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욕망이란 이름의 인간을 사유하기
이정우 _ 철학아카데미원장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1901~1981)은 사르트르·메를로-퐁티·레비-스트로스·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20세기 중엽에 활동했다.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현대 사상의 핵심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라캉의 사유는 깡길렘·푸코가 그렇듯이 ‘정상과 비정상’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푸코와 깡길렘이 한 사회·한 시대가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어떤 논리·개념·장치들·배경들을 깔고서 그런 구분을 행하는가에 관심이 있다면(인식론적-과학사적 관점), 라캉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비정상이라고, 더 정확히 말해 정상과 비정상이란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픈 존재’(헤겔)인 것이다.

이 점에서 통상적으로 함께 ‘구조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그리고 라캉 자신이 말년에 자신의 담론을 수학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라캉은 레비-스트로스의 투명한 합리주의와 대조된다. 그러나 라캉은 그 아픔이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 점에서 역시 구조주의자이다.

라캉 사유의 성과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으면서도 거기에 구조주의 언어학의 성과를 도입해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한 점에 있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 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 의식으로 행하는 경험 아래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놓여 있다(그러나 ‘무의식’이라는 실체는 없다. 의식의 공백으로서, 의식의 배면으로서 발견되는 어떤 차원일 뿐이다).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어린 아기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형성된다. 그러한 진입 이전, 즉 아기와 엄마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그 후의 상징과 표상의 세계에 억눌리면서 무의식이 형성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아래에는 어린 시절에 발생했던 그러한 진입과 더불어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실질적으로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 세계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라면 그 세계는 필연적으로 기표(記表)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표는 기의(記意)와 맞물린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고전적인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는 거대한 담론사적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면(예컨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떠다니는 기표’) 반대로 라캉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애초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즉 이른바 ‘누빔점’이 존재한다.

기표는 그 안에 어떤 경험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린다”라는 기표는 눈이 내리는 현상(지시대상) 및 그 현상에 대한 경험 내용(기의)을 담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기표와 기의가 흔히 일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정치가가 “저는 대권 욕심이 없습니다”라고 극구 강조하는 것은 사실 은근히 대권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조심할 것은 이 정치가가 지금 의식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 그 사람은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 속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즉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치하지 않는가? 바로 무의식 때문이다. 기표는 대권 주자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그 정치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대권 주자의 무의식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라캉에게 인간이란 병자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의식과 기표, 그리고 그 기표가 명시적으로 가리키는 기의의 세계가 있는 반면, 또한 무의식에서의 움직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것(Es)’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로. 라캉은 근대 철학의 대전제인 주체의 투명성, 주체가 “주어졌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주체의 밑에는 ‘그것’이, 무의식이 존재하며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거울 단계’, 상상과 상징 사이


어린 아기의 주체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라고 한다. 어린 아기는 아직 신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를 ‘조각난 몸’의 환상이라 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는 환상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환상이 아니며,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이 환상은 후에 ‘정신분열증’이 생길 수 있는 잠재적 바탕을 이룬다고 한다).

이 조각난 몸의 환상은 ‘거울 단계’에서 극복된다. 거울 단계에서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고서(또는 어머니나 다른 아기들에게 비친 자신을 보고서) ‘동일화(identification)’의 과정을 겪는다. 아기는 동일화를 통해서 조각난 몸의 단계를 극복한다. 이 단계가 ‘거울 단계/국면’이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주체가 형성되지 않은 단계이다. 아기는 아직 이자(二者)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이때에 아기는 아직 상징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엄마와 자기를, 다른 아기와 자기를 혼동하는 전이성(transitivity)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아기가 자신과 세계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지점이며, 라캉은 ‘상상적’ 단계라 부른다.

이 단계는 나르시스의 그것이기도 하다. 물 속의 자기 영상에 반했던 나르시스처럼 이 단계의 인간에게는 아직 타인이나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우 행복한 단계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자신이 통일된 어떤 존재라는 일정한 ‘오인(誤認)’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게 주체란 기본적으로 오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기는 이제 이런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건너가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서 본격적인 한 ‘인간’ 혹은 ‘주체’가 형성된다.

아기는 타인의 세계, 사회 세계에 들어간다. 그 결정적인 측면은 곧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 차원을 상징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달리 말해 아기가 이제 기표들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의 장 속에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주체의 형성은 곧 상징계로의 진입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란 타인과의 관계 하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자기소외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아기는 상징계라는 타자, 사회라는 타자 속에 들어가면 동일시의 환상에서 깨어나 차가운 자기소외(自己疏外)의 장으로 들어선다(이 단계에서 아이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즉 타인의 시선을 매개해 스스로를 이해한다). 나르시즘의 단계, 거울 단계는 곧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며, 그 단계를 통과함으로써 아기는 이제 자기와 타자를 뚜렷이 구분하면서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서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에서 어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혼의 금지야말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이행하게 한다고 말했다. 연속적 자연으로부터 불연속적 규범으로 넘어옴으로써 혈연과 결혼이 구분된다. 라캉에게서는 바로 거울 단계가 이 ‘자연과 문화의 돌쩌귀’ 역할을 한다. 아기는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유기체에서 인간으로 화한다. 이 점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모든 형태의 생물학주의를 물리친다.

