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뒤돌아보는 자화상
2회: 단 한번밖에 못 산다
3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4회: 속물과 귀족의 구별은 있다
5회: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6회: 알 것은 많고 배울 것은 무한하다
7회: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8회: 그래도 할 일은 한없이 많다

1회: 되돌아보는 자화상

거울 속에 보이는 백발의 내 모습이 믿어지지 않는다. 저런 흰머리가 정말 내 머리이며, 주름진 얼굴이 정말 내 얼굴인가.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의 꿈속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현실과 꿈이 헷갈린다. 어쨌든 내 머리카락이 백발이 됐으니 긴 세월이 지나갔다는 것과 내가 오래 살아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고희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참 오래 살아 남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 남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는 해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순간에 죽음이 벼락같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삶에 있어서 삶의 하루하루, 한 순간 한순간은 하나같이 다 아슬아슬한 기적이다.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뒤돌아 반성해 보는 일이 더 나은 생각, 더 정확한 말, 더 적절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중요하다면, 자신의 지난 삶을 전체적으로 뒤돌아 반성해보는 일은 앞으로 더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중요하다. 이 같은 반성은 그때그때 언제나 필요하지만, 머지않아 마무리하게 될 삶을 의식하게 될 즈음에는 더욱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차원에서 한층 더 의미 있다. 약 반세기의 교편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마당에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정체와 의미를 반성하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에 태어나, 칠 년 동안 일제 교육을 받았고, 해방의 흥분과 혼란기, 한국전쟁, 5.16 쿠데타, 군사독재,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 그리고 마침내 민주화라는 숨가쁜 격동기를 지냈고, 시간적으로는 20세기의 10분의 7을 살았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 왔나. 나는 어떤 존재인가. 지금 거울 속에 보이는 대로 나는 백발의 한 남자이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검은 머리카락이 좀 남아 있었고, 20년 전만 해도 검은머리가 꽤 많았으며, 30년 전에는 흰머리가 전혀 없었다.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머리 색깔만이 아니라 신장, 체중, 또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성격적으로 부단히 달라져 왔다. 그러니 그 동안 줄곧 사용되어 왔던 '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할 수 없다. 불변하는 실 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나'라는 것은 그냥 말뿐이다. '나'라는 말을 둘러싼 생물학적 존재의 변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나'라는 고정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밖과 안으로부터 일어난 변화의 산물이다. 아니 변화 그 자체일 뿐이다.

나는 어떻게 변해 왔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려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라는 연륜의 거울 속에 비치는 백발의 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나의 기억 속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수많은 나의 과거의 모습들이 산만하면서도 희미하고 드문드문 끊어진 상태로나마 오래된 필름처럼 펼쳐진다.

푸짐한 어머님의 젖을 빨며 무한한 충족감을 느꼈던 어릴 적 기억이 오로지 느낌으로만 되살아난다. 네 살 나던 겨울 급성폐렴에 걸려 일꾼의 등에 업혀 몇 십리 되는 온양온천까지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 어떤 기계 앞에서 가끔 먹던 약 냄새가 아직도 역력히 기억에 살아 남아 있다. 사랑방에서 항상 탕건을 쓰시고 긴 담뱃대를 물고 계시던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뜻도 모르는 천자문을 억지로 배우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는 새 양말, 속 옷, 색도 바지저고리를 갈아입을 수 있는 설날을 기다리곤 했다. 제사날 밤이면 사당에서 이웃 동네에서 오신 작은 댁 식구와 함께 지내던 새벽 제사의식에 참석하고자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제사가 끝난 후에 잠을 깨고 골을 내곤 하면서도 제사 밥을 맛있게 먹던 일도 기억에 남아 있다.

