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의 천국 리토트레이닝센터



리토트레이닝 센터는 듣던 대로 한번 가볼 만한 곳이었다. 경주마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광활한 벌판을 시원스레 달리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트여 주기에 충분했다. 필자가 이곳을 들러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고베에 사는 지인의 초청으로 갔던 관광길에 마사회 석영일 재결위원의 권유로 들렀던 것이다. 석위원이 소개해준 후루하시 수석재결위원과 이곳에서 11월11일 오전 6시40분에 만나 안내를 받기로 했었다. 혹여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오전 4시 고베를 출발, 물어물어 찾아가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일본 아버지의 ‘경마조기교육’



도착 즉시 기자의 본능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주차장부터 둘러보며 우리와 다른점을 찾아본 것이다. 드디어 묘한 것이 포착됐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량마다 남녀가 쌍쌍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일본엔 여자 마필관리사도 있다더니 부부관리사도 많은 모양이다’하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차에서 내리지를 않는 것이었다.출근했으면 들어갈 일이지 남녀가 깜깜한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하나 싶어 둘러봤더니 부부도 있었지만 젊은 연인들도 적지 않았다.

또 어떤 부부들은 뒷자리에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쯤 돼 보이는 자녀들까지 태우고 있었다. 이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한참 뒤에 알았다. 후루하시 위원을 만나 조교관람대에 들어갔을 때 이들이 중앙경마회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입장했다. 알고보니 이날은 나흘 뒤에 열리는 제25회 엘리자베스여왕배 출주마들의 조교 공개행사를 갖는 날이었다. 엘리자베스여왕배는 총상금 1억9천만엔(우승상금 1억엔)으로 전국 랭킹 8위, 관서지방 랭킹 4위인 대회다. 이 대회 출주마들의 조교장면을 보려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그걸 보려고 생업을 제쳐두고 꼭두새벽에 오다니, 그것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도 않은 채 데리고 오다니 부모가 어린 자녀들까지 경마꾼으로 키우는 모양이다’ 싶어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자영업을 한다는 도쿠마루 오시가즈(38)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경마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학교는 오후에 보내기로 하고 데리고 왔다”어른이 돼서 경마를 도박이 아닌 건전 레저로 즐기도록 조기교육을 시킨다는 얘기다. 도쿠마루는 이를 위해 고베에서 새벽 5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고베에서 리토까지는 1백50km, 서울~대전 거리다. 자녀에게 경마에 대한 산교육을 시키기 위해 학교도 보내지 않고 데려온 아버지의 정성은 일본 경마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학교 성적만을 대수로 알고 수백만원짜리 고액과외나 시키는 한국의 아버지들과 대조적이었다. 망원경을 들고 말들이 뛰는 모습을 살펴보는 도쿠마루씨의 자녀에게서 일본 경마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리토트레이닝센터의 6겹 트랙



이날 트레이닝센터를 찾은 사람은 60여명. 중앙경마회는 이들에게 망원경을 하나씩 빌려주고 아침식사와 커피를 제공했다. 안내원 핸드 마이크를 들고 조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줬다. 엘리자베스여왕배에 출전하는 사로 기수(28)와 대화하는 시간에는 질문공세와 박수세례가 터졌다. 1시간 30분 동안의 조교관람 행사를 마치고 트레이닝센터를 한바퀴 둘러보아다. 리토 트레이닝센터는 1백49만㎥(약 45만평). 이중 마장이 42만㎥, 마사 41만7천㎥, 주택 14만2천㎥와 말 수영장,

말병원 등이 들어서 있다. 이 안에 경주마 2천1백58두와 1천2백세대 4천명이 거주하고 이다.경주마는 오사카, 교토, 고베경마장 등 관서지역 경마에 출전하는데 더러는 도쿄 등지로 원정경기에 나서기도 한다. 조교사는 1백11명, 기수는 90명이다. 조교사가 기수보다 많다는게 우리와 다른 점이다.

우리는 조교사 52명에 기수 77명으로 기수가 훨씬 많다. 조교사 1인당 평균 관리두수가 19.4두. 우리나라의 25.6두 보다 적다. 반면 기수와 경주마의 비율은 1대24로 우리나라의 1대17.3보다 훨씬 많다.리토 트레이닝센터의 조교트랙은 6개가 겹으로 설치돼 있다. 맨 안쪽 1번 주로는 1천4백50m, 다음 2번 주로는 1천6백m, 3번 주로 1천8백m, 4번 1천9백50m, 맨 바깥쪽 6번 주로가 2천2백m다.특이한 것은 조교트랙의 바닥이 세 가지라는 점이다.

1번과 4번주로에는 잔디, 2번 6번 주로에는 모래, 3번 5번 주로에는 우드칩이 각각 깔려 있다. 조교사들은 경주마에 알맞은 주로를 택해 조교를 시킨다. 우드칩이 깔린 주로는 모래주로보다 푹신해 다리 관절에 이상이 있는 말을 조교 시킬 때 이용한다. 그리고 트랙 안에는 소형트랙 4개가 있어 우리나라의 원형 마장처럼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조교트랙에 나오면 실전을 벌이듯 전력질주한다.조교에 나오는 경주마들은 우리처럼 안장에 고유번호를 달고 나오는데 안장의 색깔이 나이별로 다르다. 우리는 이번주 출주마는 황색, 대상경주 출주마는 청색, 다음에 출주할 말은 적색, 미등록 신마는 황색선이 그어진 재킹으로 구분하고 나머지는 나이에 따라 3세 이하는 흑색, 4세 이상은 흰색 재킹을 사용하고 있다.

