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휴식
16연승의 기록 남긴 명마 Cigar


모마(Solar Slew)와 생후 10일째의 Cigar.


말띠 경주마의 탄생
시가(Cigar)는 4년간 총 33회 출주하여 1착 19회, 2착 4회, 3착 5회의 전적으로 999만9,815달러를 획득한 세계 최고 상금 수득마이다. Northern Dancer의 손자인 Palace Music을 부마로, Seattle Slew의 딸 Solar Slew를 모마로 하여 태어난 그는 흔히 일류마의 전력에서 볼 수 있는, 삼관마 경주 경력도 없을 뿐 아니라 4세 가을 때까지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그렇고 그런 존재였다. 조기완성형을 요구하는 현대 경마세계에서 퇴출을 면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경주마로 부상할 때 심심한 호사가들이 Cigar의 사주를 보았다. 1990년생 말띠, 수호신은 전쟁의 여신 마르스(Mars), 부와 품위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그의 보석이다. 그러나 북미지역에서 태어난 같은 말띠는 4만4,000두가 넘었으니 진정한 성공의 열쇠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마격(Conformation) 연구가 Cecil Seaman의 자료에 의하면 Cigar의 마체구조는 그가 데이터로 보유하고 있는 최고 경주마 4만5,000여두 중 큰 심장뿐 아니라 체장도 평균치 228.6㎝보다 9㎝가 더 길었다. 어깨뼈 또한 평균치보다 4㎝ 정도 길고 잘 경사져 있었으며, 다리뼈도 모든 부분이 평균치 보다 길었고 완벽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특히 엉덩이뼈에서 시작된 뒷다리는 웅장할 정도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보폭이 길며 폭발적인 파워가 용출되었다.

금연가의 Cigar
마주 겸 생산자 Allen E. Paulson은 파일럿 출신의 항공분야 사업가였다.

매년 100두 이상씩 태어나는 망아지의 이름을 지을 때 하늘에서 내려다본 거점지점의 지명을 따 마명을 짓곤 했는데, Cigar는 미국 남부 멕시코만의 마을 이름이다(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우승 트로피를 받을 때 카메라 앞에서 시가를 물고 있기만 했다).

생산자 앨런은 엄청난 부자이다. 1985년 켄터키에 서러브레드 생산공장 Brookside Farm을 세울 당시 소유하고 있던 항공사의 지분을 크라이슬러 회사에 매각한 금액이 6억달러를 훨씬 넘었다. 매년 1,000만~2,000만달러를 망아지나 씨암말 구입에 쏟아부었고, Cigar가 데뷔할 당시 600두 이상의 말을 소유하고 있었다.

규모뿐 아니라 품질 수준도 놀랍다. ‘금으로 도금하고 통로에 실크카펫을 치장한 제트기가 제일 잘 팔린다’는 기업 경영철학을 그대로 도입했다. 그러나 몇백만달러에 구입한 망아지가 단 한푼의 상금도 벌지 못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며, Cigar의 모마 Solar Slew도 당해 2세 암말 최고가인 51만달러에 구입하였으나 겨우 5,000달러 정도 벌여들여 앨런의 눈밖에 나 교배시즌에는 공동 소유 씨수말 Palace Music과 교배된 상태로 켄터키에서 메릴랜드로 쫓겨났다(메릴랜드 Country Life Farm의 씨수말 2두를 공동 소유하여 하위급 씨암말의 씨수말로 활용함). 그래서 Cigar의 고향은 메릴랜드이고 망아지 때도 한쪽 구석의 패독에서 그럭저럭 지냈다.

MP에서 AP로
Cigar가 벌어준 1,000만달러는 투자액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업가 앨런은 경주마 사업에서는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명예와 즐거움을 얻었다.

마사의 둥근 천장에는 크리스털 칸델라를 달았고, 목장 안에 테니스장을 만들어 가족·친구들과 휴가를 즐겼다. 한번은 목장 매니저에게 골프장을 만들어 달라고 보채다 거절당하자 곧바로 캘리포니아에서 골프장을 구입해 버렸다. 초기 Cigar의 성적이 신통치 않자 아내 마들렌 파울손(Madeleine Paulson)에게 선물해 버렸다. 그래도 혈통은 최고라고 하면서…. 하지만 나중에 Cigar가 모래주로로 전향하여 첫 경주에서 승리하자 그가 생산한 최초의 암말(Filly) 챔피언 Eliga를 씨암말로 주고 도로 빼앗았다. 그리고 시가를 물고 2년간 최고 마주의 포즈를 취했다.

지난해까지 미국 경마 사진 기수의 복장에서 A.P란 글자가 자주 보였는데, 이것은 아내의 복색 M.P(Madeleine Paulson)에서 A.P로 바뀐 약간 치사한 장면을 기억나게 하는 모습이다.