20리 밖에 있는 읍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 앞에 걸터앉아 실려가면서 뒤따르는 동네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날이 머리에 떠오른다. 멀리 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늦은 봄이면 야산을 누비며 새둥지를 뒤졌고, 여름이면 개천에 발가벗고 덤벅 뛰어 들어 물장난을 즐기던가 논두렁이나 연못에서 고기잡이에 열중하곤 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논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손이 얼어붙어도 추운 줄 몰랐다. 눈이 쌓이는 날이면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오는 알록달록한 방울새를 산채로 잡으려고 마당 앞에 '탑새기'를 뉘어놓고 나한테 속은 새들이 그 '탑새기'에 채이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고,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재미났다. 여름이면 모기에 물리고, 겨울이면 달달 떨어야할 때가 많았지만 그 때도 나는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형들의 뒤를 따라 어느덧 서울로 '유학'을 간다. 남보다 일찍 사춘기가 닥쳐 왔다.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상과 인생이 이상스럽게만 보인다. 어른들의 세계는 물론 중고등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폭력을 목격한다. 불공평한 사회, 사람마다 짊어져야 할 운명을 의식한다. 사회의 부조리, 성인들의 부조리, 세계와 운명의 무게, 사람들의 무지에 짓눌림, 아픔,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무력감, 격동적 사춘기와 맞물린 실존적 고뇌에 빠진다.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큰 고민을 혼자 짊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덧 염세주의자, 아니 허무주의자로 변해간다. 생판 처음으로 교회에도 나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는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문학에 눈이 떴고 시인, 사상가, 문필가가 되고자 하는 막연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나는 책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돌아와 가난, 막막하기만 앞날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들뜬 상태에서 나는 시를 쓰고 문학을 논한답시고 다방에 드나들면서 담배만 피워대거나 판잣집 음식점에 앉아 학생증을 맡기고 같은 또래의 문학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동숭동 대학 골목과 명동거리를 건들거리고 다녔다. 나는 살고 싶었다. 멋있고 뜨겁게 보람있게 살고 싶었다. 감상적일 만큼 로맨틱한 나는 소설에서 읽거나 영화에서 본대로 멋있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젊음을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이런 욕망을 갖지 않은 젊은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덧 4년간의 대학생활이 후딱 날라 갔다. 나는 더 이상 그냥 학생이 아니다. 나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했다. 시간은 가혹하다. 한번 지나간 과거는 결코 회복할 수 없고, 한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또한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하나의 선택을 했다. 옳고 보람있는 삶을 살자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보람있는 것인가를 알아야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것도 철저히 투명하게 알고 싶었다. 모든 것에 투명하고 싶었다. 그러니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나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이 무렵 어느 날 오후 종로 3가에 있는 단성사 앞을 지나갈 때 눈에 언뜻 띠었던 'No Time To Love'라는 미국영화 간판을 보고, '그렇다, 저 말이 지금 내가 꼭 하고싶은 말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바쁜 걸음으로 사람들의 틈을 비키면서 앎의 길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달리 일찍 찾아온 사춘기를 맞아 12살부터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때 나는 이미 배움의 길을 위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기로 혼자 결심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길은 이화여대의 불문학과에 통하게 됐고, 그것은 어느 덧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이어지고, 5년 동안 그 주변을 정신없이 배회했다. 그 길은 다시 대서양을 날라 북미대륙을 지나 도착한 남가주 대학으로 연장됐다. 거기서 2년 반 뒤 학생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과대학인 뉴욕주 소재 RPI에서 뜻하지 않게 철학교수로서 길을 시작한다. 2년 후 보스턴의 시몬스 여자대학으로 옮겨 23년을 재직하다가 한 학기 후면 포항공대에서의 8년 반을 끝으로 1952년에 시작한 교편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지금 내가 후학들에게 인생과 학문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2회: 단 한번밖에 못 산다

누구나 단 한번밖에 못 산다. 나는 지구상에 한번 태어나서 지구상에서 한번 살다가 지구상에서 한번 죽는다. 인생은 지구상에서만 존재하고 단 한번뿐이다. 죽으면 흙으로, 분자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도 집착해 왔던 나/자아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 고정된 영원한 '나/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과정일 뿐이고 인생은 우주의 찰나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영생,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나의 삶과 미래의 나의 삶,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다운 자아와 참다운 영생은 '나/자아'라는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연에 흡수되어 자연의 일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 자체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개나 돼지, 나무나 풀, 흙이나 먼지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하나의 갈대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그냥 돼지나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돼지이며 생각하는 갈대이다.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은 자연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혜, 결단, 의지에 따라 바꾸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인지적, 의지적 능력도 자연의 우연한 일부 산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한 능력으로 자연과 자기 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그냥 자연과는 다른 이상한 자연, 자연 아닌 자연이다.

인간이 그저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라는 사실은 이성의 거울에 비추어 알 수 있고, 인간이 동물, 식물, 세포, 물질과 다름없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과학이 보여주는 진리이다. 이성과 과학이 모든 대답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과학이 그려 보이는 세계보다 더 믿을만한 것은 아직 없다. 이성과 과학은 진리의 원천이다. 믿든 말든 사실은 사실이고 싫든 좋든 진리는 진리이다.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리를 진리로서 인정하는 혜안이 필요하고, 이러한 혜안을 갖으려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직성,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이야말로 참다운 나의 발견의 유일한 바탕이며 뜻 있는 삶의 원초적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겁과 구별할 수 없는 우주의 시간에 비추어 보면 인류의 역사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득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나의 삶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그러한 순간도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반복될 수 없다. 삶은 살과 뼈, 피와 의식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개체로서만 존재하고, 개체로서의 삶은 일회적이다. 이런 점에서 세포에서 시작하여 벌레나 날짐승이나 원숭이나 인간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유일한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개체로서 살다가 개체로서 죽어 자연 그리고 우주로 회귀하여 영원한 순환의 궤적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아무도 자신의 삶을 반복할 수 없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모든 생명은 단 한번만 산다. 영생이란 바로 이렇게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화하는 과정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면 나는 이미 살아 존재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나는 이유 없이 태어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싫든 좋은, 이유가 있든 말든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살아야 한다.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히 어떤 특정한 때,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부모에 의하여 태어났다. 어느덧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내고 어쩌다 보니 어느덧 중년 그리고 백발 노인이 되어 내 자신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 생각해보면 볼수록 한 인간의 삶, 한 생명, 모든 존재는 아무런 궁극적, 초월적 의미가 없다. 사실 '궁극적 의미'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의미가 나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와 현상은 아무 궁극적 뜻 없이 그냥 있고, 그냥 변하고, 그냥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내세와 천당의 부재, 아니 영원불변의 '나/자아'의 부재, 현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이고 이 지구에서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한탄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세와 천당이 없기에 현재의 삶은 더 절실하고, 단 한번밖에 살 수 없기에 현재의 이 삶이 한결 더 귀중하다. 보람 있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의 판가름은 오로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찰나같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 해, 하루, 한 시간, 한 찰나는 그 하나 하나가 더 절실할 수 있다. 단 한번만의 인생이 찰나같이 짧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심히 지내는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은 무한히 귀중하고 낭비하기에는 잠시라도 너무나도 아깝다.

