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씨수말(Sires of the Century)
PHALARIS 생산자 & 마주 활동 목장 경마에 대한 참고서적들이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1978년에 편찬된 영국평지경주마백과(The Biographical Encyclopedia of British Flat Racing)는 팔라리스(Phalaris)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팔라리스는 최고 수준의 경주마는 아니었지만 좋은 중거리 경주마였다. 세계1차대전 기간 동안 뉴마켓(Newmarket) 경마장에서 모두 15경주를 우승했고 5,475파운드의 상금을 획득했다. 경주마 인생이 끝났을 때, 팔려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수출될 뻔했으나 마지막에 계약이 무산되었고 결국 마주의 목장으로 은퇴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거뒀던 성적으로 다른 목장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나은 기회를 얻었다.
팔라리스는 분명 세계1차대전 기간 동안 뛰었다. 하지만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씨수말이 될 마필의 경력에 대한 그 외의 다른 주장들은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먼저 경주기록을 제대로 써보자. 팔라리스는 최고 수준의 경주마였다. 만약 타임폼(Timeform)이 그 당시에도 있었다면, 그는 132 정도를 얻었을 것이다. (현역 경주마 중 최고는 Curlin의 134) 팔라리스는 중거리 경주마가 아니라 걸출한 스프린터였다. 4세와 5세 때 모두 최고의 전성기였고 16승을 거둬 5,478파운드를 획득했다. 그중에는 윈저(Windsor) 경마장에서 거둔 것도 있다. 만약 오스트레일리아로 수출될 가능성이 혹시라도 있었다면 그건 3세 때지 그의 경주 경력이 끝났을 때는 아니다. 팔라리스가 눈부신 스피드와 엄청난 부담중량을 극복하는 힘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두 시즌 동안 기록한 성적은 그가 은퇴했을 때 교배를 원하는 본토의 생산자들을 아우성치게 만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런 고귀한 명성을 가진 마필을 사겠다는 희망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17대 더비 백작에 의해 생산된 팔라리스는 그해 최고의 숫말에 비해 4파운드 적은 부담중량을 받은 좋은 2세마였다. 팔라리스는 3세 때 2000기니에서 패하며 마일(1600m) 거리에서 최고의 말들을 꺾는 수준까진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나중에 10펄롱(2000m) 이상의 거리에서 보다 약한 말들을 상대로 뛰며 우승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조지램튼(George Lambton, 영국 챔피언 조교사)은 팔라리스의 진정한 특기를 4세 때 발견했다. 그때 팔라리스는 단거리 경주 6개를 연속으로 우승했다. 그 가운데는 주요 핸디캡 경주들에서의 우승과 챌린지스테익스(the Challenge Stakes)에서의 4마신차 우승도 있었다. 5세가 되어 챌린지스테익스에서 또다시 우승했는데, 팔라리스의 탁월함이 너무나 확연해서 그를 상대로 달리려는 마필이 없었다. 팔라리스는 장거리 경주마보다는 스피디한 경주마의 아비말이 될 것으로 보통 간주됐다. 하지만 그의 혈통 구성은 팔라리스가 더 넓은 영향력을 떨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팔라리스의 부마인 폴리멜루스(Polymelus)는 삼관마인 폼메른(Pommern)을 배출했다. 모마인 브로무스(Bromus)는 싸인포인(Sainfoin)의 딸인데, 싸인포인은 더비 우승마이자 삼관마인 락샌드(Rock Sand)를 배출했다. 1등급 경주 성적과 우수한 혈통 덕분에 팔라리스는 수많은 씨암말을 맞이할 수 있었다. 팔라리스가 그의 마체에서 가장 잘 흠잡히는 비판ㅡ뒤로 굽은 무릎, 길고 곧은 발목, 다소 패인 등짝까지ㅡ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그의 다른 특성들은 그런 결점들을 벌충해주었다. 이미 밝혀졌듯이 팔라리스는 분명히 스피드와 함께 넘치는 스태미너를 유전시켰는데, 중거리를 넘어선 우수성은 그가 물려줘야 했던 가장 주요한 재능이었다. 팔라리스는 이를 폭넓게 전수했고, 딸들보다 아들들에게 더 많이 전수했다. 팔라리스 혈통은 강한 기질 때문에 신중히 다뤄져야 했다. 하지만 대체로 자신들의 우수성을 보여주며,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팔라리스는 스톡웰(Stockwell)이나 허밋(Hermit), 세인트사이몬(St. Simon) 같은 19세기 챔피언들의 스타일을 잇는 씨수말은 아니다. 그가 배출한 자마들이 매년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성공한 자마가 거의 없을 때도 있었다. 또한 팔라리스는 12번째 교배 시즌이 시작한 지 2주만에 죽고 말았다. 겉으로 보이는 이런 견실하지 못한 점이 당시 팔라리스의 사망 소식을 전한 블러드스탁브리더즈리뷰(Bloodstock Breeders' Review)의 기사에서 부분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기사는 팔라리스가 씨수말로서 거둔 성과를 이런 말로 평가했다.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꽤 만족할 만한 정도다." 물론 씨수말로서의 능력이 죽은 그 시점에서 적절하게 판단될 수는 없지만 팔라리스의 경우, 그가 배출한 만나(Manna), 콜로라도(Colorado), 페어웨이(Fairway) 그리고 페어아일(Fair Isle)이 클래식 경주에서 거둔 우승들만으로도 그런 평가를 훨씬 능가한다. 1925년과 1928년 팔라리스가 차지한 리딩 사이어 타이틀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1931년 죽기 전까지 그의 주요 업적이었다. 2류로 간주되던 팔라리스의 딸들이 그를 세 번의 챔피언 외조부마로 만들 거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파로스(Pharos), 페어웨이, 식클(Sickle), 파라몬드(Pharamond) 같은 팔라리스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부마를 써러브렛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존재로 만들 왕조(王朝)를 건립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Original Article by Tony Morris kiv. 2008.0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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