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시오와 Ribot

1. 테시오와 테일러
국내·외에서 출판된 혈통서적을 접하다 보면 페데리코 테시오(Federico Tesio)란 사람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의 곁에는 항상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E. Taylor)가 이야기의 단짝이 되고 있다. 왜일까?

물론 두 사람은 서러브레드 생산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생산방법이 너무나 동떨어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노던댄서를 생산한 테일러는 양조업에서 성공한 사업가 출신으로 사업에서처럼 풍부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주위의 소규모 목장들을 흡수.통합하여 기후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최고 의 생산목장·경마장을 만들어 갔다. 반면 Nearco와 Ribot을 생산한 이탈리아의 생산자이자 마 주 겸 조교사 테시오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오로지 말에 대한 전문성 하나만을 재산으로 하여 남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바겐세일장의 싸구려 씨암말들을 구입하여 몇십년의 노력 끝에 최고 의 경주마를 생산해 갔다.

테일러는 경매시장에서 최고의 가격으로 니어아크틱(Nearctic)의 모마 레이디 안젤라(Lady Ang ela)와 노던댄서의 모마 나탈마(Natalma)를 구입한 반면, 테시오는 자기가 필요로하는 스피드를 보유한 씨암말이라면 마격상 하자가 있거나 인기없는 혈통이더라도 구입·생산의 과정을 반복해 갔다.(그는 말에 관한 경쟁에서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며, 그가 저술한 책에서조차 그만의 특별한 배합기법은을 결코 타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생산기법도 켄터키 게인즈웨이 목장에서 40년간 매니저로 활동한 후 가족들과 테일러메이트 목장을 설립한 조지프 레넌 테일러의 이야기 속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그에게 이러한 생산패턴이 가능했던 이유는 테일러나 대다수의 목장이 상업적 생산자였음에 반해 그는 애초부터 자기가 생산한 망아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의사가 전혀 없어 남들의 평가나 세간의 인기를 철저히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비교되는 결정적인 동기는 영국의 유명한 조교사 빈센트 오브라이언(Vincent O'Brien)이 미국으로 건너간 Ribot의 망아지를 구입하기 위해 북미지역을 돌아보던 중 당시 별 로 인기가 없었던 노던댄서의 자마 1두를 구입한 사건이다. 그 망아지가 바로 1935년 바브람(Babram) 이후 35년 만에 영국의 삼관마로 등극한 니진스키(NijinskyⅡ)이다.

2. Ribot에 투자한 세월 - 30년
유명씨수말이 자기 손에 있으면 보유 씨암말 중 최선의 상대마 선택이 게을러지고, 유럽 구석구 석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씨암말 구입하는 발걸음 또한 무디어진다는 것이 테시오의 지론이었다. 그가 생산한 Ribot의 3대부 Covaliere d'Arpino는 위대한 St.Simon의 3대손으로 부마는 이탈리아 최우수 씨수말을 11년간 연속해서 석권했다.

상대마 Bella Minna는 Ribot 생산을 위한 제일보로 1200기니(테일러가 레이디 안젤라를 1만500 기니(약2만5천달러)에 구입했다니 상대적 비교는 가능하다))에 구입했고, 그로부터 Ribot의 2대부 Bellini가 태어났으며, 상대마 Tofanella는 뉴마켓 1세마 세일에서 140기니로 구입하여 부마 TENERANI를 탄생시켰다. 이 말은 이탈리아더비와 영국의 퀸엘리자베스스테이크스에서 우승하였다. 그리고 Ribot의 모마 로마넬라를 위해 그의 어미 Babara Burrini를 뉴마켓 당세마 세일에서 350기니에 구입했다. 로마넬라 또한 2세 암말 챔피언이 되었다. 이렇게 30년을 허비(?)하고 Ribot이 경주마로 데뷔하기 몇달 전 테시오는 숨을 거둬 경주로를 달리는 Ribot을 보지 못했다. 그는 죽기전 자기가 생산한 최고말은 Nearco도 Ribot도 아닌 Covalier d'Arpino라 했다. 유럽 전문가들이 20세기 유럽 최고 경주마를 선정할 때 Sea-Bird와 Ribot 중 누가 센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3. 불패의 명마
Ribot Ribot은 엄밀히 말해 이탈리아 태생이 아니다. 테시오가 씨수말 테네라니를 영국으로 보내면서 수태된 어미말 로마넬라도 딸려 보냈다. 이듬해의 교배 상대로 그를 다시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봄 Ribot은 뉴마켓의 국립 교배목장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에서 16전 전승의 기록으로 은퇴하기까지 탁월한 경주능력을 대변하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1950년대 경마 위세는 유럽이 미국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미국의 우수한 클래식 경주마들이 프랑스 개선문상을 여러 차례 노크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Ribot이 3세에 이어 4세에도 개선문 경주에 등록했을 때 미국에서 Bold Raler의 기수로 유명한 Eddie Arcaro가 Career Boy라는 말로 도전해 왔다 (페이스 메이커로 그 말의 짝인 Fisherman도 동행) 우리식의 결승주로에서 아카로가 '이길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말이 그의 옆을 휙하고 스쳐갔다. 그는 경주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미국말로 당시까지의 최고 성적인 4위에 입상하는데 그쳤다. 이와 같은 탁월한 경주능력과 씨수말로서의 우성 유전력을 알아내기 위해 휴이트(A.Hewitt)와 그 주위의 전문가들이 Ribot의 혈통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모계쪽에는 톱 클래스의 경주마가 없었고 일류혈통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몇백달러, 기껏해야 몇천달러 짜리 씨암말만 주워모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 마지막 줄에 이런 글이 보인다.

