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
분리의 경계선 가로지르는 어머니 몸
박주영 _ 순천향대 교수 / 영문학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현대 사상과 이론을 매우 다양하게 섭렵하여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전개한다. 크리스테바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 러시아 형식주의와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심도 있게 연구했으며, 롤랑 바르트(구조주의)·루시앙 골드만(문학이론)·레비-스트로스(사회 문화 인류학)·자크 라캉(정신분석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사상적 영향 속에서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이 갖는 특징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조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이 가부장적인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의 기본틀을 수용하면서 모성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대 어머니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전(前)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 가부장적 상징계의 아버지, 그리고 아이가 이루는 삼각구조를 토대로 한다. 전통적인 정신분석 담론이 그려내는 아버지는 엄격한 이미지를 지니며 법의 세계를 상징하고, 상대적으로 어머니는 수동적이고 침묵하는 이미지 안에서 몸을 표상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에 따르면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분리해야 하는 존재이며, 아이는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와의 분리 이후 아버지의 상징질서에 진입하여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문명을 공격적인 욕구충동(drive)의 억압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욕구충동이란 아이가 어머니의 몸과 맺은 전오이디푸스적 관계에 내재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의미한다. 아이가 문명화되는 과정은 초자아를 형성하여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이때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아버지의 중재를 통해서만 어머니의 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징적인 법을 대변하는 아버지는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는다면 거세하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남아는 이러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어머니와의 최초의 동일시를 포기하고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억압한다.

한편 여아는 이미 거세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거세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는 여아가 남아와 달리 초자아를 충분히 발달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아는 페니스를 소유하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페니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선망을 통해서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하지만, 여성은 아버지의 거세 위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성차에 따른 주체에 관한 기본적인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하여 성차에 따른 주체를 해석하는 반면, 라캉은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캉 역시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라캉은 어머니를 생물학적 욕구(need)의 영역에 한정시켜 놓고, 아이가 언어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부되어야 하는 존재로 어머니를 설정한다.

라캉에 따르면 아이에게 어머니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점차로 아이가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결핍(lack)을 경험하게 될 때 어머니의 존재는 명확해진다. 거세(결핍)의 위협―라캉은 프로이트의 거세의 위협을 욕구충족의 결핍으로 전환시켜 설명한다―속에서 아이는 결핍을 요구(demand), 즉 언어로 대체한다.

궁극적으로 아이의 욕구는 요구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욕구에 언어가 개입하게 됨에 따라 ‘욕구’와 ‘욕구를 표현하는 요구’ 사이에는 간극이 발생한다. 따라서 언어의 획득과 함께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라캉은 ‘욕망’(desire)이라고 명명한다.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위협과 금지를 통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세계로 들어선다.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서 멀어져 심연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가 들어선다. 아이가 언어를 획득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과 분리된다는 것을 뜻한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이론은 침묵하는 어머니를 복원하여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주된 관심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간과한 어머니의 위상과 의미, 다시 말해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이전의 어머니의 몸과 이후의 어머니의 몸에 관한 논의에 놓여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분리를 체험하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크리스테바가 역설하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에 진입한 후 사라지거나 상징계 밖에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가 수립한 ‘분리의 경계선’에 침범하여 그 선을 순간적으로 와해시키는 전복적인 힘으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몸은 전오이디푸스적 영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상징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상징질서를 위협하는 공포의 힘으로 존재한다. 


‘입과 항문과 성기’를 넘어서기


《공포의 힘들 : 애브젝션에 관한 에세이》에서 크리스테바는 억압된 어머니의 몸이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한 후에도 상징계를 분열시키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크리스테바는 ‘애브젝트’(abject)와 ‘애브젝션’(abjection)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통해 적합한 주체와 주체성이 형성되기 위해 어떻게 부적합하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들이 배제되어 왔는가를 분석한다.

애브젝트가 더럽고 천하며 역겨운 대상을 의미한다면, 애브젝션은 애브젝트에 대한 주체의 반응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오줌·똥·토사물·침·신체의 털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청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보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찡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토할 것 같은 메스꺼운 느낌을 주는 대상들이다. 애브젝트가 더럽고 역겨운 대상이라면, 애브젝션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육체적이면서 상징적인 어떤 느낌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애브젝션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식사 중에 누군가 배설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식욕이 저하되면서 구토증상과 함께 비위가 상하는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애브젝트와 대면한 주체가 애브젝션을 체험하면서 애브젝트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러움과 청결함의 구분은 문명형성의 기본틀로서,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문명은 불순한 근친상간적 요소들을 추방(expulsion)하는 것에 기초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문명화과정에서 배제된 애브젝트는 원초적 억압의 대상을 상징하며, 따라서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표상한다. 프로이트가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주체가 진입하는 것을 문명화과정으로 설명한다면, 라캉은 주체의 상징질서에로의 진입과정을 언어획득과정으로 설명한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가 아버지의 법(역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관계에만 머무른다면 심리적·언어적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캉 이론의 공통점은 분리의 논리에 입각하여 원시와 문명 또는 어머니의 몸과 아버지의 법에 대한 분명한 경계설정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억압되고 경계에서 제외된 ‘애브젝트’는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며 체제와 정체성을 어지럽히는 전복적인 요소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징질서가 요구하는 주체와 대상 간의 명확한 경계가 애브젝션에 의해서 흐려지고 모호해지는 것이다.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은 분리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애브젝션을 유발하는 애브젝트는 단순히 청결함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정체성·체제·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애브젝트는 그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간극에 위치한 경계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복합적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애브젝트는 상징계에서 요구하는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 질서와 무질서,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의 명확한 구분과 구별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애브젝트는 애매모호하고 안과 밖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분류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유의 표면에 생성된 얇은 막, 삶을 감염시키는 죽음을 상징하는 시체, 자생적으로 생겨나며 다른 생명체를 흡수해 버리는 감염과 오염 등은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애브젝트의 좋은 예이다. 이 밖에 썩은 고기, 추방되어야 하는 금기나 부정물(不淨物), 법을 위반하는 범죄, 기독교에서 죄라고 부르는 도덕적 위반행위도 애브젝트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애브젝트는 도덕과 윤리의 확고부동함을 뒤흔들고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의 경계를 허물며 혼돈을 자아내는, 애매모호한 대상 아닌 대상을 암시한다. 또한 애브젝트는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대한 관계를 뜻하며, 경계 또는 주변부에서 제외되어 ‘내던져진 대상’(jettisoned object)을 뜻한다. 하지만 내던져진 상태에서도 애브젝트는 상징질서를, 즉 주체와 사회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으며, 이미 수립된 경계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애브젝션은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이자 추방을 뜻한다. 애브젝션이 ‘추방하는 것’ 또는 ‘배제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자연을 상징하는 육체의 영역과 당혹·수치·죄책감·욕구 등이 작용하는 사회적·상징적 영역 간의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보편적으로 역겨움에서 나오는 구역질·토사·경련·질식 등은 이성적 사고가 수용할 수 없는 육체적 과정과 영역을 보여준다. 부패한 음식물이나 더러움·찌꺼기·오물에 대한 혐오감이 생길 때 주체가 경험하는 근육의 경련이나 구토증상은 오물이나 시궁창 같은 더러운 것들을 멀리하고 피해갈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애브젝션은 사회의 규범과 규율에 따라 단일화되고 통제되는 몸의 영역과 감각들을 가로지르는 부산물이다. 애브젝션이 몸 전체를 ‘가로지르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경계를 설정하기 모호하고 경계를 흐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애브젝션은 심리적이면서 생리적인 것으로, 그 안과 밖을 구별하기 어려운 흡수와 배설의 순환구조에 토대를 둔 아이의 구조화된 육체적 경계이다. 흡수되고 배설된 대상―음식물·오줌·똥·토사물·눈물·침―은 나중에 성감대(입·항문·눈·귀·생식기)로 전화되는 다양한 육체의 영역과 관련을 맺는다.

크리스테바는 애브젝션을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음식물과 관계 있는 구강, 배설물과 연관되는 항문, 그리고 성차(性差)와 관계가 있으며 성욕을 의미하는 생식기가 그것이다. 구강 혐오감은 애브젝션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혐오감과 관계가 있는데, 우유 표면에 생긴 얇은 막에 대한 역겨움은 구강 혐오감의 좋은 예이다.


부정(不淨)한 어머니의 몸


크리스테바는 오염된 것과 성스러운 것 사이의 경계형성과 구별짓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성서 ‘레위기’에서 묘사하는 혐오감의 논리에 주목한다. 이것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가 《순수와 위험》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는데, 크리스테바는 더글라스의 인류학적 고찰을 토대로 구강과 항문 애브젝션이 더러운 음식, 부정한 것에 대한 사회적 금기와 관계 있음을 밝힌다.