형이상학적, 초월적 인생의 목적이 없다고 해서 절망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만약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어 한없이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부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인생의 목적과 의미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그 활동, 노력 자체에 있다. 인생의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서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 인간이 스스로 내부에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존재의 우연성은 내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내 존재의 무의미성은 내 존재의 의미의 원천이다. 처음부터 나의 모든 삶의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었다면 나는, 나의 존재는 하나의 무의미한 기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원래부터 내 인생의 의미가 정해졌다면 나의 삶은 그냥 존재할 뿐 내가 사는 나의 삶으로서는 무의미하다. 인류가 한 종의 갈대로서 다른 종들의 갈대와 꼭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류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갈대와는 다른 자연의 일부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인류에게만 존재의 '의미'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각자가 만들어낸 인생의 의미는 다름아니라 그가 살아 온 삶의 구체적 과정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정해지고 주어진 방법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혜지, 선택, 결단, 의지에 달려있다. 인생의 의미가 단지 각 개인이 선택한 삶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인생의 의미와 마찬가지이며, 그렇다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되는 대로, 기분대로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구체적으로 그 기준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항상 나올 수 있지만 성자같이 보낸 인생이 있고 개처럼 지내는 인간의 삶이 있으며, 예술작품 같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걸레조각 같은 인생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단 한번밖에 못살고, 단 한번밖에 선택할 수 없다면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현재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히 결정된다. 인생에는 재수가 불가능하다. 한번 망친 인생은 영원히 망친 인생이다. 삶에 대한 태도의 결정,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의 선택문제 앞에서 한없이 숙연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반적 기준은 없을까. '인간으로서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삶' 이외에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잣대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권력인가. 부의 축적인가. 명성인가. 꼭 그렇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나쁠 게 전혀 없다. 그러나 권력자 가운데는 범죄자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고, 거부들 가운데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 허다하며, 명성을 누리는 이들의 뒤에는 감추고 싶은 그늘과 때가 많다. 쾌락인가. 쾌락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직업이 '인간다운 삶'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다움에는 직업의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직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태도이다. 자신의 신조에 따라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철저하게 정직하고, 불꽃같이 타듯이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자 하는 태도이다. 똑바로 눈을 뜨고 소신대로 살자. 자신을 속이지 말라.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고 끝까지 꼿꼿하자.

3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돌은 그냥 있고 물은 그냥 흐르며, 풀과 나무는 그냥 솟아나고 자라다가 시들고 말라죽으며, 버러지나 짐승은 그냥 나르고 뛰며, 그냥 먹고 싸고 번식하다 죽는다. 어떤 돌 조각, 물방울, 풀, 나무, 버러지, 짐승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고 "나는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 그 시기와 심각성의 밀도는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아에 대한 의식을 하게 된다. 외부 세상만을 보던 시선이 문득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되어, 엄마와 과자, 새와 토끼, 장난감과 책, 여자와 돈을 찾고 가려내던 생물학적 '내'가 갑자기 자신의 '나'를 찾게 되며, "나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희미하게나마 묻게 된다. 이런 물음으로 자연적 존재로서의 나의 삶에 금이 가고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긴다. 이런 상처내기는 동물학적 내가 인간학적 나로 변신하여 새로이 탄생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다.

'나'라는 일정한 즉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객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십여 년 동안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줄곧 변화해 왔는데도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복돌이'로 불러 왔다. 나/복돌이는 누구냐? 복돌이는 한국인이며, 어디 어디에 사는 아무개의 아들이며, 포항공대 일학년생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한국인', '아무개의 아들', '포항공대 학생'은 복돌이의 우연적으로 결정된 자연적, 제도적 속성이지 복돌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돌이'로 불리는 나는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개체임에 틀림없다. 나는 아버지, 똘똘이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 아무도 내 대신 먹고, 자고, 배설하고, 고민하고 살고 죽을 수 없다. 만일 다른 인간이 나를 대신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나를 대신하는 것이지 결코 나 자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복돌이는 도대체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우선 살과 뼈, 피 등 물질의 특정한 집합으로 규정될 수 있고, 이러한 물질적 집합이, 세포나 더 나아가서 특정한 유전자로 분석될 수 있다면, 그 유전자는 다시 분자, 전자, 쿼크 등 한없이 미세한 물리적 입자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물질과 근본적 차이가 없고 따라서 구별되지 않는다. 내가 이처럼 물질로 환원된다면 나의 유일성은 전혀 허상이다. 이처럼 가시적 즉 현상적 '나/복돌이'의 탐구가 불가능하다면 '나/복돌이'의 본질은 비가시적 즉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유명한 인간정의는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가시적이며 가변적인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현상이 아니라 비가시적이며 비가변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신념을 전제하고, 이 신념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극히 서양적인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그러나 진화론, 정신분석학, 특히 오늘날의 첨단과학에서 볼 수 있듯이 실증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정신 특히 이성의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는 최근 해체주의, 더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에 훨씬 앞서 동양의 불교나 도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적 차원에서도 이원론적 형이상학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이나 철학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분간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 보를 양보해서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인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정신'이라는 특수한 속성으로 규정하더라도, 정신적 존재로서의 나/복돌이의 유일성을 규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이 문제를 풀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복돌이라는 말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 낱말이 유통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음을 입증한다. 나/복돌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복돌이는 앞서 보았듯이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물리학적 차원에서 실증적으로 지각되거나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사념적으로 직관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대상은 아니다. 그런 대상으로서의 나/복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복돌이는 형이상학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영원히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기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나/복돌이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내면적으로 반성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유동적인 주관적 경험 자체이다. 나/복돌이의 경험은 시간을 거치면서 항상 변하면서 새롭게 축적되는 만큼, 나의 경험의 내용은 수시로 변하는 그때 그때의 경험의 총체이다.

