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6

2009/05/06 14:55 / My Life/Diary
아무 이유 없이 눈이 떠진 채 문득 ㅡ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ㅡ 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후회와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마치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같이 어떤 계기로 인하여 뚝딱- 역사가 시작되는 그런 것은.


삶의 어느 시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점’(點)처럼 되어 있다. 그런 점들이 엮어져 그 사람의 전체 삶이 된다. 이것을 점철(點綴)이라고 한다. ‘점’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그 자체 안에 고유한 가치가 있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기회다. 그러므로 그 어느 한 시절도 상대화해버리면 삶이라는 선(線)에 이상이 생긴다.
ㅡ 안병무,『너는 가능성이다』, p.114


10년전 이 단락에서 나는 이 ‘선’을 위로 향한 탑의 형상으로 상상했다. 한 점, 한 점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이에게 완전한 삶이란 불가능하다는 준엄한 정언(定言)! 그러나 몇 년이 지나 나는 이 ‘선’을 옆으로 눕혀 버렸다. 나는 그 계기를 찾아보려 했지만 결코 찾을 수 없었다.

어제는 피자를 시켜 몇 조각 집어 먹고는 너무 피곤해 잠에 들었다. 새벽께 일어나 보니 밤새 가족들이 하나 둘 집어 먹고 한 조각이 남아 있었는데, 그걸 바퀴벌레 몇 마리가 나눠 먹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에 보는 바퀴벌레라 반가움마저 들었달까- 왠지 가족 모두를 배부르게 먹인 기분에...


“한 번 바퀴벌레는 영원한 바퀴벌레라는 것이 그들의 좌우명이다.”고 뉴욕 동물학회를 대변하는 생물학자이자 『밀림시대』의 저자인 윌리엄 비브는 그의 책에 기록하고 있다. “바퀴벌레는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 그들은 훌륭한 몸이나 찬란한 몸 색깔에 대한 갈망도 없다. 절대 남을 공격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을 방어하는 것조차도 거부하며, 자신이 생명의 역사에서 배제되는 것마저도 감내하며, 안전한 생활과 생명체의 중간 코스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ㅡ 데이비드 조지 고든,『바퀴벌레』, p.70


충동- 너무나 무익한 충동이 몸을 옭아맨다. 충동은 역치를 뛰어넘는 정신력을 동원하고, 종국엔 비할 데 없는 피곤함에 지쳐 잠에 든다. 잠에서 깰 때면 언제나 무시무시한 시간의 속도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충동 이외의 상황에선 마치 카프카의 변태된 벌레처럼 침대 속에서...

청소를 했다. 오랜 두통의 원인이 되었을 법한 모니터의 잘못된 위치도 바꿔버렸다. 벽에 걸려 있던 2007년 1월의 달력도 떼어버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 몇 가지, 사소한 몇 가지 할 일들을 해냈다. 다만, 청소를 해도 먼지는 쌓인다. 청소를 하면서도, 달력을 떼어내면서도, 모니터를 바꾸면서도 변함 없이 ‘청소를 해도 먼지는 쌓인다.’


...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 속의 존재이다. 첫째, 불가항력은 인간이 자기탄생의 시간차원(시대)과 공간차원(장소), 그리고 인간차원(핏줄)을 선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둘째, 불가항력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선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셋째, 불가항력은 시간의 흐름 위에 나타나는 불확실성(不確實性)에서 온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외침은 법(法)과 제도 차원에서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슬로건에 불과하다.
ㅡ 윤석철,『경영학의 진리체계』, p.278


그러니까 오늘은,
때를 밀고 가뿐한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책장을 둘러보고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全靑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

기형도,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부분

2009/05/06 14:55 2009/05/0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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