더글라스는 ‘레위기’에서 다양한 음식에 연관된 혐오감과 금기는 명백히 분류할 수 없는 동물들에 대한 금지에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고유하고 적절한’ 환경에서 자란 동물들만이 깨끗한 음식으로 분류되어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날아다니는 새, 아가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네 다리로 걷고, 새김질하고,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동물들은 ‘깨끗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다른 동물 서식처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물들과 이동의 형태가 다양한 동물들은 섭취해서는 안 되는 ‘불결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를테면 뱀은 땅이나 물속에서 미끄러지듯 기어다니기 때문에 깨끗한 것으로 분류될 수 없다. ‘깨끗한’ 것은 논리적 질서 또는 분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고, ‘불결한’ 것은 질서를 벗어나는 것, 혼합과 무질서에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분류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정의되기는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구분은 비교적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더글라스는 육체의 주변부에 내재하는 위험이 각 문화마다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의 주변부는 모든 문화에서 체계의 외연(外緣)을 이루는 경계로 작용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더글라스의 고찰이 ‘개인의 통합’과 ‘분리’의 구조로 ‘레위기’에 묘사된 혐오감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특히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물을 불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경계의 침범에 대한 사회적 공포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배설물에 관련된 개인적인 혐오감과 사회적 금기들은 경계와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에 대한 심리적·사회적 공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똥·침·정액 등 몸에 흐르는 유동체이자 배설물은 유한성에 대한 주체의 공포감을 일으키는 육체적 부산물의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이 물질적인 유기체임을 인정하기 어려운 주체에게 자신이 물질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똥은 몸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만들면서 줄곧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대립을 나타낸다. 몸의 내부에 있을 때는 존재의 조건이지만, 일단 외부로 배설되면 불결한 것과 오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각각의 주체는 배설물의 상징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배설물은 단지 주체 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 외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피고름으로 엉겨 붙은 상처, 땀이나 썩은 것에서 풍기는 달콤하고도 자극적인 부패의 냄새들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고름과 오물과 배설물들은 주체가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삶의 조건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몸을 가로지르는 오물과 배설물은 주체의 삶의 조건이기도 한 경계를 표상한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배설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주체의 몸이 경계 저 너머로 완전히 나가떨어져 시체가 될 때가지 배출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배설물에 대한 애브젝션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죽은 시체를 직면하는 것을 좋은 예로 든다. 시체는 주체의 필연적인 미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면서 죽음의 영역을 삶의 중심으로 옮겨놓기 때문에 시체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시체가 자아를 외부로부터 위협한다면, 여성의 생리혈은 자아를 내부에서 공격한다고 밝힌다. 생리혈은 사회적 금기의 결과 개인적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질적인 애브젝트이다. 여기서 크리스테바는 더글라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의 사회·문화적 고찰을 정신분석 관점에서 해석하여 모성의 위상에 대한 논의로 발전시킨다. 말하자면 생리혈은 여성과 남성 간의 구별이 아니라 남성과 어머니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생리혈은 생명의 요소를 지닌 것으로 여성에게는 다산성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휘는 현실에서 이러한 생산적이고 매혹적인 측면보다는 심리적 공포를 조장하는 혐오감을 지닌 것으로 더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생리혈에 대한 공포는 어머니와 태아의 연결, 즉 각각의 존재로 분리되지 않고 그렇다고 동일하지도 않은 두 존재의 연결을 거부하고자 하는 반응이다. 크리스테바는 ‘레위기’에서 여인의 분만과 분만에 따른 피를 ‘부정’(不淨)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남아의 할례의식은 모성의 불결함과 오염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의식이라고 지적한다. 할례의식은 다산성을 보유한 풍요로운 어머니의 ‘몸’이 모성적인 세속적 권력을 이루어 상징체계의 질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가부장적 권위의 불안감과 강박증을 드러낸다.

크리스테바의 말을 빌리면 이처럼 더럽혀진 어머니의 몸을 상기하고 그것과의 분리를 꾀함으로써 여성과 남성, 즉 개개인이 ‘깨끗하고 적합한’ 사회조직의 토대를 만들면서 점차로 법과 도덕에 종속되어가는 ‘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


생리혈을 배출하고 출산의 경험을 지닌 어머니의 몸이 오염된 육체를 표상한다면, 어머니 몸의 내부 역시 불순물로 가득 찬 곳이다. 어머니의 몸과 출산은 어머니 몸 내부의 물질들이 그 안의 육체를 분리시키는 난폭한 밀어내기라는 이미지를 통해 상기된다. 혐오감을 주는 어머니의 몸은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 태반으로부터 태어난 육체가 갖게 되는 환상이라고 크리스테바는 강조한다. 이제 어머니의 몸은 오염된 것이므로 아이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최초의 동일시를 참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어머니의 몸을 밀쳐내고자 시도한다. 자율적인 인간주체가 되기 위해서 아이는 어머니를 거부함으로써 어머니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만, 어머니와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를 애브젝트로 만들어놓음으로써―더욱 정확히는 애브젝트로 여기도록 교육됨으로써―분리를 용이하게 만든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 상징계의 경계선상에 있는 어머니의 몸은 반드시 애브젝트가 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모성을 애브젝트화하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상징계에 의해서 금지되었던 것, 또는 상징질서로 들어가기 위해서 배제시켜야 하는 것으로서의 모성설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프로이트 이론이 주장하듯 근친상간에 반대하는 오이디푸스적 금지이건, 라캉이 해석하듯이 어머니의 욕망 또는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한 금지이건, 크리스테바에게 사회를 구성하는 금지는 결국 어머니의 몸에 대한 금지이다. 어머니의 몸은 출입금지구역을 의미한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배설물을 배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브젝트도 건전한 사회를 위해 추방되어야 한다.

크리스테바는 주체에게 어머니의 몸은 공포의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경계가 불분명한 어머니의 몸은 주체가 출생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분리 불가능성을 상징하며,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몸이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가져다주는 육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주체는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몸을 증오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아이와 어머니의 분리가 모호한 어머니의 몸은 아이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육체를 암시한다.

정신분석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모성은 결코 자애롭고 온화한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가 상징질서에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하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몸이며 주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무서운 몸이다.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적 페미니즘 이론은 경계선상에 있는 전오이디프스적 어머니가 상징질서를 균열시키면서 주체의 안정성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모성의 신비화나 어머니와 아이의 낭만적인 전오이디푸스적 관계는 크리스테바의 모성 담론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크리스테바가 그려내는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는 주체의 무의식 안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고딕 어머니이다.

따라서 그녀의 모성 담론은 전오이디푸스 단계에서 강조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공생적인 의존(symbiotic dependence)에 대한 신비화나 이상화에 감추어진 허구성을 폭로한다. 상징계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경계선에 모호하게 놓인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분리영역을 가로지르는 공포의 몸이다. 어머니의 몸이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은 단일성을 추구하는 상징계의 분리논리로는 통제 불가능한 저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징질서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애브젝트 모성은 부정하고 오염된 몸으로 단일성을 위협하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암시한다.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이 표상하는 이질성은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 담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크리스테바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이나 무의식, 의미영역 밖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문화 안에서 재현되는가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몸은 상징계의 단일성 논리에서 배제된 몸으로서 의미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의 전오이디푸스적 어머니는 상징계 영역을 가로지르며, 단일성과 유사성을 거부하고 상징질서를 교란시키는 이질적인 몸이다.

《공포의 힘들》을 비롯하여, 이후에 발표된 《검은 태양》과 《사랑의 이야기》에서도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의 몸이 상징질서를 교란하기는 하지만 결코 의미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임을 강조한다. 주체의 무의식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어머니의 몸이 예술작품 안에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Copyright 월간 넥스트 All right reserved. 2005년 08월

2007/04/07 10:52 2007/04/0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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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2007/04/03 23:42 2007/04/03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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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응성하고 천사마상 번뜻 올라 죄수의 신화경은 신장을 호령하고 우수의 장성검은 일월을 희롱하는지라, 적진을 바라보고 나는 듯이 들어가 혼신이 일광 되어 가는 줄을 모를레라. 일귀를 맞아 싸워 반합이 못하여서 장성검이 번듯하며 일귀의 머리를 베어 칼 끝에 꿰어 들고 본진으로 돌아와서 천자전에 바쳐 왈,

" 이것이 최 일귀의 머리 적실하오니까. "

천자 일귀의 목을 보고 大忿하사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점점이 오리면서 원수를 치사왈,

" 짐이 불명하여 이놈의 말을 듣고 경의 부친을 門外出送하였더니 이놈이 나를 속여 만리 연경에 보냈으니 이제는 雪恥하고 경의 은혜 論之컨대 割膚奉養 부족이라 백골이 진토 되어도 그 은혜를 다 갚으리. 황태후는 어디 가고 이놈 고기 맛볼 줄을 모르는가. "

p.98


" 이 봐 백성들아, 만고역적 정 한담을 오늘날로 베려 가니 백성들도 구경하라. "

하며 소리하고 나올 적에 성중 성외 백성들이 한담 죽이러 간단 말을 듣고 남녀노소 상하 없이 그놈의 간을 내어 먹고져 하여 동편 사람은 서편을 부르고 남촌 사람은 북촌 사람을 불러 서로 찾아 골목 골목이 빈틈없이 나오며,

" 이 봐 벗님네야, 가세 가세 어서 가세. 만고역적 정 한담을 우리 원수 장군님이 사로잡아 두 팔 끊고 전후 죄목 물은 후에 백성들을 뵈이려고 장안시에 벤다니 바삐 바삐 어서 가서 그놈의 살을 베어 부모 잃은 사람은 부모 원수 갚아 주고 자식 잃은 사람은 자식 원수 갚아 주세. "

백발노구 손자 업고 紅顔少婦 자식 품고 전후 좌우 나열하여 어떤 사람은 달려들어 한담을 호령하고 어떠한 여인들은 한담의 상투 잡고 신짝 벗어 양귀 밑을 찰딱 찰딱 치며,

" 네 이놈 정 한담아, 너 아니면 내 家長이 죽었으며 내 자식이 죽을소냐. 덕택이 하해 같은 우리 원수 네 놈 목을 진중에서 베었더면 네놈 고기를 맛보지 못할 것을, 백성들을 뵈이려고 산채로 잡아내어 오늘날 벤고로, 네 고기를 나누어다가 우리 가장 혼백이나 여한 없이 갚으리라. "

수레소를 재촉하여 사지를 나눠 놓으니 장안 만민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점점이 오려 놓고 간도 내어 씹어 보고 살도 베어 먹어 보며 유원수의 높은 덕을 뉘 아니 칭송하리.

pp.133-134
2007/04/02 03:38 2007/04/02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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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교수 “논개는 조작된 영웅…정치적 미화”

최근 경남 진주 의기사(義妓祠)에 있는 논개(論介) 영정의 복사본을 강제로 떼어낸 진주시민단체 회원 4명이 대법원으로부터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들은 친일 화가 이당 김은호가 영정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정을 떼어냈다. 논개를 국난 극복의 대표적인 여성 영웅,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하는 일반인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과연 논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왜장을 껴안고 죽은 것일까.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오슬로대 교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껴안고 투신한 것도, 전남 장수가 고향으로 본관은 신안 주씨라는 인적 사항도 모두 후대에 조작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박교수는 오는 31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열릴 열상고전연구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임진왜란과 의기(義妓)전승-전쟁, 도덕, 여성’이란 논문을 통해 논개의 죽음에 수많은 정치적 미화가 곁들여졌다고 발표한다.

