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29

2005/12/29 00:52 / My Life/Diary
성적이 모두 나왔다.

국어정서법 B-
시창작실습 Ao
역사학입문 Bo
정치학개론 A+
보험론 B+
법학개론 Ao

국어정서법, 기말 과제물을 내지 않았다. B- 가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내가 왜 국문과가 됐을까 싶다. 시창작실습, 그렇게 칭찬을 해놓고 Ao 를 주다니. 역시 믿을만한 표현은 아니었다. 역사학입문, 너무 한다…. 제일 열심히 한 과목인데 Bo 라니! 이것으로 역사학에 적성은 없다. 정치학개론,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볼까 싶다. 수업도, 교수님도, 정말 좋았고, 재밌었으며 유용했다. A+ 은 4학기 동안 처음 맞아보는 학점이다. 이런 학점도 있었구만. 보험론, 중간 고사에서 실수한 것 치고 B+ 라면 양호하다. 그래도 좀 아쉽다. 유용했으나 생각보다 도움이 되진 못했다. 법학개론, 빡쎄게 공부했는데 사실 문제 하나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시험지 반을 채웠다. 출석 만발에 노력이 가상해서 준 것 같다. 그러나 법학 역시 내 적성은 아니다.

이로써 적성검사는 끝났다. 결론은 여전히 오리무중. 내 적성은 공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다른 데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모르겠다. 아무 생각이 없다. 아이히만이 유태인 학살을 스스럼 없이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무(無)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란다. 세상은 표상으로 존재하고 실상은 아무 것도 없으며 거기엔 어떤 의미도 없다….

물리학과 철학과 불교는 상당히 비슷한데(사실 모든 학문이 다 비슷하다. 아니, 다 똑같다고 할 수도 있다), 물리학에선,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를 더 파고 들어가면 쿼크까지 가게 되고 쿼크를 더 파게 되면 또 뭐가 나올지 모른다. 문제는 우리는 그렇게 작은 소립자들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과 연관되는 법칙들. 세상이 돌아가는 방법. 상대성이론이니 열역학이니 양자론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정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이다.

철학은 진실 탐구의 중심을 인간으로 끌고 온다. 사람이 왜 이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보는가. 우리가 쓰는 언어는 과연 내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가? 이 세상은 과연 인간이 살만한 곳인가?

불교(禪)는 모두를 포괄한다…. 사실 이 말은 물리학과 철학 그리고 다른 모든 학문에도 맞는 말이다. 물리학은 아직 원자를 쪼개고 있지만 좀 더 발전해 나가고 상상력이 나래를 펴서 더 이상 탐구할 게 없어질 때는 결국 이 원자가 '어디서 왔는가?', '왜 쿼크는 여기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로 갈 수 밖에 없다. 신학은 이 문제를 신의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아주 간편하게 처리해 버렸다. -- 비록 이는 명백한 순환오류지만 신학에 논리는 필요 없다. -- 철학 역시 결국엔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하는 궁극적인 문제를 풀어야 한다. 불교 선의 집대성인 벽암록에 실린 화두 가운데 하나는, 萬法歸一 一歸何處. -- 만법이 모두 하나(원자와 인간)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 이다. 이것들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는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우리가 우리 두뇌의 몇 프로 정도밖에 쓰고 있지 못하다는 말은 그래서 참이다. 두뇌는 상상 외에는 학습한 것 밖엔 떠올리지 못하지만 학습하는 것들은 모두 기존의 것들이다. 상상력 역시 기존의 학습에 상당한 근거를 두고 있기에 엄청난 제한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최초의 상대성이론, 양자론 등이 제안되었을 때 이해되지 못하고 반발을 샀던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하이젠베르크가 지적했듯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인간 자신 역시 하나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또는 그 무엇이라도) 자연을 어떤 요소와 원리로 만들었다면 인간 역시 그 모든것이 똑같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선 불교의 '오직 모를 뿐' 이라는 가르침과 통한다. 에머슨은, 내가 무엇을 이해했다는 것은 이미 나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다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먼저 깨닫고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결국 동서양과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두가 어떤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것 같다. … 재밌다. 그러나 이 하나의 점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이르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다. 그저 세상을 살 뿐이다.

샤워나 해야겠다.
2005/12/29 00:52 2005/12/29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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