'그의 제자들은 아무런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다만 현대의 서러브레드 세계에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4. 스태미나와 건장함의 결정체
경주 은퇴 후 Ribot은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4년간 씨수말 생활을 한 후 미국으로 임대되어 왔으나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장에서 말하기로 하고, 하여튼 그는 영국에서 Ragusa, 미국에서 Tom Rolfe, Graustark, His Majesty, Arts and Letters 등 걸출한 후세마를 남겼다. 그러나 Ribot은 우수씨수말(LS: Leading Sire)보다 우수씨암말(BMS : Bloodmare Sire, 모계의 부마성적)에서 더 위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의 아들 Tom Rolfe의 딸들은 102두의 스테이크스 우승마를 배출하고, 아들의 아들인 Hoist The Flag의 딸들은 82두, 아들의 아들의 아들 Alleged는 1999년까지 85두의 스테이크스 우승마를 배출하고 있으니, 그 어떤 가계에서 이런 성적을 낼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닦에 모든 전문가들은 어미말에게 필요한 스태미나와 건장함의 대명사로 Ribot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5. 고약한 성격 때문에
그가 개선문상을 2연패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전쟁 패망국은 성대하게 은퇴식을 베풀었다. 전 국민이 Ribot을 연호하는 순간, 그는 갑자기 기수를 내동댕이치고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잔치는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그후 미국의 더비던목장이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5년 계약기간에 135만달러였다. 당시까지 미국에서 최고가로 거래된 씨수말나슈어(Nashua)의 매매가가 125만2천2백달러였으니 그의 명성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미국에서 첫해 태어난 그의 자식 Tom Rolfe가 1세가 되던 1963년에 영국에서는 이미 최고의 씨수말 위치에 올랐다. 그래서 중동의 오일달러가 미국으로 밀려들어왔고, 빈센트 오브라이언도 그들과 동행했으며, 니진스키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당시 더비던목장에는 미국 역사상 최고 전문가 올린 젠트리가 매니저로 있었는데 Ribot의 폭력 앞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는지 차이고 받히기를 수차례 경험하였다. 방목장에서 Ribot의 시야에는 어떤 씨수말도 보이지 않아야 했다. 아무도 그를 목장 밖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필자는 가끔 만일 Ribot의 성격이 조금만 더 점잖았더라면 서러브레드의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생각해 본다. 배합이론에 '국제적 원교배'란 방법이 있다. 어느 특정지역에서 근친에 근친을 되풀이하여 무력화되어 버린 혈통에 대한 처방으로 전혀 이질적인 피를 수혈해 주면 활성화가 가능하다는 비유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Nasrullah가 싱싱한 미국의 Native Daner를 만나 Bold Ruller가 탄생했듯….

필자의 생각으로도 맞는 듯 하다. St.Simon의 유럽 혈통이 미국에서 신선한 파트너를 만났으니 그의 위력은 배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유럽과 미국은 가끔 서로 말들을 바꾸어 교배했던 것은 아닐까? 혼혈가수 중에 내가 최고라고 여기는 가창력의 소유자가 있듯이…. 끝.

글 / 김종식 푸른목장 대표
2006/01/04 00:49 2006/01/04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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