논개와 관련된 최고(最古)의 자료인 유몽인의 ‘어우야담(1621)’에는 논개가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것으로 쓰여있다. 유몽인은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따라 진주에 갔을 당시 들은 목격담을 기록하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논개의 죽음을 ‘유교 군주의 교화를 입어 차마 나라를 버리고 적을 따르지 못하는’ 관기의 가상한 충성심으로 파악했다.

논개의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각색은 18세기 초 진주지역 유생과 지방관료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들은 조정에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 건립을 요청하면서 그저 ‘왜군’으로 묘사되던 ‘강간범’을 ‘왜장’으로 승격시키고, 강간범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논개를 의도적으로 왜장을 유혹해 투신해 전공을 세운 여성 의사(義士)로 그려낸다. 18세기 중반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가 세워진 후에는 출신, 신분이 불분명하던 논개에게 고향과 본관이 생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전훈을 세우고 순국한 의병장 최경회(1532~93)의 천첩으로 신분도 승격됐다.

박교수는 논개의 신격화를 당시 진주가 차지하던 사회정치적인 지위와 연결지어 설명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진주는 구례, 남원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옥토로 일컬어지던 곳. 이를 바탕으로 진주의 양반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고 조선 초기만해도 중앙으로의 진출 역시 활발했다. 진주가 고향인 남명 조식(1501~72)은 이곳에서 유가의 실천정신을 중시하며 남명학파를 이끌었다. 그러나 남명학을 이념적 지주로 삼던 광해군 정권이 인조반정(1623) 이후 몰락하고 이인좌의 난(1728)의 사상적 뿌리가 남명학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주는 역모의 사상적 고향으로 찍혀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

박교수는 이 때문에 진주의 유생과 사대부들이 진주를 충절의 고향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논개의 신격화에 매달렸다고 설명한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요소까지 덧씌워지면서 논개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는 것. 박교수는 논개의 행동을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논개가 설령 국가와 임금 혹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자신을 지킨 행동이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민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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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7 00:09 2007/03/2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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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문집에는 점술로 유명한 이광의(李光義)라는 맹인 점쟁이가 소개되어 있다. 이광의는 본래 사족 출신으로 충의위(忠義衛)의 6품 관직에 있던 인물인데, 어느 날 눈병이 나서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관직을 버리고 그때부터 음양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점치는 기술이 매우 신이(神異)하여 점을 쳤다 하면 모두 들어맞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는 강원도 이천에서 병화(兵火)를 피하였는데, 번번이 왜적이 쳐들어올지 여부를 미리 점쳐 사람들을 인솔하였다. 그 때문에 목숨을 구한 자가 매우 많았으며 사람들은 이광의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평안도 중화(中和)에 있던 자신의 집 이름을 '탐원와'(探元窩)라고 했는데, 이는 '근원을 탐색하여 군생(群生)을 교화한다'(探元化群生)는 말에서 다온 것이었다. 점치는 음양학을 근원으로 생각하고 그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 담겨 잇다.

허균은 원래 점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일찍이 이광의를 여러 번 만낫지만 한번도 자신의 점괘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중화에 여행을 갔다가 이광의와 함께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때 자신의 운명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이광의는 '당신의 목숨은 마땅히 연장될 것이고 지위도 마땅히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년 여름에는 황해도 좌막(佐幕)이 될 것이니, 나는 마당히 황강(黃岡)으로 그대를 찾아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해 허균은 정말 황해도 지방의 좌막이 되었으며, 황강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이광의가 찾아와 "내 말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허균은 하도 신기하여 "아, 세상 사람들이 점술을 믿고 점치기를 즐기는 것은 모두 이렇게 해서 걸려드는 것이구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광의는 아무 해를 길하고 아무 해는 흉하며, 아무아무 해는 감사가 되고 경이(卿貳:좌찬성과 우찬성)가 된다고 술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허균은 "내 앞길은 내가 익히 알고 있소. 나는 하늘에 맡기고 명에 맡기는 사람이오. 하늘과 운명이 내게 부여한 것은 비록 그대가 예언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를 향유할 수 있소"라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의미 있는 말이다. 현실 개혁과 체제 변혁을 꿈꾸다 역적으로 몰려 최후를 맞은 허균에게 예언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p.392-393
신병주­­ㆍ노대환,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게, 개정증보판, 2005

2007/03/23 01:54 2007/03/23 01:54

2007-01-22 07:54:21 입력

[한국의 혼 樓亭 .30] 난재 채수의 상주 이안면 '쾌재정'
'神仙'채수의 은거지…안타깝다 '페인트칠'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정치 격변기 파직→재등용→유배→공신→낙향 파란만장
최초의 국문소설 가능성 '설공찬傳'썼다가 필화 겪기도
튀는 才士의 유쾌함 서린 곳 후손의 방문 기념비 그슬려

/글·사진=김신곤기자 ms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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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들판 언덕 위에 자리잡은 쾌재정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와 마을 전경을 마주하고 있다.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들판 언덕 위에 자리잡은 쾌재정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와 마을 전경을 마주하고 있다.
조선조 중종 6년(1511) 9월2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贊傳)'을 지었는데 내용은 화복이 모두 윤회(輪廻)한다는 것으로, 매우 요망한 것입니다.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에서 현혹되어 믿고서 한문으로 베끼거나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하게 합니다. 사헌부에서 마땅히 공문을 발송해 수거하겠습니다마는 혹시 수거하지 않거나 나중에 발각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노라'라고 하였다."



#'설공찬전'은 당시 정계를 경악시킨 국문소설

설공찬전이라는 이 패관(稗官)소설의 내용이 어떠하기에 이같이 조야가 발칵 뒤집힌 것일까. 이 패관소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사상계의 흐름이나 정치적인 문제 가운데 거슬리는 내용을 과감하게 언급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고, 금서(禁書)로 규정되어 불태워졌다. 그는 이 같은 필화사건으로 갖은 박해와 고된 역경을 견디어야 했다.

난재의 17세손인 채동식씨(75)는 "소설의 내용은 이승에서 잘못을 하면 저승에 가서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 설공찬전이 최근 향토학계 등에서 조선 초기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소설을 쓴 주인공은 바로 난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이다.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의 들판과 동네 및 강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쾌재정(快哉亭)은 그가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유유자적하며 음영(吟詠)하던 곳이다.

그의 호인 난재(懶齋)라는 글자의 난(懶)은 독음(讀音)이 '게으르다'는 의미의 '나'이지만 본음이 '난'이므로 후손들은 '난'으로 표기하고 있다.



#쾌재정은 난재가 이상향을 추구했던 곳

그가 거처한 쾌재정 원운(原韻)의 시를 보면 성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늙은 내 나이 금년에 예순여섯(老我年今六十六), 지난일 생각하니 생각이 아득하다(因思往事意茫然). 소년 시절에는 재예(才藝)로 대적할 자 없기를 기약하였고(少年才藝期無敵), 중년에는 공명이 또한 홀로 훌륭하였다(中歲功名亦獨賢).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탄식에 묶여 매였고(光陰滾滾繩歎繫), 청운의 길 아득한데 말은 달리지 않는구나(雲路悠悠馬不前). 어찌하면 티끌세상의 일 다 벗어던지고(何似盡抛塵世事), 봉래산 정상의 신선과 짝이 될 수 있을까(蓬萊頂上伴神仙).



이 시의 기상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다른 시들의 겸손과 자수(自修)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그만큼 그의 성품은 독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본관은 인천이다. 세종조에서 중종조까지 살았던 문신으로, 중종반정 공신이다. 11세 무렵 지은 시문을 점필재(畢齋) 김종직이 읽고 찬탄하기를 "훗날 세상을 울릴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他日, 鳴世者, 必此子也)"라고 찬탄하였다.

세조 14년, 20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성종 1년, 22세에는 예문관수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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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식 전 국회의장의 방문 기념비석이 정자 입구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3
채문식 전 국회의장의 방문 기념비석이 정자 입구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되고 이어 홍문관교리, 지평,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30세에는 응교(應敎)에 임명되어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당하였다.

대사헌 시절에는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의 구제를 위해 눈물로 아뢰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서용(敍用)되어 하정사(賀正使),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자청하여 무오사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후 평안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다가, 갑자사화 때 예전에 정희대비가 언문으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의 빌미가 되어 곤장을 맞고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윽고 중종반정이 일자 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후 후배들과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부끄러워하여 벼슬을 버리고 상주로 낙향하니 58세였다.



#진정한 즐거움을 추구한 博學聰明의 대선비

이듬해 쾌재정을 짓고 은거하여 독서하며 풍류로 여생을 보내다가 67세 되던 해 겨울, 자녀들에게 명하여 자리를 바르게 깔도록 한 후 편안히 운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세상 밖에서 살고 간 신선'이라고 칭송한 말이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난재는 점필재에게 종유(從遊)하였고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면서 요동의 명사였던 소규(邵圭)와 사귀었으나, 새로이 등장하는 신진사류와는 화합을 잘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난재는 총명한 신동으로 독서량이 대단히 많았던 인물이었다. 천하의 도서와 산경(山經), 지지(地誌), 패관소설 등을 모조리 독파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음악과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쾌활하고 거친 행동으로 당시 학자들의 대열에서는 조금 튀는 재사였던 걸로 보인다.

