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 먹물 옷 입은 제자 탄생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7
- 쪽지 적어준 공안 3천장 이르고 -
낯선 미국인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행원스님의 입장에서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르치는 쪽에서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배우는 쪽에서는 그 생소한 수행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파트 법당의 수좌들은 열심이었다. 눈빛과 눈빛으로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를 알아채는 정도까지 다다르고부터는 생활 자체에 하나의 질서가 부여될 수 있었다.
행원스님이 단어를 써 놓으면 제자들은 그 단어들을 꿰어 맞춰서 법문으로 만들곤했다. 그런 단어와 단어들을 통한 의사소통은 다름아닌 공안이되고 있었다. 참선에서의 화두란 식사를 하는데 있어 숟가락이나 포크가 하는 역할을 해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수좌들. 그들에게 쪽지에 적어 준 스님의 공안은 그날의 수행과제이기도 했던 것인데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 3천장에 이르렀다.
이제 미국생활에 대한 요령이 생기고 벽안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삶에 수행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고 있을 무렵 재미 홍법원을 세웠다. 72년 9월의 일이었는데 그해에는 뉴욕에 삼보사도 세워졌다.
삼보사는 당시의 정달스님이 세운 것이었고 73년 1월에는 구산스님이 삼보사와 홍법원을 다녀갔다. 또 혜정스님도 미국의 법당을 다녀 갔고 계정스님도 미국으로 바랑을 지고 왔다. 계정스님은 행원스님의 초청을 받아 왔는데 도착즉시 달마사를 개원해 포교에 들어갔다.
정달스님도 행원스님처럼 일을해야만 했다. 신발공장을 다니며 돈을 벌지 않으면 않됐던 것이다. 미국땅은 절대로 공짜가 없는 곳이었고 이방인에게 정신의 지도자로 자리잡기에는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 우선적이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제자들은 언제나처럼 낮에 일하고 저녁에 참선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참선을 하고는 일터로 나갔다. 참선도 잘했지만 절도 잘했다. 애당초 김정선교수가 “미국애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절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던 충고는 이제 무색하게 되었다. 행원스님은 그 개인주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한국 절에서 소임을 나누듯이 한가지씩 소임을 맡겨 그 일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을 지게 했던 것이다. 시키는 것에 대한 복종은 잘 안해도 자기의 소임에 대한 책임감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한 것이 미국인들이었다.
아무튼 스님은 미국의 제자들과 또 하나의 도전을 했다. 그것은 돈모으기 원력이었다. 여름 어느날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자, 이제 너희 10명과 나를 합해서 열한명은 3개월간 열심히 일을 해서 1인당 천불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11명의 식구는 더 배고프고 더 알뜰하게 살아내야 했지만 석달 후에는 1만1천불이 생기게 됐다.
그 돈으로 산 것이 홍법원 4층집이었던 것이다. 뉴욕에 홍법원을 세운 것은 스님 개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불교가 정식으로 미국에 전법의 물줄기를 댄 것이기도 했다.
홍법원을 근거지로 해서 미국포교는 거듭거듭 발전해 나갔다. 스티븐이라는 제자는 무각(無覺)이라는 법명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보스톤에 선방을 열어 잘 운영했다. 그곳에 행원스님은 진경, 법안스님등을 초청하기도 했다.
뉴헤븐에 낸 선방에는 예일대학의 학생들이 많이 왔고 데이브, 스티브, 바브 등 교수들이 중심이되어 선방을 이끌었다.
각지에 선원이 생겨나면서부터 행원스님은 제자들을 보다 조직적으로 공부시키고 그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선원마다 선원장과 입승, 원주, 교무 등의 소임자를 정했다. 그들을 하나씩의 소임으로 스스로 할 일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부의 깊이를 재는 일이었다.
처음 입문해서 3~4개월은 기초교리를 가르치며 불자가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된다. 두어차례 용맹정진을 시킴으로 그의 인내력과 불교에 대한 열의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 단계가 지나면 5계를 설하고 다시 1년이상 선공부를 시킨다. 행원스님이 만든 ‘선의 나침판’이란 공안집을 막힘없이 훑으면 일단 식견의 물꼬가 튼 것으로 여길 수 있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 시험을 넘어서면 법사로 불렀다. 법사를 명명받고도 5년가량 더 공부해 천칠백 공안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정도가 되면 지도법사 자격을 주었다. 그래서 선원을 맡기고 신자들을 지도하게 했던 것이다.
출가에 대한 간절함이 깃든 사람은 출가수행도 가능케 했으므로 푸른 눈에 먹물옷을 걸친 제자도 생기게 됐다.
