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女生徒)

2010/12/22 02:36 / My Life/Diary
 



‘본능’이라는 말과 부딪히면 왠지 울고 싶어진다. 우리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본능의 어마어마한 힘이라는 것을 번번이 확인하게 될 때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해진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그저 엄청나게 커다란 무언가가 내 머리 위를 덮으며 내려와서 제멋대로 끌어내 돌려버리는 것이다. 끌려가면서 만족스러워하는 기분과 그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또다른 감정. 우리는 왜 혼자 만족하고 평생토록 자신만을 사랑하며 살 수 없는 걸까? 지금까지의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본능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잊은 뒤에는 그저 실망만이 남을 뿐이다. 이런 내 자신에게도 저런 내 자신에게도 본능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슬픈일이다. 엄마, 아빠를 힘껏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의외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곳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더더욱 슬퍼졌다. ㅡ p.173

책 읽는 건 그만 때려치워! 관념뿐인 생활이야. 무의미하고 시건방지게 아는 척하는 것도 밥맛이야. 나에게는 생활의 목표가 없다.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좀더 적극적이면 좋으련만 나에게는 모순이 많다. 한껏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에 빠져 있는 척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그저 시시한 감상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위로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해. ㅡ p.178

아무도 우리들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이 괴로움과 외로움은 아름다운 추억쯤으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어른이 될 때까지 이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홍역 같은 것인가.

하지만 홍역으로 인해 죽거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우리 중에는 매일 이렇게 가슴 답답해하고 화를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몸으로 평생을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음을 굳게 먹고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안타까워한다. 아아, 조금만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을, 조금만 더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너무도 괴로운 상황을 겨우겨우 참아 넘기며 뭔가 세상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세상은 그저 아무 영양가도 없는 교훈만 들려주며 위로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 기대에 배신당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쾌락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너무나도 먼 산을 가리키며 저기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다고 말하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밀려오는 맹렬한 복통 때문에 그곳까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복통을 보고도 못 본 척 “자 조금만 참으면 돼, 저 산 정상까지만 가면 다 해결돼” 하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분명 누군가가 틀렸다. 나쁜 것은 바로 당신이다! ㅡ pp.208~209

오늘과 같은 내일이 찾아오고, 행복은 평생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알지만 분명 올 거야. 내일이면 찾아올 거야 하고 믿으며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지? 털썩 커다란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아아, 기분 좋다. 차가운 이불 위에 드러눕는다. 등이 시원해져서 무작정 기분이 좋았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는 말이 얼핏 생각난다. 행복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버렸다. 바로 다음날 멋진 행복의 소식이 빈집을 찾아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행복은. ㅡ p.210

ㅡ 다자이 오사무 (김욱송 옮김),「여학생」,『달려라 메로스』, 숲
2010/12/22 02:36 2010/12/22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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