난재가 거처하던 쾌재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180여년 후 후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해 왔지만 건축물 전체에 페인트칠을 해놓아 아까운 정자를 훼손한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더욱이 정자 입구에는 후손인 채문식 전 국회의장이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덩그렇게 놓여있어 정자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분위기를 흐려놓고 있다.

이미(李)가 지은 쾌재정 중수 기문을 보면 난재공의 유쾌했던 삶의 궤적을 느껴볼 수 있다.

'…대개 천하의 즐거움은 마음이 유쾌함만한 것이 없다. 인생백년 가운데 자신을 확립하고 행동을 절제함에 한 가지라도 한스러울 만한 것이 없어야 바야흐로 마음이 유쾌할 것이다. 부귀영화에 뛰어들고 이익을 쫓으며 죽는 날까지 쉬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비록 한때는 스스로 즐거울 것이나 허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부끄러움을 탄식할 여가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유쾌함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난재공이 '쾌재'로 정자이름을 지은 것을 유추하여 보면 난재공의 유쾌함이 어찌 다만 산수의 승경(勝景)뿐이었겠는가….'

쾌재정에서 한 시대를 고민하고 거칠게 부딪히면서 격렬하게 살다간 난재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매일매일 고뇌하며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난재의 저서로는 난재집 두 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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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2 05:54 2007/03/22 05:54

호민론(豪民論)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오직 백성뿐

허균1)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때에 어떤 큰 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이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항민들도 또한 제 살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 때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났는데,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살려고 한 죄의 대가이며, 호민 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 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에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商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삼공2)할 정도였다.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은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으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키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말보다 더 심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기주. 양주3)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시위와 바퀴를 고친다면, 4)오히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소부부고》5) 권 11


조선 후기의 학자 허균이 한문으로 지은 글이다. 이 글에서 작자는 백성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고 있다. 항민은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이 그냥 정해진 법을 따라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원민은 끝없는 수탈을 못 이겨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호민은 남모르게 딴마음을 품고 있다가 틈새를 엿보아 시기가 오면 들고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작자는 이 세 가지 백성 가운데 호민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항민이나 원민은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지만, 호민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민은 농민 봉기의 기폭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민이 반기를 들고일어나면, 단순히 호민들의 봉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안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서게 된다.

그는 이 같은 실례를 중국의 역사에서 빌어다 제시하고 있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이 원인이었으며, 당나라도 왕선지와 황소가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는데 끝내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들이 모두 호민으로서 학정의 틈을 노리고 봉기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작자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을 진단하고는 호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였다. 우리 조선의 경우를 보면 백성이 내는 세금의 대부분이 간사한 자에게 흩어지므로, 무슨 일이 있으면 한 해에 두 번도 걷는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망은 고려 때보다도 더 심하다. 그런데도 위에 있는 사람들은 태평스럽게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한다. 그러므로 호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옛날의 견훤과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난을 일으키고, 백성들이 이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백성의 성격을 세 부류로 나누어 현실을 진단하고, 예견되는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한 이 글은, 결국 위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운 형세를 바로 알고 정치를 바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기성의 권위에 맞서 새로운 사상과 개혁의 이론을 내세운 허균의 비판적 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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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균(許筠 1569~1618) : 조선 후기의 문인, 정치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문학세가에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좌참찬에까지 이르렀다. 서얼 출신인 서양갑(徐羊甲) 등의 반역에 가담한 것이 탄로나 역적으로 처형되었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요 시인이었으며, 특히 시에 대한 안목이 높았다. 문집으로 《성소부부고》가 있고, 시화 집으로는《성수시화(惺瘦詩話)》등이 있다.

2) 삼공(三空) : 흉년든 탓으로 사당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서당에 학생이 없이 텅비고, 뜰에 개가 얼씬거리지 않는 것을 말함. 즉 관청에 물자가 달림.

3) 기주(夔州)·양주(梁州) : 진 승과 오광, 왕선지와 황소가 난을 일으켰던 지명명방.

4) 시위와.......고친다면, : 느슨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놓고, 망가진 바퀴를 바고 고친다는 뜻으로, 정치를 올바로 함을 상징함.

5) 《성소부부고》: 허균이 지은 시문집. 광해군 3년 허균이 직접 정리한 것으로 모두 43권 12책.

2007/03/22 02:37 2007/03/22 02:37

 

[역사산책]향응에서 육체적·정신적 학대까지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온몸을 숯검댕으로 만든 뒤 그 씻은 물 먹기, 사모관대를 한 채 연못에 뛰어들어 고기잡이 흉내내기, 얼굴에 오물을 발라 광대놀음 하기 등 조선의 과거급제자들은 신참 신고식에서 정신적·육체적 가학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신고식 비용도 모두 신참이 부담했으니 요즘보다 더 심했다 할 것이다.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참·고참이란 용어는 비단 군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학교나 직장 등 어느 조직사회든 반드시 신참, 즉 새내기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조직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고참 즉 선임자들은 세심하게 보살펴주어야 한다.

새내기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신고식이란 명분으로 새내기들에게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따르는 통과의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고통이 따르는 신고식 문화는 군대는 물론이요, 대학가에서도 성행하는 실정이다. 군대 신고식은 흔히 ‘얼차려’라는 이름으로 정신·육체에 고통을 주는 것으로 산만한 정신을 다잡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학가의 신고식은 주로 강제로 술을 먹이는 등의 방법으로 선·후배 간 일체감과 소속감 혹은 상하 규율을 불어넣는 것이라 한다. 범죄조직에서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통해 동료 의식을 고취하는 것도 신고식과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신고식 문화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 있다.

인류학 내지 민속학에서는 신고식을 통과의례(通過儀禮)로 이해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주네프는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장소, 지위, 신분, 연령 등을 거치면서 치르는 갖가지 의식을 통과의례라고 설명한다. 즉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거치는 것이 통과의례이며, 여기에 수반하는 시련과 고통을 ‘의례적 죽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과의례의 ‘가상 죽임 의식’이 죽임으로 연결돼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커다란 바가지에 술을 가득 담아 먹이는 대학가의 사발주 혹은 육체적 가학이 담긴 통과의례 때문에 귀한 생명을 잃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필자는 조선시대의 가혹한 신참 신고식 ‘면신례(免新禮)’를 떠올리곤 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신고식 문화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신고식 문화를 일제시대 군국주의의 잔재였다거나 광복 이후 군사문화의 한 단면으로 이해하려는 이가 많은데, 실제로 신고식 문화는 조선시대 관료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매우 성행하던 풍속으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권세가 자제의 방자한 태도 꺾기 위한 신고식


조선시대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나 선비로 있다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를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입 관원에 대한 구관원의 얼차려 문화인 셈이다.

조선의 신참들은 오늘날의 새내기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은 신참의 신고식 비용을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면신례를 해야 했고,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해야 했다.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면신례로 인한 폐단이 많자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채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면신례의 역사는 상당히 깊다. 조선이 건국된 지 몇 달이 지난 태조 1년(1392) 11월 도평의사사에서는 감찰(監察)·봉례(奉禮)·삼관(三館)·삼도감(三都監)·내시(內侍)·다방(茶房) 등의 관직에 신참(新參)이 들어갈 때 잡스럽게 희롱하는 폐단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신참 길들이기란 명목의 신고식을 말함은 물론이다.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거론된 문제임을 보아,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듯하다.

실제로 면신례의 폐해를 지적한 기록을 보면, 연산군 6년(1500) 8월 의정부에서는 면신례 폐단에 대해 고려조의 쇠망(衰亡)한 세상 풍속이 본조(本朝)에 전해 내려와서 마침내 폐풍(弊風)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종 36년(1541) 12월 사헌부 상소에서는 고려 말 조정이 혼탁한 시기에 처음 관직에 나간 권세가 자제들의 교만하고 방자한 기세를 꺾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면신례는 중국의 당·송은 물론이고 오랑캐 나라인 원나라에서도 없던 것이라 하니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취임을 위한 통과의례인 면신례란 용어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성종 6년(1475)경이다. 물론 그 이전에 신참에 대한 신고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면신례란 용어가 정착되지 않았을 뿐인데, 그 이전에는 허참(許參)이라 불리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물론 허참, 면신의 예(禮)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참 통과의례에서 일정 기간을 두고 계속 이어진 두 행사였다.

즉 허참례란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구관원(舊官員)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예(禮)를 행하는 자리다. 이로부터 서로 고참과 신참의 상종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허참이라고 하며, 다시 10여 일 뒤 면신례(免新禮)를 행해야 신래를 면해 비로소 구관원과 동석할 수 있었다.

관직에 처음 등용된 신참의 행보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어떻게 신고식을 치르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에는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유가(遊街)에 나서는 풍속이 있었다. 유가란 자신의 과거 급제를 세상에 알리고 이를 자축하는 행사로, 급제한 자가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나팔과 꽹과리를 동원해 마을을 도는 풍속이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과 흡사한 광경이다. 급제자들이 유가할 때면 으레 수행하는 종들이 행인들에게 비키라고 소리를 질러 길을 튼다. 급제자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자들이 길을 갈 때면 당연히 따르는 절차였다.

그러나 과거급제자는 예문관·성균관·교서관의 삼관이나 훈련원에 재직중인 고참들에게 먼저 경하(敬賀)하는 만찬을 베풀어 신고를 한 후에야 유가를 행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통상 문과나 무과에 급제하면 바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수습을 거친 뒤 벼슬을 받았다. 무과의 경우 훈련원에 배속되고, 문과의 경우 삼관(예문관·성균관·교서관) 혹은 사관(승문원 추가)에 나누어 배속됐다.