아무튼 행원스님의 미국포교는 여여하게 흐르는 물처럼 시간을 따라 마당도 넓어지고 결실 거두게 되었다.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7
- 쪽지 적어준 공안 3천장 이르고 -
낯선 미국인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행원스님의 입장에서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르치는 쪽에서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배우는 쪽에서는 그 생소한 수행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파트 법당의 수좌들은 열심이었다. 눈빛과 눈빛으로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를 알아채는 정도까지 다다르고부터는 생활 자체에 하나의 질서가 부여될 수 있었다.
행원스님이 단어를 써 놓으면 제자들은 그 단어들을 꿰어 맞춰서 법문으로 만들곤했다. 그런 단어와 단어들을 통한 의사소통은 다름아닌 공안이되고 있었다. 참선에서의 화두란 식사를 하는데 있어 숟가락이나 포크가 하는 역할을 해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수좌들. 그들에게 쪽지에 적어 준 스님의 공안은 그날의 수행과제이기도 했던 것인데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 3천장에 이르렀다.
이제 미국생활에 대한 요령이 생기고 벽안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삶에 수행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고 있을 무렵 재미 홍법원을 세웠다. 72년 9월의 일이었는데 그해에는 뉴욕에 삼보사도 세워졌다.
삼보사는 당시의 정달스님이 세운 것이었고 73년 1월에는 구산스님이 삼보사와 홍법원을 다녀갔다. 또 혜정스님도 미국의 법당을 다녀 갔고 계정스님도 미국으로 바랑을 지고 왔다. 계정스님은 행원스님의 초청을 받아 왔는데 도착즉시 달마사를 개원해 포교에 들어갔다.
정달스님도 행원스님처럼 일을해야만 했다. 신발공장을 다니며 돈을 벌지 않으면 않됐던 것이다. 미국땅은 절대로 공짜가 없는 곳이었고 이방인에게 정신의 지도자로 자리잡기에는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 우선적이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제자들은 언제나처럼 낮에 일하고 저녁에 참선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참선을 하고는 일터로 나갔다. 참선도 잘했지만 절도 잘했다. 애당초 김정선교수가 “미국애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절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던 충고는 이제 무색하게 되었다. 행원스님은 그 개인주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한국 절에서 소임을 나누듯이 한가지씩 소임을 맡겨 그 일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을 지게 했던 것이다. 시키는 것에 대한 복종은 잘 안해도 자기의 소임에 대한 책임감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한 것이 미국인들이었다.
아무튼 스님은 미국의 제자들과 또 하나의 도전을 했다. 그것은 돈모으기 원력이었다. 여름 어느날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자, 이제 너희 10명과 나를 합해서 열한명은 3개월간 열심히 일을 해서 1인당 천불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11명의 식구는 더 배고프고 더 알뜰하게 살아내야 했지만 석달 후에는 1만1천불이 생기게 됐다.
그 돈으로 산 것이 홍법원 4층집이었던 것이다. 뉴욕에 홍법원을 세운 것은 스님 개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불교가 정식으로 미국에 전법의 물줄기를 댄 것이기도 했다.
홍법원을 근거지로 해서 미국포교는 거듭거듭 발전해 나갔다. 스티븐이라는 제자는 무각(無覺)이라는 법명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보스톤에 선방을 열어 잘 운영했다. 그곳에 행원스님은 진경, 법안스님등을 초청하기도 했다.
뉴헤븐에 낸 선방에는 예일대학의 학생들이 많이 왔고 데이브, 스티브, 바브 등 교수들이 중심이되어 선방을 이끌었다.
각지에 선원이 생겨나면서부터 행원스님은 제자들을 보다 조직적으로 공부시키고 그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선원마다 선원장과 입승, 원주, 교무 등의 소임자를 정했다. 그들을 하나씩의 소임으로 스스로 할 일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부의 깊이를 재는 일이었다.
처음 입문해서 3~4개월은 기초교리를 가르치며 불자가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된다. 두어차례 용맹정진을 시킴으로 그의 인내력과 불교에 대한 열의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 단계가 지나면 5계를 설하고 다시 1년이상 선공부를 시킨다. 행원스님이 만든 ‘선의 나침판’이란 공안집을 막힘없이 훑으면 일단 식견의 물꼬가 튼 것으로 여길 수 있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 시험을 넘어서면 법사로 불렀다. 법사를 명명받고도 5년가량 더 공부해 천칠백 공안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정도가 되면 지도법사 자격을 주었다. 그래서 선원을 맡기고 신자들을 지도하게 했던 것이다.
출가에 대한 간절함이 깃든 사람은 출가수행도 가능케 했으므로 푸른 눈에 먹물옷을 걸친 제자도 생기게 됐다.
아무튼 행원스님의 미국포교는 여여하게 흐르는 물처럼 시간을 따라 마당도 넓어지고 결실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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