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s Invitation to the Classical Fantasy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은 필자가 학교 다니던 시절, 문학도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몇몇 문학하는 친구들은 그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온갖 개폼을 다 잡았다. 카알라일이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명명한, 문학적 색채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건조하고 재미없는 경제학을 전공하던 우리들은 그들의 개폼을 점잖게 비난했다. 지나친 지적知的유희요, 감성의 낭비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우리들도 참 웃기는 구석이 많았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플레이보이 잡지 보듯 몰래 숨어서 읽어본다던가, 무미건조한 사뮤엘슨의 "경제학 원론"에 진한 감동을 느낀다던가...

제학에서 마셜이 없었다면 케인즈도 없었듯이, 한 선구적인 낭만파 시인이 없었다면 파리의 우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 시인의 이름은 루이 베르트랑. 보들레르에게 깊은 영향을 준 그의 작품은 "밤의 가스파르". 보들레르는 밤의 가스파르를 20번쯤 읽은 후 그와 비슷한 작품을 쓰고 싶은 열망에 휩싸여 파리의 우울을 썼다고 전해진다. 가난과 질병 속에서 짧고 우울한 인생을 살았던 베르트랑은 진정 선구적인 예술운동가였다. 말라르네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베르트랑을 읽어라.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이 부분은 후생경제학의 창시자 피구가 그의 제자들에게 항상 하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마셜을 읽어라.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의 가스파르는 상징주의, 혹은 초현실주의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 위대한 음악작품을 태어나게 했다. 필자가 판단컨대, 전 음악사를 통틀어 "물"을 묘사한 곡 중 두 번째로 잘 된 곡, "옹딘(Ondine)"이 바로 그것이다. 옹딘을 들으면 파도치는 물결이 보인다. 포말泡沫로 부서지는 물결은 스치듯 우리 곁을 지난다. 이윽고 화성의 아름다움이 환상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 곡은 음악사에 있어서 인상주의印象主義 작곡자로 분류되는 모리스 라벨의 작품이다. 라벨은 밤의 가스파르에 나오는 정밀한 어법을 그대로 피아노 음악으로 바꾸어, 3곡으로 이루어진 동명同名의 피아노 곡, "밤의 가스파르"를 썼다. 이 작품 중 제1곡이 옹딘이다.




● Maurice Ravel (1875~1937)

벨을 드뷔시의 그늘에 가린, 인상주의의 2인자로 보는 견해는 온당치 못하다. 그의 선율은 관능적이고 독창적이다. 드뷔시와 자세히 비교해 보면 곡의 전개방식도 딴판이다. 다만 화성이 주는 인상印象은 비슷한 경우가 있다. 인상파를 "인상"에 의해 판단하는 잘못된 관습 때문에 라벨은 부당하게도 드뷔시의 아류로 평가받는 것이다. 물론 라벨이 드뷔시로부터 받은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라벨의 유일한 현악 4중주는 드뷔시의 격려가 없었다면 라벨 자신에 의해 상당부분 고쳐졌을지도 모른다. 현대적 현악 4중주곡으로서 매우 높이 평가되는 이 작품은 원래 1903년, 파리음악원의 작곡경연대회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엄청난 혹평이 쏟아졌다. 프랑스 음악의 선구자 생 상스마저 라벨의 불협화음을 참지 못했다. 좌절에 빠져 개작改作까지도 생각하던 라벨에게 드뷔시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나의 모든 음악과 음악의 여신

에 맹세코 하는 말인데, 자네의 현악 4중주곡 중에서 어떤 부분도 바꾸지 말라..."

랑스 사람이 아닌 라벨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분류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irony)이다. 라벨의 아버지는 스위스 태생의 철도기술자였고, 어머니는 바스크 태생이었다. 라벨이 태어난 곳은 시브르라는 어촌. 프랑스령이라고는 하지만 스페인과의 접경지대여서 스페인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던 고장이었다. 비록 태어난지 3개월만에 온 가족이 파리로 이주하여 전 생애를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지만, 라벨은 시브르를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레종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그였지만, 시브르의 강변을 "모리스 라벨 강변"이라 명명하는 기념식에는 기꺼이 참석하였다. 라벨의 곡에서는 스페인적인 요소를 자주 볼 수 있다. "하바네라", "말라게냐", "볼레로", "스페인 광시곡", "스페인의 한 때" 등, 제목에서부터 스페인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 여럿 있다.

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은 역시 "볼레로"다. 화성과 리듬이 시종일관 반복되는 이 무곡舞曲은 그야말로 전세계를 폭풍과도 같이 휩쓸었다. 라벨의 볼레로는 동명同名의 스페인 전통무곡과는 사뭇 다르다. 선율에 스페인의 정취가 약간 묻어나기는 하나, 리듬이나 템포가 아주 달라서 스페인의 전통무곡 "볼레로"와는 무늬만 같다. 사실 이 곡의 템포는 무곡이라기에는 너무 느리다. 하지만 느린 템포를 일관성 있게 받쳐주는 작은 북 소리가 듣는 이들의 마음에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마치 춤을 추거나 춤추는 사람들을 보는 듯한... 작곡된 지 70년이 넘는 볼레로가 현대극이나 현대무용, 심지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라벨의 작풍作風이 얼마나 현대적이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음악적 회화다. 작품의 기저에는 "18세기 프랑스의 화가들이 상상했던 그리스의 모습"이 깔려 있다. 이 작품의 상연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발레단의 대부, 디아길레프가 런던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연비용초과를 이유로 공연에서 합창단을 빼자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라벨은 이를 신랄히 반박하였고, 그 결과 두 예술가 사이에는 서신을 통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아주 흥미있는 논쟁이었으므로 런던 타임즈에서 이를 게재하기까지 했다.