예문관은 역사를 담당하는 한림들이 근무하는 곳이요, 성균관은 당대 최고 교육기관이며, 교서관은 서적을 간행하는 곳이요,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곳이다. 대개 관직에 바로 서용되는 장원급제자를 제외한 문과급제자들을 능력과 나이를 고려해 이 네 관청, 즉 사관에 배치하고는 실무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이를 분관(分館)이라 한다. 이때 실무를 익히는 자들에게 주어진 명칭은 권지(權知)니, 오늘날 시보(試補) 내지 임시 대기직인 셈이다.

이때부터 문과의 신급제자는 삼관(혹은 사관)의 선배에게 신고 절차를 밟아야 했다. 선배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거나 예를 다하지 않을 때는 유가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신참의 유가는 일반적인 대감 행차와는 달리 선진자(先進者; 선배 관료)를 만나면 말에서 즉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했다.

후배 돈 우려내는 면신례


삼관에 골고루 배치된 과거 급제자는 배속된 부서의 고참이나 선생(당해관서 관직 역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인사를 다녀야 한다. 이때 신참은 자신의 신상을 적은 자지(刺紙; 일종의 명함 종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 한 번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한테만 가는 것도 아니니 이는 고역이었다.

이때 자지가 두껍고 큰 것이 아니면 안 되는데, 대개 무명 한 필로 자지 석 장을 겨우 바꿀 수 있었으니 그 비용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새내기들의 경제적 부담이 과도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의 신고식은 좀더 합리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신고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새내기를 맞이하는 고참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선의 신참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러한 행위를 투자(投刺) 혹은 회자(回刺)라 칭하며 이를 통하여 선배 관원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통 투자는 허참이나 면신의 예를 행하는 기간에 같이 했다.

선배들은 인사 온 신래들로부터 우려낸 돈으로 면신례와는 상관 없는 훗날의 잔치에 대비한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교서관에서 주관하는 홍도연(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열리는 장미연(薔薇宴),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취하는 벽송연(碧松宴)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의 잔치는 원래 삼관을 중히 여긴 국왕이 가끔 내려주는 음식으로 하던 것이었으나, 점차 신래를 침학하는 것으로 변질했던 것이다.

한편 본격적인 신고식인 허참례(許參禮)나 면신례(免新禮)는 반드시 고참 선배들에게 음식물을 접대해야 했다.

음식물 장만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이를 ‘징구(徵求)’라 하는데, 셈은 3에서 시작된다. 이를 테면 청주가 세 병이면 무슨 물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과일·나물이 세 반(盤) 등등 무릇 백 가지 먹을 만한 것을 이 숫자에 맞추어야 했다. 만일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견책이 따랐다.

이렇게 다섯 차례를 한 뒤에 다시 5의 수로 음식을 준비하여 세 차례 잔치를 더 벌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7의 수로 시작하여 9의 수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최종 절차인 허참연(許參宴)과 면신연(免新宴)을 따로 해야 하니 여기에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부잣집 자제가 아니면 살림을 다 기울여 없앤다 해도 그 비용을 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에게 빌려서라도 감당하던 것이 당시 실정이다.

허참·면신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집단의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석에도 끼워주지 않고 왕따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또 허참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당해관서 관원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 전의 근무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삼관으로 분관된 급제자들의 승진은 반드시 허참 순서에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이 관례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바로 위 고참이 병이 나 근무일수를 채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가 승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는 법전에도 명시돼 있는데, 이를 차차천전(次次遷轉)이라 한다. 관료제가 발달한 조선은 그만큼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허참한 순서대로 천전(遷轉; 다른 관직으로 승진하여 옮겨감)되자, 급제자들이 성균관·교서관 권지로 분관돼 허참례를 행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 관직을 기다리는 폐단이 야기될 정도였다.

예문관이 제일 심해


문과 급제자가 분관되는 사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중에서도 예문관이 면신례 기율이 가장 셌다. ‘징구’가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일 뿐만 아니라, 면신연과 허참연도 승문원에 비해 배나 된다. 또 다른 관에는 없는 중일연(中日宴)이란 것이 있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다. 이런 술판이 벌어지면, 마시고 취하면서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목청껏 노래하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관례였다.

성종 6년 예문관 검열(정9품)에 제수된 조위(曺偉)가 행한 면신례를 당시 실록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가관이다. 유밀과에다 소까지 잡아 잔치를 벌이는데, 예문관 참하관인 선배 검열과 봉교(7품)·대교(8품) 등 현직 한림은 물론이고 이미 다른 관직으로 승진해 간 한림 역임자가 선생(先生) 자격으로 참여한 뒤 기생까지 동원하여 풍악을 울리면서 흥건히 취하게 놀았다.

면신례를 주관하는 상관장(上官長)은 상석에 앉고 초청된 선생들은 정승일지라도 여러 관원 사이에 끼여 앉는다. 그리고 각각 기녀 한 사람씩 끼고 앉는데, 신래와 짝을 이루는 기생을 흑신래(黑新來)라 이름한다. 상관장은 양쪽에 기생 둘을 앉힌 채 잔을 돌리고 춤추며 신래를 희롱하는 갖가지 놀이를 벌인다. 이러한 한림들의 잔치가 동이 틀 무렵 끝나면 반드시 고려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노래가 곁들여진다. 한림별곡이 그것인데, 고려시대 한림들이 부르던 노래로, ‘고려사악지’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위의 면신연에 흥을 돋우기 위해 참석한 기생이 매를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급기야 이 사건은 임금에게 보고됐는데,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에 성종이 보인 태도도 흥미롭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은 당연히 기생이 죽은 일이지만 또 하나는, 농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 사사로운 도살은 금지하던 농경사회에서 신참인 조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소를 잡아 음식을 장만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면신례의 폐단이 매우 컸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성종은 면신례가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임을 인정하고 불문에 부쳐버렸다. 단지 가뭄으로 인해 금주령이 내려진 시기에, 더구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사관들이 금주법을 어겼다는 것만 가볍게 처벌하고 넘어갔다. 또 성종은 재위 8년에 친히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석전(釋奠)을 행한 뒤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한 적이 있는데, 사관(四館)에 명하여 신래(新來)를 불러 직접 희학(戱謔)할 정도였다. 이미 면신례가 친숙한 풍속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정신적·육체적 가학


아무튼 면신례에는 신래를 괴롭히는 갖가지 방법의 침학(侵虐)과 희학(戱謔)이 동원된다. 침학에는 주로 과도한 경제적 부담이 따르며, 희학에는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수반된다. 앞에서 말한 징구는 침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 밖에 초도(初度)라는 게 있는데, 신참에게 강제로 숙직을 맡기는 것으로 열흘에서 한달 가량 연속해서 근무해야 하는 고역이다.

희학은 연회 도중에 벌주와 함께 진행된다. 즉석에서 간단한 게임이나 내기를 하는데, 고참이 질 경우에는 벌주가 없지만 신참이 지면 벌주와 함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때 신참은 자신을 난잡한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끔찍한 신고식을 참아야 한다.

이는 조선조 성종 당시 대학자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에 그 실상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예를 들어 신참의 의관과 몸을 숯검댕으로 만드는 ‘거미잡이’라는 게 있다. 이는 신참에게 시커먼 부엌 벽에서 양 손으로 거미잡이 시늉을 시킨 뒤 손 씻은 물을 강제로 먹이는 것이다. 또 방 안에 긴 서까래 같은 나무를 두고 들게 하는 경홀(擎忽)에서 신참이 들지 못하면 무릎을 꿇게 해 선배들이 차례로 구타하기도 하고, 사모관대를 한 채로 연못에 집어넣어 고기잡이 흉내를 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하는 ‘삼천삼백’, 관련 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되 바로 읽어내리는 ‘순함(順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하는 ‘역함(逆銜)’,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오물을 칠하게 하는 등 신참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한다. 겨울에는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볕을 쬐게 하는 육체적 가학은 물론이요,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까지 하는 등 군사정권하의 군대 신고식을 방불케 하는 장면도 벌어진다.

이렇게 갖은 방법으로 신래들을 침학(侵虐)하고 괴롭히는 습속이 워낙 다양하여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 60에 처한다”는 규정이 조선의 법률책인 ‘경국대전’에 실릴 정도라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이 집권한 이후에도 몇 차례 신참을 희학(戱謔)하는 행위를 금하는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신참을 침학하는 방법 또한 난침(亂侵), 간방(看訪), 허참(許參), 복지(伏地)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 세종 5년 성균관·교서관 박사 이하 참하관들이 신래를 불러 잡희(雜戱)를 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죽음을 부른 신고식


그러나 이런 왕명이 있는데도 조선의 신고식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참들이 육체적·정신적 가학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문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승문원에서 신고식을 치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윤화(鄭允和)라는 신래가 죽자 사헌부 지평 유성원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쉬쉬하면서 풍문으로 떠돌던 소문이어서 사헌부가 쉽사리 탄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덮어둘 사안도 아니었다.

당시 정윤화는 승문원에 배속된 다른 9명의 신참과 함께 신고식에 참여했는데, 마침 종기가 나 고생하던 차에 면신례로 인한 피로가 겹쳐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승문원 박사(정7품) 강폭(姜幅)·신자교(申子橋), 정자(정9품) 신의경(辛義卿)은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당하고, 저작(정8품) 윤필상(尹弼商), 부정자(종9품) 권제(權悌)는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단지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신고식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비 신분에서 관료로 초입사(初入仕)하는 과정의 통과의례에 이처럼 가혹한 방법이 동원돼 사람 목숨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신래를 갖가지 방법으로 골탕먹이는 풍속은 분명 성리학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면신례는 관직에 초입사(初入仕)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다른 관직으로 옮겨가거나 승진해 갈 경우에도 반드시 치르는 것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관직이 이조·병조 낭관(4, 5품)이나 사헌부 감찰(6품)인데, 이런 관직으로 진출할 때는 처음 관직에 들어설 때와 같이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조·병조의 낭관은 각기 문·무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고, 감찰은 백관을 규찰하는 등 당시 관료사회에서는 핵심 요직이었다. 요직이니만큼 선·후배간 규율이 엄격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삼관의 신고식에 버금가는 면신례를 치러야 했다.