경험의 총체로서의 나/복돌이는 세 가지 사실을 함의한다. 첫째, 나/복돌이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나/복돌이를 둘러싼 구체적인 물리적, 사회적, 이념적 및 실천적 관계로서만 규정될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맥락을 떠난 경험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복돌이는 곧 나/복돌이가 한 지각적, 심리적, 행위적 및 생산적 경험의 총체이다. 둘째, 모든 나/복돌이들이 각기 갖게되는 유일성이다. 모든 경험은 특정한 시간, 공간 그리고 구체적인 현상을 떠난 경험은 상상할 수 없는데, 모든 시간, 공간 그리고 구체적인 현상은 항상 변화하며 절대로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궁극적으로 모든 나/복돌이들이 각각 자유스런 존재라는 사실이다. 경험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한 해석이며, 해석은 인과적 현상이 아니라 주관적 관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총체'로 규정할 있는 나/복돌이는 처음부터 존재하거나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나/복돌이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나/복돌이는 밖으로부터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복돌이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면 유일한 개개인의 본질 즉 정체성은 그가 실천한 자유의 독특한 내용, 양식, 결과 즉 그의 구체적인 삶이다.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나/복돌이의 자유이며, 그에 따라 살아온 구체적 삶의 총칭이다. 자유는 선택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나/복돌이가 선택한 가치, 태도, 행동, 활동의 총칭이다. 한 인간만이 자유롭고, 정체성은 인간에만 해당된다. 자유가 인간의 증거라면, 정체성은 개인으로서의 각기 나/복돌이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근거이고, 각기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그가 선택한 삶이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아무도 선택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은 책임을 동반하는 만큼 언제나 불안과 고민을 동반한다. 불안과 고민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치러야 할 통과의식이며 대가이다. 고민할 때만 비로소 나는 그냥 동물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를 의식할 수 있고 이러한 확인을 할 수 있을 때만 나는 나/복돌이의 유일성 즉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각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고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대치되어야 한다. "나/복돌이는 누구/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복돌이는 곧 나/복돌이의 고민이며, 그 고민의 깊이와 밀도이다"라는 명제라는 것이다.

왜 인간은 고민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의 삶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냥 물질, 그냥 짐승이 되기 싫기 때문이다. 왜 나/복돌이의 정체성이 중요한가. 대답은 단순하다. 나/복돌이가 다른 수많은 인간과 상품처럼 대치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상품과 같은 물건이 아니라 유일한 실존적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확인할 내적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주체다. 주체가 섰을 때만 나의 자유를 확인하고, 자유는 선택을 요청하고, 선택은 고민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고민이 없는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가치, 그것이 함의하는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하되, 부단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경우에 따라 용감하게 그 원칙까지도 바꾸면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이다. 그러므로 고통 없이는 주체를 세우고 지킬 수 없다. 누구나 불행한 소크라테스보다는 행복한 돼지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 항상 빠지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자 하는 한 고통과 고민을 도피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라. 온 몸이 찢어지듯 고민하라. 너무 늦기 전에 고민하고 선택하라. 때가 지나면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이 없다. '나'의 주체는 곧 나의 고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4회: 속물과 귀족의 구별은 있다

정체성이 분명한 경우에만 나는 인간으로서 실존한다 할 수 있고, '나'의 정체성은 '나'의 주체적 선택을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살아가는 동안 부단한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선택이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자유를 피할 수 없고, 자유가 책임을 함의하기 때문에 선택은 고민을 동반한다. 이런 점에서 인생은 곧 고민이다. 인생이 곧 고민이라는 사실만은 나의 자유스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운명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유, 선택, 고민만은 선택의 밖에 있다.

