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13

2011/09/13 02:52 / My Life/Diary
  (…)
  이사 온 집의 저녁 시간이 더 좋다.
  어둠이 깔리면서 사방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황홀하다. 열마리, 스무 마리, 그리고 더 많이 빌배산 머리 둘레로 개울쪽 과수원 울타리 너머로 한없이 날아다닌다.
  혼자 있는 것이 이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건 요즘 와서 처음 느낀다. 조용히 앉았거나 누워 있으면 행여나 깨뜨려질까봐 꼼짝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롭다.
  좀 비겁한 자세이지만 가난하다는 것 외롭다는 것은 이렇게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귀뚜라미는 낮에 본 산국화의 그 연보라 빛깔처럼 여리게 운다. 이래서 그런지, 우리 집 꾸구리(개)도 영 짖지를 않는다. 우리 집 꾸구리 눈빛깔이 너무 예쁘다. 강아지 주제에 항시 눈동자가 젖어 있는 듯 애처롭게 하늘을 쳐다 본단다.
  여섯 달 전에 장에서 사올 때, 제일 작고 빼빼마른 걸 골랐던 것이 너무 무던하고 착해서 오히려 걱정이다. 처음엔 강아지 사려고 생각지도 않았는 데 꾸구리 보는 순간 가엾어서 사온 것이란다.
  꾸구리는 된장에 비빈 밥을 제일 잘 먹는다. 싱싱한 무우잎과 배추잎도 잘 먹는다.
  현주야, 나는 언제 어른이 되려는지 아직도 만날 슬프고 아름다운 게 좋구나.
  오늘 편지 꼭 연애 편지 같이 씌여졌구나.
  4316. 10. 5
  正生

  ㅡ 권정생,「난 아직도 슬프고 아름다운 게 좋다」부분,『권정생 이야기 2』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문득 권정생이 읽고 싶었어...

2011/09/13 02:52 2011/09/13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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