예를 들어 사헌부 감찰(6품)이 되어 새로 온 자는 관직에 제수된 이후 비록 수십 일이 지났다 하더라도 면신례를 할 때까지 반드시 날마다 음식을 베풀어 선생(先生)·구주(舊住)를 기다려야 했다. 선생·구주가 된 자는 번갈아 드나드니 잔치하고 맞이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예 면신연(免新宴)은 이 수(數)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또 새로 감찰이 된 자를 신귀(新鬼)라 부르며 희롱하고, 또 몽둥이로 때리는 등 육체적인 가학도 허다했다.

이러한 형식의 면신례가 다른 관직에도 파급되더니, 급기야 그들이 부리는 아전이나 종들도 신참이 들어오면 면신례를 치르게 하는 등 조선사회가 신고식 천지로 변하게 되었다.

또 아직 관직에 들어서지 못한 생원·진사들에게까지 신고식 문화가 파급돼 새로 생원·진사가 된 자에게 침학하는 풍속도 생겼다. 이를 접방례(接房禮)라 했는데, 음식을 차리고 주악(奏樂)을 동원하는 방법이 면신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참을 따지는 방법


조선 관료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먼저 관직에 들어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뜻을 굽혀 예를 갖추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는 신·구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위계질서를 잡는 관료주의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같은 과에 급제한 동기생들은 동방(同榜) 급제라 하여 매우 돈독한 사이가 된다.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철저히 지키는 유교 사회에서도 동기생끼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가 됨은 물론이다. 이 역시 동기생과 선·후배를 따져야 하는, 위계질서가 굳건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 고시파들이 법원이나 검찰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철저히 따지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건도 있었다. 성종 8년 3월에 문과에 급제한 이세좌는 당연히 유가(遊街) 행차에 나섰다. 급제는 그때 했지만, 그는 이미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으로 있었다. 이세좌의 유가 행차에는 당연히 사간원 나장들이 따라 나섰다. 그런데 앞장서서 벽제(除; 거리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행위)하던 나장들이 길 가던 주부(主簿; 종6품) 최융(崔融) 등 몇 사람이 행차 앞을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종자들의 머리를 휘어잡고 욕을 보이고 말았다.

이는 이세좌의 당시 관직이 대사간(정3품)이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대사간이란 간쟁을 맡은 사간원의 장관이다. 조선조 관료사회에서는 간쟁과 탄핵을 맡은 대간이 길을 갈 때면 정승도 말에서 내려 예우해주어야 한다.

이세좌가 급제하기도 전에 이런 관직을 차지한 것은 그의 가문이 번성한 덕분이었다. 올림픽공원이 있는 둔촌동 일대에서 살던 광주 이씨 집안은 당시 최고 문벌임을 자랑했는데, 둔촌동이라는 이름 역시 그의 증조할아버지 호인 둔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무튼 이세좌는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문음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누차 승진을 거듭하다가 이제사 급제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시는 종들도 종6품의 주부들을 눈 아래로 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초임 급제자들이 몰려 있는 사관(四館)이 상급 관청인 예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나라 풍속에 처음 과거에 오른 자는 비록 당상관을 역임한 자라 할지라도 유가하는 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예를 행해야 하는 것이 관례인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과 선배에게 오히려 행패를 부렸으니 사관에서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관에 들어온 권지들은 근무나 승진에서 선배와 후배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런 판국에 이세좌는 당상관이란 이유로 사관에 분관되지도 않은 채, 유가 도중 자기보다 하급 관료의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모욕을 주었으니, 사관 소속 관료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사관에서 올린 첩정(牒呈)을 접수한 예조에서도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어서, 성종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도 결국 주무부처인 형조로 넘겨 이세좌를 국문(鞫問)하게 했는데, 대신들의 의견 또한 엇갈렸다.

이세좌는 우의정 이인손의 손자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큰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5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여 당대 최고 관직에 있으니, 당시 어느 가문도 무시할 수 없는 명문거족이었다. 이세좌 문제를 놓고 심의하던 대신 중에는 그의 백부와 숙부들도 있었으나, 이들 역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세좌의 숙부 이극증(李克增)과 이극돈(李克墩)은 “비록 신래(新來)지만, 간관이므로 벽제하는 것이 마땅한데 성내는 자가 잘못이다”고 말했다. 간쟁을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간관들에게 그만한 예우를 해주기 위해 비록 하급직 간관의 행차라도 마주친 정승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관례인데, 간관의 수장인 대사간 정도의 행차라면 벽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신래가 아닌 대사간이라는 직위를 내세운 것이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신진세력이 날뛰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원로 대신이 많았기에 이 주장이 먹혀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백부 이극배(李克培)는 이세좌의 잘못을 지적했다. 신래라는 위치에 무게를 둔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을 밝히는 사람, 조카의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이극배였던 것이다. 5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품을 바탕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는 동안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던 그다.

결국 형조에서 법조문을 그대로 적용하여 볼기 40대를 쳐야 한다는 안을 올리자, 성종은 이세좌의 벼슬을 낮춰 교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10여 일 이후의 실록 기사에 그가 대사간 직책을 계속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그의 좌천은 얼마 안 돼 원위치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신참과 고참을 따지기 모호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가 나중에야 급제하는 경우가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장관도 하급관료에게 신고식해야


성종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성종 25년(1494)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변종인(卞宗仁)에게 도총관 자리를 제수하였다. 그는 무신으로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워 공조참판에 올랐고, 그 이후로도 주로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맡아 다년간 한양을 떠나 있었다. 이에 내심 불만을 가진 그의 아내가 도성 안에 근무할 수 있도록 상언(上言)을 올린 것이 받아들여졌다.

변방절도사는 종2품 무관이니, 행정계통의 관찰사와 맞먹는 자리다. 그리고 정2품 도총관은 수도를 지키는 오위도총부의 최고 자리니, 무반으로는 실질적인 총지휘관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변종인은 도총관으로 부임한 뒤 군사들의 훈련상황을 점검하려고 훈련원에 갔다가 허참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휘하 관원들이 지영(祗迎; 아랫관원이 윗관원을 맞이하는 예)하지도 않고 이름을 부르면서 욕을 하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변종인이 신고식을 생략하자, 새까만 후배가 지영은 고사하고 원로 대신인 그를 “어이! 신참” 하고 불러댄 것이다.

장관 길들이기


모욕당한 변종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새까만 후배인 훈련원의 권지들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자리를 더 이상 보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지란 급제한 뒤 수습으로 업무를 익히는 자 아닌가. 임금께 아뢰고 스스로 피혐(避嫌 ; 일신상의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허참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계급의 높낮이를 떠나 그 부서에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나를 따지는 풍속인 것이다. 오늘날 장관이 부임한 이후 직업관료들에게 왕따당하고 임기 내내 휘둘리다 그만두는 사례가 많듯이, 장관 길들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찮은 비관(卑官)들이 재상을 욕보인 일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던 성종은 훈련원 권지 이극달(李克達) 등 관련자 14명을 불러 조사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무과 출신인(武科出身人)은 당상·당하를 묻지 않고 모두 주효(酒肴)를 판비(辦備)하여 본원(本院)의 남행(南行)과 서로 만나본 연후에야 선생안(先生案)에 제명(題名)하고, 선생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비록 당상이라도 지영(祇迎)하지 않고, 신래(新來)의 이름을 부르니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선생안’이란 역대 관직 역임자 명단을 묶은 책이다. 계급에 상관없이 신참자는 먼저 근무하던 자들에게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한턱을 써야 선생안에 이름을 올려주는 동시에 선생이라 일컫고, 지영(祗迎)의 예를 하게 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새로 부임하는 자가 술과 안주로 대접해야 하는 모임을 상회례(相會禮)라고 칭한다. 이 역시 면신례의 일종이다. 결국 성종은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관련자들을 추국(推鞫)하여 보고하도록 사헌부에 지시하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이는 조선시대 신참의 신고식이 갓 들어온 신임관료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 전근해 오는 기존 관직자들도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한 부처의 장으로 취임하여도 신고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었으니 무서운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업무 연속성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꼭 필요한 부서에는 구임(久任)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여 전문성을 높인 것이 조선이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업무에 익숙한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하다. 그러나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부정과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듯 관료제도에도 장·단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허참례 역시 관료제도를 운영하는 데 엄연한 하나의 풍속으로 존재했고,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오늘날까지 그 남아 있다.

면신례를 거부한 간 큰 신참들


그런데 조선의 엄격한 신고식 규율에 정면으로 대든 신참들도 있다. 요즘 말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신참이었던 것이다.

태종 17년(1417) 문과에 올라 평안감사를 지낸 박이창은 기개가 있고 활달하여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또한 강직하면서도 해학이 있었다. 젊어서 학문에 힘쓰지 않았지만, 고향 상주에서 열린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마음을 달리 먹고 공부를 하였다. 이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니, 예문관으로 배속받았다.

사관인 한림이 근무하는 예문관은 신고식이 세기로 이름난 곳이니, 박이창의 성격으로 선배들에게 여러 번 꾸짖음을 듣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50일이 지나도록 선배들이 면신해 주지 않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이 앉아야 할 좌석에 앉아버렸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자허면신(自許免新)’이라 일컬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배속된 이율곡도 면신례 자리에서 고참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직에 바로 나가지 못하고 파직된 적이 있다. 이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이 무리한 시속이나 이미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홀로 모면할 일도 아니구나 하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이런 악연이 있는 율곡은 선조조에 들어와 관을 부수고 옷을 찢으면서 진흙 속에 굴리는 면신례의 가혹한 폐단을 강력하게 제기했고 그 풍습을 중지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은 조선 초기부터 늘 있었지만 면신례는 없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것이니,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는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같이하던 박태한·최창대 등과 함께 급제하면 신래의 행동에 절대로 응하지 말자고 굳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숙종 20년(1694) 별시에 세 사람은 동반 급제하였다.