잔디주로에서 모래(Dirt)주로로
모래나 잔디에서 다른 곳으로 바꾼 후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660만달러를 수득한 John Henry도 잔디주로로 옮긴 후 제대로 달리기 시작했고, Vigors는 모래주로로 전향한 후 슈퍼스타가 되었다. Cigar도 잔디주로에서 모래주로로 옮긴 후 최고 경주마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3세 봄부터 잔디경주에 출주하기 시작했으나 4세 가을까지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1번 출주하여 Allowance경주에서 한 번 이겼을 뿐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잔디주로의 말은 평평하고 넓은 굽을 가지고 있으며 달릴 때 무릎을 높게 든다고 하는데, Cigar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교사 William I. Mott에 의하면 4세가 되던 해 가을 모래주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Cigar의 마체(특히 무릎)는 성숙되지 않았다. 조교 때도 모래주로에 나서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부마인 Palace Music이 유럽·미국의 잔디주로 GⅠ경주에서 승리한 까닭에 자식도 당연히 잔디주로 말로 간주됐을 듯하다. 주위에서 왜 모래주로로 바꿔 보지 않느냐고 충고할 때도 Mott 조교사는 묵묵히 잔디만 고집했다. 무릎이 약하고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교사는 4세 가을까지 이기기 위한 훈련은 시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마체가 성숙되기 전까지는 모래와 잔디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지하실 구석에 몇백년 동안 잠재워 둔 포도주가 제 맛을 내듯이.

마침내 4세가 되던 1994년 10월 모래주로 첫 도전인 Allowance경주에서 승리하고 한 달 후 곧바로 NYRA(New York Racing Association) GⅠ경주에 현역 최고 기수인 Jerry Bailey를 태우고 모래주로 16연승 북미지역 타이기록 수립의 대장정에 돌입하게 된다(그때까지 Cigar의 기수였던 Mike Smith는 NYRA경주 때 최고 인기마인 Devil His Due로 옮겨가고 Jerry는 대타로 등장했다). 4세인 1994년 10월부터 96년 7월까지의 16연승 대기록 행진에는 GⅠ경주 10승과 Dubai World Cup이 포함되며, 94년도 연도 대표마 Holly Bull과 95년도 켄터키 더비와 벨몬트스테이크스의 Thunder Gulch가 희생양이 되어 경주 은퇴를 강요받기도 했다(위 2두의 마필은 각각 Cigar와의 경주에서 왼쪽 앞다리를 다쳐 경주마 생활을 마감하였다).

20분간의 기립박수
매디슨스퀘어 가든에서 화려한 은퇴식을 가졌으나 생식능력이 없어 Kentucky Horse Park에서 사진 모델로 전락하여 쓸쓸한 여생을 보내고 있지만, 미국민들에게는 경주마 시절 모든 영광을 다 누렸다고 기억되고 있는 Cigar는 결승전 전방까지 페이스를 조절하려는 Jerry의 손가락을 끊어 낼 듯한 엄청난 파워를 지녔다. 5세 때 10전 10승 중 8승이 GⅠ경주였으며, 6세 때 Dubai World Cup 승리를 포함한 8전 5승의 전적으로 2년 연속 연도대표마에 선정되었다. 5세 때 브리더스컵 클래식 경주(2,000m)에서의 우승기록 1분 59초 58은 아직도 이 경주의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6세 때인 1996년 6월 13일 15연승을 기록 중인 Cigar를 위해 시카고에서 Arlington Citation Challenge경주를 특별히 마련했다.

여기에는 50년 전 16연승의 위업을 달성한 Citation의 조교사 Jimmy Jones도 초대되었다. 130파운드(58.9㎏)의 부담중량으로 거뜬히 승리한 Cigar는 3만4,000여명의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람에 가뿐 숨을 몰아쉬며 20분간이나 한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황제같은 은퇴생활
14연승 때인 Dubai World Cup경주 전후부터 Cigar의 앞다리와 굽은 상당히 망가진 상태였다. 게다가 중동까지의 장거리 여행으로 피로가 누적되었다. 조교사 Mott가 마방에서 쉬고 있는 Cigar를 찾을 때마다 그의 커다란 눈은 항상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요. 쉬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은퇴 직전 Jockey Club Gold Cup경주에서 3세마 Skip Away에 머리차로 지고(Skip Away는 Cigar를 이긴 후 승승장구하며 960만달러를 획득하여 Cigar에 이어 역대 2위의 수득상금마가 된다) 은퇴 경기가 된 6세 때의 브리더스컵 클래식에서 Alphabet Soup에 이어 3착으로 골인한 후(코차+머리차) 앨런은 대답했다. “그래, 이제 그만하자. Cigar, 널 사랑한다.”

일본중앙경마회(Japan Racing Association)로부터 Cigar를 3,000만달러에 팔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으나 앨런은 거절했다. 그를 멀리 떠나 보내면 더 많이 보고 싶어질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투자자의 모습에서 진정한 Horse Man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그후 매매가액 2,500만달러의 75% 지분을 쿨모어 목장의 Ashford Stud에게 양도했다. 쿨모어 목장은 Cigar를 맞이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마사를 지었다. 필자는 1999년 초 그 목장을 방문하여 1,000만달러짜리 Cigar의 호화저택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생식능력이 없었다. 2년간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검사받고 치료받았으나 허사였다. Cigar는 그 목장에서 조금 떨어진 Kentucky Horse Park에 있었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그를 찾아 갔을 때 이미 1일 3회의 쇼를 끝내고 낡은 마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Cigar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당시 그의 눈망울은 너무 크고 시렸다.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방울이 맺힐 것만 같았다. 돌아서는 필자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앨런이 그를 정말 편히 쉬게 해 주었구나’

쇼가 끝나고 패독에서 Cigar가 달리기 시작하면 15년 선배인 John Henry가 그 뒤를 따르고 그 뒤에는 더비마 Bold Forbes가 따라 달린다. Cigar는 은퇴해서도 황제처럼 쉬고 있다.


글 / 김종식 푸른목장 대표
2006/01/04 01:18 2006/01/04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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