조교트랙은 하루 4시간 동안 개방하는데 여름철엔 오전 5시부터, 겨울철엔 오전 7시부터 시작한다. 동이 튼 뒤에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명등을 켜는 일이 거의 없다. 조명등도 우리처럼 조명탑이 아니라 가로등처럼 띄엄띄엄 설치돼 있다. 조교사, 기수, 중앙경마회 핸디캐퍼 등 관계자들의 일과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는 꼭두새벽부터 조명들을 켜놓고 조교를 한다. 조교가 끝나면 말도 자고 사람도 잔다.

이렇게 한숨 자고난 뒤 일과를 다시 시작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트레이닝센터가 따로 없어 경주트랙에서 새벽 4~5부터 조교를 시작해야 한다. 만약 일본처럼 7시부터 시작하면 경마날엔 조교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꼭두새벽부터 조교를 하고 낮잠을 한숨 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경마와 언론



리토 트레이닝센터엔 조교관람대가 2개 있다. 2백m쯤 서로 떨어녀 있는데 하나는 일반인 관람대이고 또 하나는 조교사와 기자전용이다. 기자 관람대에서 조교사 인터뷰가 있다고 해서 한번 가 보았다.가는 길엔 작은 등산로처럼 된 오솔길이 있었는데 그 동산의 위엔 흉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다케다 조교사의 흉상이다.

그는 1906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기수를 거쳐 조교사가 된 뒤 일본 조교사회 회장, 중앙경마회 운영심의회 위원, 조교사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으며 경마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2번 받았다고 한다. 흉상 앞엔 벤치가 여러개 설치돼 조교사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며 조교장면을 지켜보는 게 마치 대선배를 기리는 뜻이 보였다. 오솔길을 지나면 커다란 마당에서는 말들이 조교트랙에 입장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트랙 입구에는 카메라맨들이 진을 치고 엘리자베스여왕배 출전마들에 대한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출전마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대상경주가 열린다고 해서 카메라맨들이 몰려오지도 않을 뿐더러 와서 촬영해도 게재할 지면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출전마의 조교장면을 다음날 아침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고 있다.마당 주변에는 조교사와 기수, 조교보, 마필관리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조교사는 우리처럼 검은색 안전모를, 조교보는 검은색에 흰테가 있는 안전모를 쓰고 있었으나 기수의 안전모는 청색(우리는 노란색)이다. 기자 관람대 아래층은 조교사들이 이용하고 위층은 기자실이다. 기자실의 한쪽은 전문지 기자들이 다른 한쪽은 신문 기자들이 이용한다. 전문지 기자실에선 예상전문가들이 경주마들의 조교장면을 망원경으로 낱낱이 살피며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1개 예상지에 몇명씩 몰려온 것 같았다.

일본 최대 예상업체인 ‘슈칸 게이바북’의 기자만도 7~8명 눈에 띄었다.신문기자실은 각 스포츠신문과 일간지로서는 유일하게 예상지를 발행하는 산케이신문 기자들이 주로 이용하는데, 이날은 엘리자베스여왕배 출전마 조교장면 공개일이어서 방송기자들의 출입이 허용돼 방송카메라 7~8대가 와 있었다. 이날 인터뷰 대상 조교사는 강력한 우승후보마 ‘에어그룹’을 관리하는 이토 유지씨(61)였다. ‘에어그룹’은 지난해 천황상을 거머쥐며 연도 대표마로 뽑혔던 관서지방 최고의 명마. 93년 4월6일 홋카이도에서 태어났으며 4백70kg의 균형잡힌 몸매에 머리가 영리해 16전9승, 준우승 4회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비말 ‘토니빈’은 89년 개선문상을 안았던 명마로 유럽지역을 누비며 27전15승을 거뒀다. 89년 재팬컵에 원정 출전, 5착에 그쳤는데 일본의 생산업자가 씨수말로 거액에 사들였다.이런 명마의 아들인 ‘에어그룹’은 관서지방 경마팬들에겐 스타로서 모자람이 없다. 따라서 매스컴은 이토 유지 조교사에게 집중됐다. “충분히 조교했다. 80%는 완성된 것으로 본다. 지난번 삿포로에서 진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표를 정해 이길 경주에 승부해야 한다. 이번엔 한발한발 중요하게 풀어나갈 것이다.”지난번 경주에선 ‘안갔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해도 괜찮은 것이다. 대상경주를 앞두고 전력을 아껴두기 위해 한 게임 버리는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를 대놓고 얘기했다가는 경마팬들의 비난을 면키 어려운 우리의 현실과는 판이하다.이토 조교사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기승정지 처분을 받아 이번에 출전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당시 처벌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의신청을 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참았지만 처벌을 받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기자들 앞에서, 방송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 재결 불만을 거침없이 털어놓은 것이다. 그래도 괘씸죄에 걸리지 않는 게, 언론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게 일본 경마의 현주소다.이토 조교사는 ‘에어그룹’에 과거 함께 출전한 경험이 있는 요코야마 기수를 태워 출전시켰으나 그와 수많은 경마팬들의 기대와 달리 아쉽게도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규승│스포츠조선 대기자
2006/01/03 03:23 2006/01/03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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