그런데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박태한이 고집불통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애당초 부르는 자가 없었다. 또 장원급제한 이광좌는 좌주(座主; 고시를 맡은 대제학을 좌주라 하고 합격생을 문생이라 하여, 좌주문생 관계가 사제간 이상으로 돈독하였음)인 정승 남구만이 불렀지만 끝내 불응하니 남구만도 웃으며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창대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면신례란 통과의례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박태한에게 서신으로 “귀신 같은 행동을 이미 면하지 못했고, 조롱하고 장난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남을 따라 같은 행동에 휩쓸린 것이 많았으니, 형과 더불어 거취를 같이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고 적어 보내기도 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사냥에서 순위를 재는 일종의 행사)을 하면 자질구레하지만 풍습이기에 공자도 따랐다는 고사가 있는데, 당시 면신례를 보는 사대부들의 눈은 공자의 엽각과 다름없었다. 퇴계의 생각도 이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관례를 무시한 간 큰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흉내낼 수는 없는 것이었고, 또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아간 것도 아니었다.

면신례의 사회사적 의미


아무튼 조선의 신래들은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면, 한층 성숙한 조직원이 돼 일체감과 소속감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들만이 가지는 엘리트의식 속에서도 철저하리만큼 동료애를 발휘하는 동료의식이 내재하고, 이기심을 버린 이타심을 바탕으로 국왕과 대신들에게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키워 가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 면신례라는 통과의례는 경제적 침학과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도를 넘을 때 부정적 기능도 나타났지만, 이런 의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기능도 무시할 수 없음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이란 것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엔 부정할 수 없다. 언제 관직을 그만두어도 양반 신분으로 향촌사회에서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 이것이야말로 선비정신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서 면신례 등을 통한 일체감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그 사회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개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다원화된 정보화사회에서 전통적인 신고식 문화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오늘날은 조직의 질서나 사회통합 같은 가치관보다 개성과 각자의 다양한 재능이 존중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화사회에서 첨단을 걷는 산업일수록 신입사원과 고참은 상하로 연결되는 구성원이 아닌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다. 확산돼 가는 연봉제 속에서 자신의 능력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 된다. 이는 진실로 삭막한 사회다.

그런데도 우리는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단순한 기계적인 고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통과의례를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너도나도 삭막한 정보화사회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천지가 벤처와 코스닥 열풍으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인터넷이 지구를 묶어 디지털 세대가 주인인 이 땅에서 아날로그 세대도 엄연히 공존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지털 세대만 사는 세상이 도래할지라도 신고식 문화의 긍정적인 기능까지 없애야 하는가.

다만 새로운 신고식 문화를 위해서는 일체감 조성을 목적으로 한 기계적인 연대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연대 방법을 찾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새 천년 21세기에는 멋진 신고식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冬




벽제 [?除]
[명사]<역사> 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구종(驅從) 별배(別陪)가 잡인의 통행을 금하던 일. ≒전도 벽제.

당상 [堂上]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상(上)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을 통틀어 이르는 말. 문관은 통정대부, 무관은 절충장군, 종친은 명선대부, 의빈(儀賓)은 봉순대부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음서 [蔭敍]
[명사]<역사> 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문음.

음관 [蔭官]
[명사]<역사>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남행(南行)·백골남행·음사(蔭仕)·음직(蔭職).

2007/03/22 02:21 2007/03/22 02:21

조(祖), 종(宗), 군(君)

ktk0419 (2003-03-29 21:13 작성)1대1 질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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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祖)종(宗)에 대해서..

이 차이를 알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조(祖)와 종(宗) 같은 명칭을 일컬어 '묘호' 라고 하는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쓰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왕이 죽고 난 후에 붙인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이 묘호의 뒤에는 조(祖)와 종(宗)이 붙습니다.

보통 '공'이 탁월한 왕 에게 붙이게 됩니다.
즉,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커다란 업적이 있는 왕이 조가 되지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랬고..
임진왜란의 대환란을 극복한 '선조'가 그랬습니다.
또한, 대왕이라고 추앙을 받는 '영조'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앞선 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문물을 융성 하게 한..
왕은 으로 부릅니다.

이러한 묘호는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해 정했다고 합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정한 묘호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선조의 경우, 처음 묘호가 선종이었으나..
국난(임진왜란) 극복 등 커다란 공이 있다고 일부신하들이 주장해..
선조로 바꿨다고 합니다.

이와는 다르게 '군' 이라는 칭호도 보여집니다.
군이라는 것은 원래 왕자들이나 왕의 형제..
또는 종친부나 공신에게 주어지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과 연산군의 경우는재위 기간 중 국가와 민생에 커다란 해를 끼친..
폭군으로서 폐위되었기 때문
에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군으로 봉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왕)과
왕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서도 광해군과 연산군의 신위는
찾아 볼 수 없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은 현재에는 '세종대왕'으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조'의 반열까지 오르기에는 미흡한 왕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중립외교로써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지만..
반정세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군'으로 낮춰 기록된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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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祖)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
창업군주,중흥군주나 큰 국난을 극복하였거나, 반정을 통해 즉위한 왕.

종(宗)
27명의 왕 중 9명을 뺀 나머지 왕들로 '수성'을 한 왕에게 붙임.
조와 종의 기준은 애매모호하며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
[수성(守成)이란? 선왕이나 부조가 이룬 업을 이어서 지킴]

군(君)
연산군.광해군
반정으로 축출됨으로써 서출 왕자에게 쓰는 군으로 강등됨.
실록도 연산군 일기.광해군 일기로 차별을 받음.
2007/03/22 01:55 2007/03/22 01:55

訓民正音

2007/03/19 04:28 / Other Scraps/Arts
(1) 세종대왕
 
세종 임금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태조 6년 음력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여겨짐: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이름)는 도, 자는 원정이다.

세종 임금은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의 내선을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를 길렀다. 특히 우리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 기본이 된, 찬란한 문화 유산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또한 주자소를 설치하고 인쇄활자(독일 구텐베르그가 1455년에 개발한 인쇄 활자보다 앞선 것임)를 개량하여 인쇄술의 발달을 꾀 하였으며,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 제작함으로써 농업과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군사적으로 북쪽에 사군과 육진을, 남쪽에는 삼포를 두어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의술과 음악, 방대한 편찬 사업, 법과 제도의 정비,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대왕은 1450년(세종 31년) 4월 8일 승하하였으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에 안장되어있다. 사적 제195 호이다.


(2)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화적 창조의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훈민정음' 가운데서 세종대왕이몸소 말씀하였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유통)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머리글 풀이")

이 말씀이 지극히 간단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음을 알겠다. 곧,
① 우리 나라에는 독특한 배달말이 있으니, 이 말을 적어 내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 말에 알맞은 글자가 있는데, 우리 나라만은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의 글자, 한문을 빌려 쓰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② 남의 글자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 글자일 뿐더러, 본디 어렵기 짝이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 배달 겨레에게는 이중으로 어려워, 백성들이 다 배워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로되, 한학에 정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이니, 시간과 경제의 여유가 없는 일반 대중이야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함을 아프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③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함이다. 곧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많아 정치가 명랑하지 못하니, 어진정치의 이상에 위반함이라고 생각함이다. 정인지의 꼬리글에서도 이를 "죄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 하고 있다....<중간 생략>.... 이로서 송사를 들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치옥자병기곡절지난통........이시청송, 가이득기정)" 이라고 하였다.

④ 이 새 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곧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든 이유 밖에, 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① 고려 오백 년간에 끊임없이 다른 겨레들로 더불어 겨루는 살림을 하여 오다가, 끝장에는 몽골에게 큰 곤욕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겨레 의식이 눈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며,

② 원 나라, 명 나라의 갈음에 즈음하여, 왕조를 세운 조선 왕실에서는 저절로 자아 의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③ 세종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으며,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

④ 세종대왕이 전제, 세제를 개혁하여, 백성과 나라의 부강을 꾀하였으니,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에는 백성들의 지식의 보급이 앞서는 조건이 됨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원인에서, 만인을 뛰어넘는 밝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세종대왕은 제 겨레 특유의 말씨에 알맞고, 만백성이 깨치기 쉬운 민중의 글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할 만하다.
(옮긴이 주: 한자의 음은 옮긴이가 써넣은 것임)

(3) 만든 때와 반포한 때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 창제는 세종 25년(1443년) 계해 12월이요, 그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1446년) 병인 9월이다. 곧 `세종실록'(권 102) 25년(1443년) 계해 12월 졸가리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스물 여덟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였고, 첫소리 · 가운뎃소리 · 끝소리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이라고 하고, 또 정인지의 꼬리글(옮긴이 주: 정인지의 해례 서문이라고도 함) 가운데에,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처음으로 만드시어..)

라 하였으니, 그 창제의 때를 알겠으며, 같은 책(권 113) 28년(1446년) 병인 9월 졸가리에,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異乎中國 ......
(이 달에 훈민정음이 다 되었다. 임금께서 글을 지어 말씀하기를,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

라 하여, `훈민정음' 전문을 적어 놓았으니, 이로써 그 완성하고 반포한 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의 때를 적되 날짜는 밝히지 아니하였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창제의 날은 꼭 적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반포의 날은 분명한 것이었을 터인데, 이를 밝혀 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백 년 뒤 우리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모색과 시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상고한 바에 따르면 그 해의 9월이 작은 달이었으므로, 위에 적은 `훈민정음' 반포의 기사는 음 9월 29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어 연구회(1908년 창립,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1949년에 다시 한글 학회로 개칭함)에서는 음력 9월29일(양력 10월 29일)로써,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곧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로 정하고 이를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글 반포 제8주갑인 병인년(1926)에 비롯된 일이다.