나는 해가 가면 나이를 먹고, 학교에 다니게 되며, 대학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대학에 간다면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지망할 것인가, 대학졸업 후에는 어떤 직장으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아무도 도피할 수 없다. 나이가 더 들면 결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결혼을 결정할 경우 어떤 상대자와 할 것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대학을 가야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가느냐에 따라, 어떤 직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혼이냐 독신이냐에 따라, 나의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대학으로 진학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는 시골에서 농부로서 혹은 공장에서 노동자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대학에서 어떤 학과를 지원하느냐에 따라 나는 평생 가난한 시인으로 살거나 고급관리나 첨단과학자가 되어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살 수 있으며, 어떤 직장을 택하느냐에 따라 나는 학자로서의 조용한 삶이나 사업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다. 결혼하느냐 독신으로 사느냐에 따라 나는 남편, 아버지로서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거나 고독하지만 고고하게 살 수 있다. 모든 주위 사람들, 모든 상황에 어떤 태도로 어떻게 대처하며 사느냐에 따라 나는 선하거나 악한 사람, 점잖거나 속물적 인간이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나의 선택의 총체는 곧 나의 정체성이다. 선택이 언제나 그때 그때의 특정한 가치의 선택이며, 한 사람의 이러한 가치의 선택은 그 사람의 궁극적 가치, 이상적 인간상 즉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에 비추어 가야할 대학, 전공할 과목, 몸담아야 할 직장, 결혼 혹은 독신생활, 배우자 등 구체적인 선택들로 나의 정체성 즉 내가 바라는 고유한 나 자신의 삶의 선택을 해야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결정할 객관적 근거가 없고, 어떤 삶, 어떤 정체성 즉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객관적 근거를 절대로 댈 수 없다는 데 있으며, 이 문제는 한 종류의 정체성을 선택함은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어렵고 심각하다. 나는 한편으로는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 대학교수가 되어 결혼도 하고 비교적 안정된 행복을 누리고 싶지만, 시인이 되어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쓰고 가능하면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기도 하다. 나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하고 경우에 따라 목숨도 바치는 삶의 고귀한 의미를 인정하지만,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아 남을 지배하면서 나의 물질적, 동물적 욕망을 마음껏 채우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동시에 두 가지를 다 선택할 수 없고, 선택은 언제나 하나만의 선택이라는 사실이 선택을 한결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학교, 학과, 직업, 결혼 등의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라 도구적인 선택이다. 관리나 대학교수가 노동자나 농부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가나 고관들의 삶이 재산을 많이 모은 사업가의 삶보다 더 귀하다는 근거도 없다. 교수로 상징되는 지식의 개발이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만큼 빈곤하고, 돈을 벌어 오는 사업가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정치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농부가 농산물을 생산하고, 공장노동자들이 공산품을 제조하지 않으면, 교수나 정치가는 생존할 수 없다. 여러 가지 활동자체, 직업적으로 분야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호의존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어떤 활동, 어떤 직업, 어떤 사람들이 더 가치가 있고 바람직하고 더 고귀한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관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대학진학, 대학에서의 전공, 직업 등의 선택은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 원초적, 근원적 선택이 아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공부, 똑같은 직업을 갖고 있어도 그들의 인생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관은 전혀 다를 수 있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학교, 과목,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의 인생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관은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 우리가 택하는 삶의 구체적인 길과 방법은 우리가 내적으로 추구하는 무엇인가 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고, 과정이며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목적이 똑같다 하더라도 각자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 성장한 배경, 가정적, 사회적, 역사적 상황이 다른 만큼 그러한 목적 및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과 절차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 하며, 따라서 한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학교, 과목, 직장의 선택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 한다.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인생관을 갖고 있더라도 그 두 사람이 선택하는 학교, 학과, 직장, 배우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택이 인생의 근본적인 선택도 아니며, 그런 선택에 동반되는 고민이 근본적인 고민도 아니다.

학교, 학과, 직장, 배우자의 선택이 불가피하고 중요하지만, 그 선택은 인생에 대한 더 총괄적인 비전, 인생의 총체적 의미에 대해 각자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원초적 선택을 전제하고 반영하며, 역으로 이러한 근본적 가치관의 원초적 선택이 위와 같은 구체적 선택들을 결정한다. 선택과 선택에 동반되는 고민은 불가피하지만,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 즉 이상적 삶, 가장 인간다운 삶에 대한 비전의 선택이며, 인간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가치관 즉 이상적 삶의 비전, 즉 '나/복돌이'가 궁극적으로 어떤 인간으로서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치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바라야 할 무엇인가를 뜻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나는 돈환처럼 쾌락만을 추구하고 싶은 동시에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금욕적으로 봉사하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고 권력을 누려보고 싶지만, 그러한 것을 억제하고 학자로서 무한히 넓은 정신의 세계에서 진리만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도 갖고 있다. 나는 죽으면 그만이니 아무리 저속한 방법으로라도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고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고귀한 품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조를 지키고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욕망, 나의 가치관이 항상 서로 상충한다는 데 있다. 나는 학자의 길과 사업가의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며, 쾌락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나는 동시에 저속하면서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근본적 문제는 막상 따지고 보면 상반되는 욕망, 가치, 인간의 속성 가운데에 어떤 것이 더 옳고,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궁극적으로 아무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가장 궁극적 인간의 실존적 고민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궁극적 잣대는 '저속성/고귀성'이라는 정신적/도덕적 속성이며, 저속한 삶보다는 고귀한 삶이 더 바람직한 즉 가치 있는 삶이며, 하늘과 땅이 다같이 아름다운 자연이더라도 하늘은 땅보다 역시 더 높고 푸르며, 높고 푸른 하늘이 땅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러한 사실은 생각하고 반성하는 이에게 자명하다. 생각해봐야 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자.

우리 시대는 쾌락만을 좇는 속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럴수록 속물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신적 귀족이 되어야한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나/복돌이'는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자면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5회: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대부분 진짜 놀라움이나 진정한 감동이 없이 흘러간다. 철이 나면 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보통 우리는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코를 킁킁거린다. 산이나 구름을 보거나, 천둥소리와 TV 방송을 듣거나, 구린내나 향수 냄새를 맡거나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성원리를 배울 때나 노자의 철학을 읽을 때, 장가 시집을 가거나 애를 낳거나 죽음을 당할 때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고 물리적으로 그냥 반응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리 팔팔하게 활동하고,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마찬가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모든 그대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자명하다.

