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雪國)

2010/12/22 01:56 / My Life/Diary
그럴 때에 그녀의 얼굴 한가운데에 등불이 켜진 것이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지워 버릴 만큼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등불도 영상을 지워 버리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등불은 그녀의 얼굴 속으로 흘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 주지는 못했다. 차갑고 먼 빛이었다. 작은 눈동자의 언저리를 발그레하게 밝혀 주면서 마침내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지는 순간, 그녀의 눈은 땅거미의 물결 사이에 떠 있는 기묘하게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ㅡ p.15

“하지만 우리 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죠. 다만, 그것뿐이에요.”

“소꿉친구로군.”

“그래요. 하지만 따로따로 지내 왔어요. 도쿄로 팔려 갈 때, 오직 그 사람 혼자 전송해 주었어요. 가장 오래된 일기의 맨 첫머리에 그 사실이 씌어 있는 걸요.”

… “당신이 도쿄에 팔려 갈 때, 혼자서 전송해 준 사람이 아닌가? 가장 오래된 일기의 첫머리에 씌어 있는 그 사람의 최후를 전송하지 않으려는 법이 어딨어? 그 사람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당신을 기록하러 가야해. ”

“싫어요. 사람 죽는 꼴 보는 게.”

그것은 차디한 박정함으로도, 너무나 뜨거운 애정으로도 들리는 것이어서 시마무라는 망설이고 있노라니까,

“일기 같은 건 이젠 쓸 수 없어요. 태워 버리겠어요.” 하고 고마코는 중얼거리는 사이에 웬일인지 볼이 발그레 물들면서,

“당신은 참 순진한 분이네요. 순진한 분이라면 내 일기를 몽땅 부쳐 드려도 좋아요. 당신, 날 비웃지 않겠죠? 당신은 순진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ㅡ pp.63~78

그는 곤충들이 괴로워하다가 죽어 가는 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가을 날씨가 차가워짐에 따라 그의 방의 다다미 위에서 죽어가는 벌레도 매일같이 있었던 것이다. 날개가 단단한 벌레는 벌렁 나동그라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벌은 조금 기어가다가 나뒹굴고 다시 기어가다가는 쓰러졌다. 계절이 바뀌듯이 자연스럽게 멸망해 가는 조용한 죽음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니 다리나 촉각을 바르르 떨면서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벌레들의 작은 죽음의 장소로써 8조의 다다미는 대단히 넒은 것처럼 보였다.

시마무라는 주검들을 버리고자 손가락으로 집어들면서 집에 남겨 두고 온 어린 것들을 퍼뜩 생각하는 때도 있었다.

창밖의 방충망에 언제까지나 달라붙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 그것은 죽어 있어서 가랑잎처럼 흩어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손에 집어들고는 이렇게 아름답게 생겼을까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ㅡ p.118

“아냐, 당신 같은 분의 손에 걸리면, 저앤 미치광이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 짐을 가져가지 않을래요?”

“어지간히 해 두지.”

“취해서 투정을 부리는 줄 아세요? 저애가 당신 곁에서 귀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난 이 산 속에서 신세를 망쳐 버리죠. 조용히 좋은 기분으로요.” ㅡ p.127

“떨어지기 싫어서인 것도 아니고 헤어지기 싫어서인 것도 아니지만, 고마코가 자주 만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버릇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고마코가 안타깝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살아 있지 않은 듯한 가책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허전함을 바라보면서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었다. 고마코가 자신 속에 빠져 들어오는 것이 시마무라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마코의 모든 것이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시마무라의 어느 것도 고마코에게는 전해진 것 같지 않다. 고마코가 내는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 같은 소리를 시마무라는 자신의 가슴속에 눈이 내려 쌓이는 듯이 들었다. 이와 같은 시마무라의 제멋대로 구는 태도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이젠 절대로 이 온천에는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ㅡ pp.138~139

ㅡ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경룡 옮김),「설국」,『설국』, 문예출판사
2010/12/22 01:56 2010/12/22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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