동을 거쳐 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침에 내 병실에 도착한 사람들의 표정은, 산소 호흡기 없이 깊은 물 속에 잠긴 잠수부의 표정과 흡사하다. 병실 문 앞까지 왔다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발길을 돌려 파리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뱅상은 노크를 한 후, 말없이 병실로 들어선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이제는 하도 익숙해진 나머지, 나는 뱅상의 얼굴 위로 얼핏 스쳐가는 두려움의 기색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남들이 두려운 기색을 보인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처음보다 훨씬 초연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마비로 위축된 표저이지만, 나는 그대로 환대의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한다. 찡그림에 가까운 나의 미소에 대한 답례로 뱅상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는 늘 변함이 없다. 붉은 머리털, 찌푸린 얼굴, 뒤뚱거리는 뚱뚱한 몸집의 뱅상은 마치 웨일스 지방 노동조합원이 갱내 가스 폭발 사고로 부상당한 동료를 문병 온듯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반쯤 긴장이 풀어진 뱅상은 건장-연약 체급의 권투 선수처럼 다가온다. 미트라 그랑샹의 치명적인 승리에 대하여, 그는 “머저리들, 머저리들 같으니. 신문사에서는 우리를 잡아먹으려 들겠지”라고만 말했다. 그가 늘 즐겨 쓰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미트라 그랑샹의 일화를 잊고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남으로써 나는 이중으로 고통스럽다.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과거에 대한 향수와, 특히 놓쳐 버린 기회에 대한 떨쳐 버리기 어려운 미련이라는 두 가지 감정 때문이다. 미트라 그랑샹은 사랑할 줄 몰라서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들일 수도 있고, 잡을 줄 몰라서 흘려보낸 기회일 수도 있으며, 멀리 날아가 버린 행복의 순간들일 수도 있다. 요즈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 전체가 이처럼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답을 뻔히 예상했으면서도 상을 탈 수 없는 경주.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우리는 판돈을 모두 환불함으로써 이 사건을 매듭지었다.


※ Mithra Grandchamp - Tony M. (FR) x Duchesse Royale II (FR), Tigre Royal (FR)
마차 경주(Harness Race) 경주마
2011/05/25 23:18 2011/05/2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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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2011/05/23 00:27 / My Life/Diary
  “절망한 나머지 쾌락 속에 몸을 던진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진정한 절망은 오직 고통이나 무기력으로 인도할 뿐이다.” ㅡ 카뮈,『작가수첩3』

  일주일만 세상이 멈춰버리고, 나는 잠만 잤으면 좋겠다. 아무리 오래 자도 허리가 아프지 않고, 목덜미가 결리지 않고,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았으면. 잠자는 일 외에 무얼해야 할지, 너무 할 게 많아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행복할 때조차 불안하다.
 
  운명이라는 폭력, 유전이라는 운명, 부모라는 저주.

  아쿠타가와의 자전적 소설인「점귀부」첫머리는 이렇다. “나의 어머니는 광인(狂人)이었다. 나는 한번도 내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다운 다정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 이 소설의 후반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의 친아버지는 그 다음날 아침에 별다른 고통 없이 죽었다. 죽기 직전에는 머리도 이상해졌던지 (중략) …라고 헛소리를 했다.”

  자격이 없는 자는, 사랑하지 말 것, 아이를 낳지 말 것, 말소리를 줄이고, 절대 화내지 말 것이며, 불행하게 홀로 늙어 죽어버릴 것.

  10년 넘게 간직하면서 종종 꺼내 읽어 보던 편지들을, 3년 전에 모두 찢어서 버린 일이 있다. 유일했던 안락의 증거를 폐기하면서, 스스로를 징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완전히 저열한 인간이 되었다.
 
  모든 걸 물려 받았고, 모든 걸 거부했지만, 모든 게 발현되었다.
 
  운명이라는 폭력, 유전이라는 운명, 부모라는 저주.

  “아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꽃 모종하고 싶었지만 꽃밭이 없었다 엄마, 어디에 아버지를 옮겨 심어야 할까요 살아 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 ㅡ 이성복,「꽃 피는 아버지」부분
2011/05/23 00:27 2011/05/23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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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1 (2)

2011/05/21 10:06 / My Life/Diary
  붕붕이가 방문을 긁는 소리에 깬 잠. 내 옆에서 파리 한 마리가 누운 채로 죽어 있다. ㅡ 이건 애잔한 애널로지입니까?

  혼자 살아남은 파리도 마지막은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었는지.

  휴지로 주워 버렸다.

  “한 사내가 앓아 누우면, 거의 모든 친구들은 그가 죽는 것을 보려는 은밀한 욕망을 품게 된다. 어떤 이들은 환자가 자기들보다 더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하고, 다른 이들은 임종의 고통을 연구하려는 사심 없는 희망에서 그러하다.” ㅡ 보들레르,「5.암시」,『폭죽불꽃』

  이불을 개지 않았다.
2011/05/21 10:06 2011/05/2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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