라캉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함축을 띤다. 주체가 자기동일적 투명성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 즉 상징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근대적 주체 개념과는 판이한 주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기토가 해체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안돼(non)’


아기는 이자 관계에서 삼자 관계로 넘어간다. 이때 아버지가 출현한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상징계의 은유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의 경우라도 상관없다. 아버지는 곧 법(法)의 세계이며 달콤한 상상계와 대비되는 차가운 상징계를 상징한다. 아버지가 등장한다는 것은 곧 아기가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뜻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건너가면서 ‘균열(die Spaltung)’이 생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무의식이 구조화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이름이 주체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용한다. 즉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리비도/성욕이 규범에 종속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듯이,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과정은 의식적 과정이 아니라 무의식적 과정이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나의 결핍으로서 나타난다. 즉 어머니에게는 남근(phallus)이 결핍되어 있다. 이때의 남근은 생리학적인 남근이 아니라 아버지의 상징, 법의 상징, 상징계의 상징이다.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이 팔루스이다. 아기는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 즉 자신을 팔루스에 동일화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어머니와 더불어 충족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자아이 중심의 설명이다.

아버지의 이름(nom)/기표는 곧 아버지의 “안돼(non)”이다. 즉 아버지/상징계는 금지로서 등장한다. 무엇의 금지인가?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그것은 곧 연속성에 대한 갈망을 불연속으로 떼어놓는 과정이다. 연속의 자연에서 불연속의 문화로(이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통한다).

그런 분리를 거부할 때 아버지/법은 제재를 가하게 되며, 이 때문에 아기는 ‘거세(castration)’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아기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며 ‘자아의 이상(the ideal of me)’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상상계에서의 ‘이상적 자아(the ideal I)’와 다른 것이다. 이상적 나는 상상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이지만, 나의 이상은 상징계 속에서 타인의 눈길을 통해 형성되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 나의 이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ego)’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주체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주체는 상징계에 자리를 잡은 주체이지 상식적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니다.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표하는 주체(말하는 주체)와 언표되는 주체(말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자아가 억압되고 소외되기 때문이다. 이를 ‘원억압(原抑壓)’이라 부른다. 이것은 의식적 억압과 구분된다. 이러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욕구불만(frustration)’을 불러일으킨다(이 욕구불만도 의식 차원에서의 욕구불만과는 구분된다). 상징과 도덕이 욕구불만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일치’라 하는 것이 나을 듯이 보이는) ‘부정(negation)’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렇게 도덕과 윤리는 균열·틈·입벌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성립한다. 즉 상징계에 대한 ‘거부’로부터 발생한다. 여성이 잘 걸리는 히스테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남성에게서 잘 발견되는 강박증은 반대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에, 즉 스스로를 계속 팔루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병들에 대한 치료는 기본적으로 상징계에로의 정상적인 진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표에 숨은 기의 그리고 ‘그것(Es)’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기표들의 장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되며, 하나의 ‘인간’이, ‘주체’가 된다. 물론 인간·주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근대 주체철학의 그것과 정반대이지만. 요컨대 기표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를 구성한다. 이것이 라캉의 기본적인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이며 그를 레비-스트로스에 이어준다. 그러나 이 상징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레비-스트로스와 현저하게 다르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타인이 자신에게 ‘똑똑한 사람’이기를 요구하면, 자신은 타인의 욕망하는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곧 기표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기표가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상징계, 같은 구조라 해도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와 라캉의 경우는 현저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가 욕망이라는 기름기가 제거된 수학적이고 명징한 구조라면, 라캉의 구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욕망 이외의 것이 아니다. 라캉에 이르러 이제 욕망이란 특수한 의미,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본성으로, 세계의 성격 그 자체로 대두된다.

요컨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현상학의 입장)이 아니다. 기표들의 장이 존재하고, 그 기표들의 장에 의해 주체―의식적 주체 이전에 무의식적 주체―가 구성되고, 그로부터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언어의 법칙이 먼저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언어적 규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언어적 규칙성은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이 무너진 상황에서의 규칙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규칙성은 무엇일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기표가 떠다닌다고 말했다 해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관계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정립하려 한 라캉의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라캉은 구조주의자인 한에서 합리주의자이며, 따라서 구조를 좀더 역동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지 합리적 파악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구조’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구조’라는 말을 쓰는 한 문자 그대로 어떤 구조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라캉에게서 기표와 기의는 일정 지점(‘누빔점’)에서 만난다. 그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라캉 사유에서 합리주의적 측면이다. 그러나 기표는 궁극적 기의에 끝내 닻을 내리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기의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라캉이 합리주의에서의 한계를 긋는 부분이다.

