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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교수 “논개는 조작된 영웅…정치적 미화”

최근 경남 진주 의기사(義妓祠)에 있는 논개(論介) 영정의 복사본을 강제로 떼어낸 진주시민단체 회원 4명이 대법원으로부터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들은 친일 화가 이당 김은호가 영정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정을 떼어냈다. 논개를 국난 극복의 대표적인 여성 영웅,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하는 일반인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과연 논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왜장을 껴안고 죽은 것일까.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오슬로대 교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껴안고 투신한 것도, 전남 장수가 고향으로 본관은 신안 주씨라는 인적 사항도 모두 후대에 조작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박교수는 오는 31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열릴 열상고전연구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이란 논문을 통해 논개의 죽음에 수많은 정치적 미화가 곁들여졌다고 발표한다.

논개와 관련된 최고(最古)의 자료인 유몽인의 ‘어우야담(1621)’에는 논개가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것으로 쓰여있다. 유몽인은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따라 진주에 갔을 당시 들은 목격담을 기록하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논개의 죽음을 ‘유교 군주의 교화를 입어 차마 나라를 버리고 적을 따르지 못하는’ 관기의 가상한 충성심으로 파악했다.

논개의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각색은 18세기 초 진주지역 유생과 지방관료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들은 조정에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 건립을 요청하면서 그저 ‘왜군’으로 묘사되던 ‘강간범’을 ‘왜장’으로 승격시키고, 강간범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논개를 의도적으로 왜장을 유혹해 투신해 전공을 세운 여성 의사(義士)로 그려낸다. 18세기 중반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가 세워진 후에는 출신, 신분이 불분명하던 논개에게 고향과 본관이 생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전훈을 세우고 순국한 의병장 최경회(1532~93)의 천첩으로 신분도 승격됐다.

박교수는 논개의 신격화를 당시 진주가 차지하던 사회정치적인 지위와 연결지어 설명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진주는 구례, 남원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옥토로 일컬어지던 곳. 이를 바탕으로 진주의 양반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고 조선 초기만해도 중앙으로의 진출 역시 활발했다. 진주가 고향인 남명 조식(1501~72)은 이곳에서 유가의 실천정신을 중시하며 남명학파를 이끌었다. 그러나 남명학을 이념적 지주로 삼던 광해군 정권이 인조반정(1623) 이후 몰락하고 이인좌의 난(1728)의 사상적 뿌리가 남명학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주는 역모의 사상적 고향으로 찍혀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

박교수는 이 때문에 진주의 유생과 사대부들이 진주를 충절의 고향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논개의 신격화에 매달렸다고 설명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요소까지 덧씌워지면서 논개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는 것. 박교수는 논개의 행동을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논개가 설령 국가와 임금 혹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자신을 지킨 행동이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민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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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7 00:09 2007/03/2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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