그러나 정말 잠을 깨서 살아나고, 정말 눈을 떠서 사물을 보고, 정말 귀를 기울여서 소리를 듣고, 정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절실한 느낌을 갖고, 정말 머리를 써서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올 수 있다. 이 때 산은 산으로 보이지 않고, 방송소리는 방송소리로 들리지 않고, 구린내는 구린내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전의 삶과 죽음이 아니고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며, 산은 산이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니고, 그 아무 것도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자명하지도 않게 된다. 나 자신이 알 수 없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바뀌고 한없이 이상해지며, 느끼고 생각할수록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제 나는 잠을 깬다. 처음으로 나는 산과 바다, 사람과 동물, 삶과 죽음, 내 자신과 남들, 컴퓨터와 책상을 본다. 처음으로 나는 바람과 물, 구름과 새들의 노래 소리, 나 이외의 사람들, 동물들, 초목들, 현상들, 사물들의 언어를 듣는다. 처음으로 나는 꽃과 쓰레기, 인간과 동물, 산과 바다, 땅과 하늘, 달과 별들의 냄새와 향기를 맡는다. 처음으로 나는 모든 것들한테서 깊은 감동을 받고, 흐뭇한 희열감을 체험한다. 나는 비로소 존재하고 비로소 살아난다.

산과 나무와 동물이 있다는 사실, 부모가 있고 내가 그 부모들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성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꽃과 한 폭의 그림이 아름답다는 사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 나나 네가 큰소리도 치고 고상한 말들을 하다가도 어느 연령이 되면 개나 돼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잡히고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 부모가 죽고 때가 되면 나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인간이 한편으로는 자연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과 싸우면서 긴 역사를 거쳐서 살아남아 문명을 일궈 왔다는 사실, 내가 닭이나 돼지나 소를 잡아먹는다는 사실, 풀을 먹고사는 메뚜기를 개구리가 잡아먹고, 그런 개구리를 뱀이 먹고산다는 사실, 모든 생물이 교배를 통해서 번식한다는 사실,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이 살아 있다는 사실, 무엇인가의 존재가 보이고, 무엇인가의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 그러한 것에 대한 느낌, 감동, 생각이 있다는 사실, 지구, 달,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주가 있다는 사실, 자연현상이 정확하고 엄밀한 수학적 언어로 재현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 아니 라이프니츠와 하이데거의 말대로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었을 터인데도 도대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찌 놀랍고 경이롭고 신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어쨌든, 한 차원 높은 차원에서 그 대답이 보여주는 사실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이 다시금 제기될 때 모든 것은 더욱 경이롭고, 신비로우면서 아름답고, 당혹스러우면서도 황홀하다.

의식하고, 느끼고, 감동하는 모든 것이 경이로운 것은 이 경험이 나에게는 처음이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신비로운 것은 그 경험 대상이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것이 어떤 질서와 조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황홀한 것은 그 존재, 그 존재의 질서와 조화가 다같이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있는 어떤 요청을 충족시켜 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까지 나는 산과 바다가 있고, 동물과 인간이 있고, 아버지와 자식이 있으며, 탄생과 죽음이 있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고, 새가 버러지를 찍어 먹고,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사실에 한번도 놀라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 나는 처음으로 이러한 놀라움을 경험한다.

인류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존재의 기원과 목적, 우주의 구조와 운명의 원칙, 사물현상의 속성과 법칙, 수많은 개별적 존재나 현상들의 인과적 관계, 인식에 있어서의 의식과 그 대상의 논리적 관계, 인간과 동물, 나와 너의 존재 원인이나 이유, 도덕적 혹은 미학적 경험과 가치에 대한 설명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과학적 이론도 위와 같은 사실, 현상 그리고 경험에 대해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더욱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투명하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무질서한 혼돈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경이롭고 신비스런 모든 존재, 현상 그리고 경험 속에서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이 막연하나마 전제하거나 주장하는 것들 중에서 어떤 질서와 조화를 피부로 직관한다. 그러기에 나는 언뜻 보아 혼돈 자체만 같아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질서를 느낀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어쩌면 그 가운데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도대체 무엇인가가 있느냐의 물음 그 자체이며, 어쩌면 이 물음보다도 더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인간, 인간의 의식, 인간의 지적 능력인 듯하다.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히 의식하거나 설명하거나 파악할 수 없지만 나는 이런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그냥 저절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적, 정서적, 미학적 충족감을 체험한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서 황홀감에 도취된다, 눈을 씻고 크게 떠서 사물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귀를 깨끗이 후비고 사물들의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코를 깔끔히 풀고 사물들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기 때문이다. 피부로 깊이 처음으로 감동하고 지적으로 투명하게 처음으로 직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뜻에서 잠을 깨고 진정한 뜻에서 살아있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 올 때까지도 나의 머리, 눈, 귀, 코로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나는 공학박사, 대학 교수, 큰 회사의 사장, 장관이 되었어도 나의 의식이나 감각, 아니 나 자신의 존재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열심히 책, 돈, 권리만 보고 살아왔다. 나는 백발이 되어 죽음이 가까운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자연, 우주, 그리고 존재와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보통 우리는 이처럼 동물같이 살다가 죽다가 물건과 같이 존재하다가 없어진다. 코 밑 잎만 보느라 나무를 못 본 채 나무를 보았다고 착각하고, 잡음만 듣고도 음악을 들었다고 잘못 믿으며, 퀴퀴한 구린내만 맡고 치즈 냄새를 맡지 못하고서도 치즈 냄새를 좋아한다고 헛 믿는다. 있는 대로 보지도 못하고, 소리나는 대로 듣지도 못하고, 냄새나는 대로 맡지 못하는 우리는 진정한 경이, 신비,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정말 느낌이 없이 존재하며, 느낌이 없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다. 잠을 깨고 살아나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나를 보며, 내가 귀를 청소하고 사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사물들이 또한 내게 귀를 기울인다. 코를 대고 존재의 체취를 맡으니 또한 존재가 코를 대고 나의 체취를 맡는다. 모든 것은 무한히 이상하고 신기하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맡으면 맡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다. 감동이 깊으면 깊은 만큼, 생각이 투명하면 투명한 만큼 한결 더 그렇다. 정말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하고 경이롭다.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새로 보자. 귀를 깨끗이 씻고 소리를 새로 듣자. 머리를 식혀 새로 생각해 보자. 세계는 지금과는 달리 무한히 신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황홀한 감동의 원천, 투명한 인식의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