라캉은 이 언어학적 구조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은유와 환유라고 생각한다. 은유는 압축이다. “불타다”와 “사랑하다”는 “뜨겁다”라는 공통 요소를 함께-중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압축(condensation)이다. 또한 은유는 치환을 특징으로 한다. “부자가 되다”가 ‘돼지’로 치환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바로 이런 은유의 언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은유는 동시성을 기반으로 한다. “불타다”와 “사랑하다” 그리고 “부자가 되다”와 ‘돼지’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선후도 없기 때문이다.

환유는 다르다. 환유는 이행이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환유이다. “잔을 들다”와 “술을 마시다” 사이에는 이행/이동의 관계가 성립한다. 환유에서 두 항은 치환되기보다는 조합된다. 그리고 환유에는 시간적 요인이 개입한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앞에 오며, 또 그래야만 환유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제유는 부분으로서 전체를 나타내는 경우이다. 사각모는 대학을 나타낸다).

정신분석학자는 기표들(예컨대 환자의 말)을 분석함으로써(즉 그 언어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그런 말들이 뜻하는 환자의 ‘인생’)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런데 기표들과 기의들의 관계가 매끈한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점들이 발생한다. 라캉은 모든 열쇠는 결국 기표들이 쥐고 있으며, 우리는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만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의는 기표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 물론 분석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의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분석가는 기표들이라는 낚시 바늘을 던져 기의들을 낚아낸다. 기표들과 기의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성공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칸트의 물자체처럼, 메이에르송의 ‘탈합리적인 것’처럼 저편에 머무른다. 이곳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한다. 그것은 언어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세계 자체, 인생 자체일 것이다. 라캉의 사유는 상상계에서 출발해 상징계로 가지만 결국 실재계에서 끝난다. 아마 인생의 ‘의미’는 영원히 기호로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 보다.


욕망과 운명


프로이트는 “그것이 있던 곳에서 나는 생성하리라(Wo es war, soll ich werden)”고 했다. 나의 생성을 좌우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그것도 어릴 때 형성된 무의식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워즈워스)라는 말은 정신분석학에서 또 다른 뉘앙스를 획득한다.

그것은 나=자아에게 타자이다.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타자=다름은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내 안에 나의 타자=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이 던져주는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이다.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는 언어, 기표의 장소, 상징계이다. 이 상징계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그곳으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선다. 또 타자란 상호주체성의 장이다. 상호주체성은 개별적인 주체들 사이에서 추후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상호주체성의 장 내에서만 주체들은 주체들일 수가 있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헤겔에게서 한 인간의 주체성은 타자를 통해서만, ‘자아 속의 이상한 자아’로서의 타인을 통해서만 형성된다(인정투쟁). 라캉에서도 자아는 자신 속의 이상한 자신으로서의 타자=무의식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상징계는 팔루스이며 상징계를 채우고 있는 욕망은 팔루스에의 욕망이다. 팔루스는 욕망의 기표이다. 욕망은 팔루스라는 기표를 통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욕망(desire)은 욕구(need), 요구(demand)와 다르다. 욕구는 생리학적 필요이지만, 요구는 타인에 대한 간청이다. 어린 아기는 사탕을 욕구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이에 비해 욕망은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구체적인 맥락에서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온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이미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이다. 인간은 그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그 원초적 결핍으로부터 욕망이 나온다.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미 상징계로 들어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래서 욕망의 기표는 팔루스이다. 그러나 욕망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팔루스를 욕망하는 것은 주체가 되기 위한 것, ‘인간’이 되기 위한 것, 일종의 타협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정신병을 앓기 때문에 거치는 통과의례이다. 그러나 도대체 욕망이 근원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실재계를 영원히 알 수 없듯이 이 또한 알 수 없다. 라캉은 이곳을 ‘신화의 세계’라 부른다. 인간은 어떤 쪼개짐으로써, 갈라짐으로써 인간이 된다. 로고스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 동시에 분열의 경험이라는 것이 인간의 얄궂은 상황이다. 따라서 욕망의 근원적 기의는 그 어떤 쪼개짐도, 갈라짐도 없는 그 어디일 것이다. 이런 욕망을 가지고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라캉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한편으로 욕구와 유사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성애적(性愛的)” 측면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다. 충동은 생리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존재한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 한, 인간은 번뇌의 존재이다. 도덕이나 윤리는 상징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며,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번뇌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라캉에게 번뇌를 해결하는 길은 우리가 왜 그렇게 번뇌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번뇌의 실체를 알게 되며 그로부터의 공허한 몸부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사유는 불교와 접맥된다.


라캉 사유의 의미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참신하게 재창조했다. 라캉이 프로이트와 구분되는 점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극히 철학적인 성격의 담론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학과 철학은 교차하게 되며, 그로써 주체·자기·욕망…을 비롯한 숱한 문제들이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라캉이 현대 사상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겠다.

라캉의 사유는 오늘날 슬라보예 지젝을 필두로 하는 ‘슬로베니아 학파’에 의해 계승되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또 라캉의 사유는 문화예술 분야에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대 사상을 수놓고 있다.

Copyright 월간 넥스트 All right reserved. 2005년 07월

2007/04/07 11:00 2007/04/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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