아길레프는 라벨의 또 다른 발레곡, "라 발스"의 공연을 거부함으로써, 역설적逆說的으로 음악계에 큰 이득을 남겼다. 라 발스가 그 때 발레로서 공연되었다면, 발레곡이라는 인상으로 인해 관현악곡으로서의 가치가 쉽게 드러나지 않았으리라. 이 작품을 왈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디아길레프에게 라벨은 절교를 선언했다. 절교 정도로는 성이 안 찾던지 그 사건 이후 5년 뒤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 결투를 신청하기까지 했다. 라 발스는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점점 고조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화산의 폭발처럼 분출하는, 현란하고 격렬한 모습을 담고 있다.

페라 "스페인의 한 때"는 초연부터 대성공을 거두었다. 가사가 명확하고 위트가 풍부한 이 오페라에서 라벨은 어머니를 통해 느끼고 있던 스페인의 분위기를 멋지게 살려내었다. 실로 20세기 오페라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작품이다. 마음의 고향인 스페인은 라벨의 창작열을 끊임없이 자극하였다.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에는 스페인의 정열이 배어 나온다. 비교적 초기작품인 "하바네라"에는 독특한 스페인 무곡舞曲의 리듬이 생생히 살아있다.

"어린이와 마술"은 스페인의 한 때와 상당히 대조적인 스타일의 오페라이다. 스페인의 한 때가 라벨 초기의 풍부한 화성을 품고 있다면, 어린이와 마술은 과감한 생략에 의한 간결한 선율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뮤지컬 코메디의 방식과 재즈풍의 작곡기법을 절묘하게 도입하여, 표면에 흐르는 세련미와 어린이의 단순함이라는 모티브를 무리없이 조화시키고 있다.

주 드나들던 살롱의 주인, 에드몽 드 폴리냑 대공부인에게 바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9세기 최후의 명곡중 하나이다. 한 젊은 스페인 왕녀를 위한 만가輓歌를 구상했던 라벨은 생각을 바꾸어 그녀가 생전에 궁전에서 추었을 춤, 파반느를 소재로 악상을 전개하였다. 스페인 왕녀를 생각했다고는 하나 이 작품에는 스페인적인 요소가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자신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비판적이었던 라벨은 후일 이 곡을 '빈약한 형식에 단점만이 가득하다'고 자평했다. 음악사 상 손가락에 꼽을만한 겸손한 평이다. 실제 이 곡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을 무색하게 할만큼 아름답고 시적詩的이다.

벨은 화성법 강의를 들으며 고생하는 음악도들의 꿈이요, 희망이다. 20세기 최고의 화성和聲의 대가라 일컬어지는 라벨도 화성학 과목에서 3년 동안이나 낙제를 하였으니까. 신이 만든 천재는 범인凡人의 눈으로 평가할 수 없다. 정상적인 진도는 범인凡人의 몫이다. 또한 정상적인 진도가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화성학 낙제생이 반드시 훌륭한 작곡가가 된다는 보장은 더 더욱 없지만...

자의 무지 때문인지, 라벨의 연인에 대한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예술가에게 비교적 흔한 연애사건이 없다는 것은 의외이다. 특히 모리스 라벨같이 정열의 음악을 작곡한 예술가의 경우에는... 혹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정신적 유아증상 내지 자기애自己愛 성향을 보였다고 분석한다. 필자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라벨의 음악인생은 연애를 허용하기에는 너무나 정돈되고 꽉 짜여져 있었다는...

벨이 1927년에 미국 순회연주를 갔을 때의 일이다. 이미 "랩소디 인 블루"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던 거쉰이 라벨을 방문하였다. 놀랍게도 거쉰은 라벨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라벨은 이를 주저없이 거절했다. 일류급의 거쉰이 구태여 이류급의 라벨, 즉 라벨의 아류亞流가 될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벨은 1937년에 죽었다. 그의 사인은 뇌 손상이었다. 5년 전의 자동차 사고로 인해 그는 뇌를 다쳤었다. 이 천재의 말년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표현장애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머리 속의 악상을 악보에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은 시절, 라벨은 5년간이나 로마대상에 도전했지만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은 라벨의 음악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모든 상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수훈을 거부한 후 친구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훈장을 거부한 것은 나로서는 순수한 허영이다."

딘이 물을 묘사한 작품 중 음악사 상 두 번째로 잘 된 곡이라면 첫째가는 곡은? "물의 유희"다. 폭포, 시내, 분수...모든 물이 내는 소리가 영감靈感의 원천이다. 작곡자는? 물론 라벨이다.            
 

노재봉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영본부장

jbro@kiep.go.kr

http://www.artlifeshop.com/bin/webzine.php?num=746
2007/11/22 01:21 2007/11/22 01:21
TAGS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Trackback RSS : http://www.fallight.com/rss/trackback/1268

Trackback ATOM : http://www.fallight.com/atom/trackback/1268


« Previous : 1 : ... 579 : 580 : 581 : 582 : 583 : 584 : 585 : 586 : 587 : ... 1283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