6회: 알 것은 많고 배울 것은 무한하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랄 만큼 신비스러운 세상의 방대한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무한히 자극한다. 그것이 나를 지적 잠에서 깨워 눈을 뜨게 한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 그리고 나 자신의 의식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 현상, 사건, 생각들 하나 하나가 한결같이 나의 지적 욕망에 불을 지펴 그 모든 것을 알고 배우고 싶은 심정으로 몰아 넣는다.

이웃 아가씨의 이름은 무엇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감은 언제부터 그리고 어째서 저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변하게 됐는가. 저 산너머에는 무엇이 있으며, 이 동네를 벗어나면 어떤 동네가 있고, 바다를 건너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나라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궁금하다. 밤과 낮이 어떻게 바뀌는지, 비가 왜 오는지, 원자나 유전자의 구조와 그 존재 원리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어째서 꽃은 아름답고 쓰레기는 추한가?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원자의 물리학적 구조, 유전자의 생명공학적 구조, 인간복제의 원리도 알고 싶다. 아득한 옛날부터 나의 조상이 살아 왔고 내가 태어난 한국의 역사, 유럽 문명의 원천인 그리스의 문화, 인류의 역사도 알고 싶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저곳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싶다. 도서관에 꽂혀있는 저 수많은 책들 그리고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저서들이 어떤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가를 알고 싶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사회학, 예술, 물리학, 생명공학, 수학 등 모든 학문을 모두 샅샅이 배워 알고 싶다. 진리, 미, 선, 앎 등 숱한 개념들의 정확한 의미도 밝히고 싶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 윤회의 사실성도 알고 싶다. 태생과 죽음,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아니 존재 자체를 알고 싶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도 알고 싶다.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철저히 투명하게 알고 싶다. 정말 세밀하고 정확하게 알고 싶다. 알기 위해서 한없이 그리고 철저하고 정확하게 배우고 싶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지도 알고 싶다.

나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많은 학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고, 그들의 책을 읽고 배워왔다. 그들의 지식은 방대하고 깊다. 들어야 할 강의 제목, 읽어야 할 책의 양, 그런 강의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쏟아야 할 시간과 바쳐야 할 노력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세상의 비밀과 존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나는 무한히 많은 시간을 강의 시간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하고, 무한한 시간을 독서하는 데 바쳐야 한다. 남들한테서 그리고 책에서 배울 것이 끝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것들을 보고,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한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수많은 날을 학교에서 공부했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가 되었고, 교수가 되었다. 지금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배우고 거의 알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적도 있다. 모든 것이 그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와 아울러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현상에 대한 뜨거운 지적 호기심의 열도가 식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나만이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변화를 성숙, 지혜, 도통, 해탈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정신적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이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지적 미숙으로 평가절하 한다. 이런 태도는 보통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사상사를 통해서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모든 것을 배우고 알았다고 확신하고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소유했다고 확신했으며, 종교인들은 절대적 신, 영혼, 초월의 세계까지를 알았다고 자신하고 그것을 믿어왔으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이러한 철학자나 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앎, 진리에 대해 더 이상 타오를 열정이 남아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신념은 자명하고 확실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들이 결코 나에게는 확실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앎과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도 불투명하다. 내가 배운 것이 아무리 많고 내가 아무리 깊은 것을 느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지 사실일 수 없다. 잠깐만 돌이켜 보아도 내가 듣고 읽어 얻은 지식의 양은, 뉴턴의 말대로, 모래밭의 무한에 가까운 모래의 양에 비해 단 한 알의 모래알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모래알에 대한 나의 앎의 깊이는 아무리 깊어도 수박 겉껍데기의 깊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신을 차려 눈을 똑똑히 뜨고 보면 세상에는 아직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할 만큼 배워야 할 것이 무한히 많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할 만큼 현상들에 대한 앎의 깊이는 무한히 깊다. 아직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시피 하며,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신념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의, 많은 고령자들의 잘못된 생각처럼 또는 믿는 대로,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의 환상적 신념처럼 나 또한 모든 것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잘못 믿어왔고, 많은 것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자부해 왔지 않았던가. 아직까지 나는 지적으로 안이하게 살아왔지 않았던가. 이제 조금만 반성해보면 나의 호기심은 생각보다 부족했고, 나의 앎에 대한 정열은 스스로 자부해 왔던 것보다 시들했고, 나의 진리에 대한 탐구력은 스스로 자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철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보면 볼수록 볼 것이 너무 많고, 들으면 들을수록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어가야 할 진리의 깊이는 너무나 깊다. 배워야 할 것들의 무한에 가까운 양을 생각하면 내가 배운 것은 무에 가깝고, 참된 앎의 빛의 무한에 가까운 광명에 비하면 내가 갖고 있는 앎의 빛은 아직도 암흑에 가깝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과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배우고 알아야 하겠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인생이 너무 헷갈린다. 그러므로 나는 더 배우고 더 알아야 하겠다. 아직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배움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무한한 기쁨을 배웠으며, 앎이 나에게 주는 무한한 환희를 알았다. 배움의 기쁨은 진리를 접하는 기쁨이며, 앎의 환희는 진리의 빛을 경험하는 환희이다.

배움과 앎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에 대한 강렬한 지적 호기심, 진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전제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없이 방대하고 다양하며 깊다. 나는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다 배우고, 한꺼번에 그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정말 새로운 배움과 앎에 내 호기심이 집중되고, 나의 지적 추구가 철저해야 한다.

호기심이 흩어져서는 안 되겠다. 앎에 대한 정열이 해이해져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충성이 식어서는 안 된다. 배움과 앎을 위해서라면 식사, 잠, 마누라, 자식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앎을 위해서 가족, 나라를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진리가 가져오는 기쁨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지적 역사를 통해서 이런 이들이 적지 않았다. 투명한 세계, 진리를 위해서 인생의 도박을 걸었다고 자부했던 나 자신을 뒤돌아보며 나는 내 삶에 충실히 집중하지 못했고, 내 자신에 충분히 철저하지 못했던 사실을 뒤늦게 후회스럽다고 의식하고 부끄럽게 느낀다.

배울 것은 끝이 없고 알 것은 무한한데 나는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로 머지않아 이 세상, 한없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실이 아쉽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다시 배움과 앎의 길을 선택하고, 그 때에는 이번과는 달리 정말 후회 없이 그 길을 투철하고 충실하게 걸어 보리라. 배움은 길이며, 앎은 빛이다. 진리는 오직 그 길과 그 빛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배움과 앎의 길이 끝없이 펴져 있고, 찾아야 할 진리는 무한하다. 진리는 기쁨의 원천이다.

지식정보시대는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인간의 호기심에 진리가 아니라 돈과 돈을 위한 경쟁에 쏠리고, 배움과 지식이 도구로 전락해가고 있는 시대에 지나지 않다. 지식의 급증과 정보교환의 범람으로 세상이 더 어둡고, 삶이 더 헷갈린다. 그럴수록 모든 것을 정말 알아 투명하게 밝히고 싶은 욕망에 나는 사로잡힌다.

7회: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하나를 보면 둘이 안 보이고, 한 소리를 들으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하나를 읽으면 다른 것이 읽히지 않는다. 어떤 것을 보고 한 사람은 산이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물이라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이 사람은 음악이라 하는데 다른 이는 잡음이라 하며, 어떤 낱말의 뜻을 놓고 '개'라 하는데 다른 이는 '소'라 한다. 산과 물이 따로따로는 보여도 그 둘이 전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고, 바람 소리와 음악 소리를 따로따로는 들어도 그 둘이 합쳐서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으며, 한 낱말과 한 문구의 의미가 따로따로는 이해되어도 그것이 합쳐 이룩된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래도 저래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 것도 저 것도, 이 경우 저 경우도 따지고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인류는 역사적 경험과 삶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았다고 믿어 왔다. 선배와 선생님의 신념이 옳은 것 같고, 점술가들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이 보인다. 과학자의 설명이 정확해 보이고, 깊은 진리에 대한 철학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종교인들의 신앙이 더 심오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예수의 말이나 노자의 주장, 기독교의 설교, 부처의 가르침, 공자의 생각이 한결같이 옳은 것 같다. 나나 너나 사람마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위와 같은 것을 배워서 세계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배움은 과연 옳은 것이며, 우리의 앎은 정말 진리인가.

알고 보면 똑같은 것을 놓고도 내가 본 것과 네가 본 것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 선배와 선생의 지식은 흔히 서로 맞지 않는다. 같은 자연현상을 놓고도 점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설명은 흔히 상충한다. 똑같은 자연현상을 놓고 점술가들은 어떤 영적 존재의 조작으로 설명하는데 반해서 과학자들은 기계적 법칙의 작동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삶, 영혼과 영원에 대한 생각에서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흔히 어긋난다. 한 편에서 그러한 것들의 실재성을 믿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과학 안에서조차 물리적 현상에 대한 뉴턴의 삼차원적 설명과 아인슈타인의 사차원적 설명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철학 안에서도 실체에 대한 플라톤의 이원론적 관념론은 노장의 일원론적 자연주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종교 안에서도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대적
2005/03/26 01:47 2005/03/26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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