(4) 창제의 경과


실록에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 관한 극히 간단한 기사 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완미한 과학적 짜임을 가진 글자가 하루 아침에 되었을 리가 만무하니, 필연코 오랜 동안을 두고 고심 연구한 결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심 연구의 경과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이 문화적 대발명을 반대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 가운데에,

且今情州椒水之幸 特慮年斂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攝之時乎


(또 이번 청주 초수(초정)에 거둥하시는데도 특히 연사(농사가 되어 가는 형편)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이를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의 8, 9는 줄어들었습니다. 계품하는 공무까지도 또한 의정부에 맡겼는데, 저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소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 세종실록 제 103 권 세종 26년 음력 2월 20일조-)

라 한 것은, 위대한 창작에 지성을 다하신 성덕의 한 끝을 보여 주는 재료가 된다. 곧 세종이 한글의 창제에 밤낮으로 애썼기 때문에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거동하실새, 특히 연사가 나쁜 것을 염려하사, 시종이며 모든 절차를 열에 아홉은 덜고, 정무까지도 다 정부에 맏겨 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을 위주하는 행재소에까지 가지고 가서, 쉬지 않고 그 연구에 골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한 지성을 다하신 공으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이 25년 계해 겨울에 다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로서 상상하게 한다면, 그 때의 조야 민심은 이를 크게 반기고 기뻐하여, 세종대왕의 성덕의 가이없음을 우러러 기리어 마지아니하였을 것 같지마는, 사실은 이와 반대로, 곧 반대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으니, 그 반포 시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파란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글재단> http://www.hangul.or.kr/
2007/03/19 04:28 2007/03/19 04:28

   
   
 
 
 
 
[그림 1] 남산신성비 제1비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 13) 남산에 신성(新城)을 쌓고 그에 관여한 지방관 및 지방민들에 관하여 기록한 비이다. 제1비가 1934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다. 10개 모두 비의 첫머리에 ‘신해년(591) 2월 26일 남산 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 지 3년 만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케 한다’라는 공통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신성의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이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약식을 행하였던 관례를 이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제3비와 9비를 제외하고, 그 다음에 도사(道使)와 나두(邏頭)와 같은 왕경 6부 출신의 지방관, 촌주와 장척(匠尺), 문척(文尺)과 같은 지방의 지배자, 그리고 축성에 동원된 기술자집단을 기술하고, 마지막에 할당된 공사구간을 몇 보(步) 몇 촌(村)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제3비는 특별하게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성을 쌓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문의 형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약 문장 다음에 훼부 주도리가 할당받은 공사구간을 기술하고, 부감(部監)과 문척(文尺)과 같은 공사 책임자, 기술자집단을 차례로 기술하였다. 한편 제9비는 서약 문장 다음에 급벌군(伋伐郡)의 이동성(伊同城)이 할당받은 공사구간, 군상인(郡上人)을 비롯한 이동성의 지배자들, 그리고 기술자집단의 순으로 기재하였는데, 다른 것과 달리 왕경 6부 출신의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이 빠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1934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제1비는 본래 경북 경주군 내남면 탑리 식혜골 김헌용의 집 앞 도랑에 놓여있었던 것이었다. 남산 중턱에 있었던 것을 가옥을 신축하면서 옮겨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91cm, 최대 폭 44cm, 두께 5~14cm이며, 모양은 기다란 계란형에 가깝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고졸(古拙)한 성격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는 아량촌(阿良村), 영고촌(營沽村)과 노함촌(奴含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인데, 아량촌 등은 현재 경남 함안이나 의령지방에 해당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도사(道使), 지방의 지배자로 군상촌주(郡上村主),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이 보인다. 이밖에 축성기술자로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이 보이고 있다.
 

 
제2비는 상반부와 하반부가 따로따로 발견되었는데, 하반부는 1956년에 경주 남산 서쪽 능선의 전일성왕릉 부근에서, 상반부는 1960년 12월에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제1비와 마찬가지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상하단의 폭이 좁고 중간폭이 넓은 장방형을 이루었다. 전체 길이 121cm, 중간 최대폭 47cm, 두께 7~14cm이다. 비의 내용은 아차혜촌(또는 아단혜촌), 답대지촌(答大支村)과 구리성(仇利城), 사도성(沙刀城)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아차혜촌은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답대지촌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회령, 사도성은 상주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지방관이나 지방의 지배자들은 대략 제1비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지방의 지배자로 군중상인(郡中上人), 작상인(作上人)이 보이고, 기술자 가운데 면석착인, 소석착인이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3비는 원래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 부근 이판출씨의 집에 있었는데, 진홍섭선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화강암의 재질로 전체 길이는 80.5cm이고, 폭은 상단이 30cm, 하단이 23cm이며, 두께는 10cm이다. 비의 내용은 왕경의 훼부 주도리인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역부를 동원하고 축성을 감독하는 관리가 부감(部監)인데, 이것은 왕경을 관할하는 6부소감전의 관리인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등과 관련이 깊다. 특히 축성구간이 21보(步)로서 다른 비에 보이는 작업구간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림 2] 경주남산성
 
 
제4비는 1960년 12월에 제2비의 상반부와 함께 발견되었다. 상반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문 전체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비는 고생촌(古生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나두(邏頭)가 보이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집단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제5비, 제6비, 제7비와 제8비는 비의 조각만이 남아 전하는 것들이다. 제5비는 1972년 8월 문화재관리국에서 도로예정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중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지의 중문지로 추정되는 곳의 민가를 철거하다가 발견하였다. 제6비는 1974년 3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수습한 것이고, 제7비는 1985년 남산신성 남쪽 성벽 내측의 민묘(民墓) 앞에서 수습한 것이다. 그리고 제8비는 같은 해에 남산신성의 북문지 중간지점 바닥에서 수습하였다. 모두 파손이 심하여 비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제9비는 1994년 1월 남산신성의 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처음 세웠던 상태 그대로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남산신성비와 기재 양식이 달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비의 내용은 급벌군(현재 경북 영풍)의 이동성도(伊同城徒)가 6보를 할당받아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제9비는 다른 비들과 달리 지방관에 관한 사항이 보이지 않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의 명단만을 기재한 사실이 특징적이다. 이것을 통하여 축성을 위하여 역부를 징발할 때, 지방의 지배자들이 거기에 깊게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제10비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5월 18일 경주시 배반동 751-3번지 논둑에서 발견하였다. 수습된 비편은 높이 27cm, 폭 16.5cm, 두께 13cm이며, 재질은 붉은 색조의 화강암이다. 현재 비편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3행 5줄의 15자만이 남아있다. 파손된 후 남산에서 1Km 떨어진 현재의 출토지까지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10개의 남산신성비는 도사(道使)나 나두(邏頭) 등의 지방관, 다양한 지역, 다양한 명칭의 지방 지배자들을 전하고 있다. 현재 이를 기초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특히 비들이 신성의 축조에 역부를 동원한 사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고기 역역동원체계를 살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주제어
서약식, 도사(道使,) 나두(邏頭), 촌주, 장척(匠尺), 문척(文尺),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 부감(部監), 군상인(郡上人), 군상촌주(郡上村主),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 작상인(作上人),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역부, 징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중고기 역역동원체계
 
     
   
   
 
2007/03/19 03:09 2007/03/19 03:09

[한국사 미스터리](15)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1934년 5월4일, 어느 일본인이 경주 북천 건너 금장대 부근(현 경주 동국대 후면)의 구릉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오사카의 발에 돌 하나가 걸렸다. 냇돌(川石)이었다. “어, 거참 이상한 돌이네”. 고고학자 특유의 눈썰미가 이 예사롭지 않은 돌에 꽂혔다. 자세히 보니 길이 30㎝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연히 주운 냇돌의 비밀은?=글자는 ‘임신(壬申)’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년 12월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흥분한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어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돌을 주웠던 오사카의 개인소유였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땅에서 동산문화재는 어떤 경우든 먼저 수집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름지기 충도(忠道)를 맹세한다”=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했다. 즉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전(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이 신라 어느 왕대 어느 시기에 해당하느냐가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글쓴 연대가 확실하게 되면 내용에 따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임신이란 간지는 60년마다 되풀이된다. 따라서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으면 60년, 120년, 180년 앞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이 ‘임신년’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이나 성덕왕 때인 732년 둘 중에 하나일 것이며, “내 생각으로는 성덕왕 때인 732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하나로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에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믿어왔다.

◇맹세연도가 732년이냐, 612년이냐=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조유전/고고학자

2003년 08월 18일

작성자 : 고고학반 (2004/10/08 09:42:36 PM) (2005/04/17 09:01:05 PM )
이 기사의 저작권은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2007/03/19 02:55 2007/03/19 02:55

<기획탐방> 새용산박물관 전시실을 가다⑤

경주 서봉총 출토 은합(銀盒)

뚜껑과 몸체의 조립식 은 그릇

신라의 4-6세기 문화는 고분에서는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으로 흔히 대표되며, 출토유물로는 황금을 비롯한 금속유물이 유명하다. 이 신라실을 채우게 되는 전시물 역시 대종은 적석목곽분 금속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서봉총 출토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은으로 만든 합(盒)이라는 그릇. 몸체와 뚜껑 조립식인데 뚜껑 안쪽과 몸체 바닥에는 각각 '延壽元年太歲在卯'(연수 원년 태세 재묘)와 '延壽元年太歲在辛'(연수 원년 태세 재신)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고 있다.

두 곳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연수'(延壽)라는 말은 연호(年號)일 것이며, 이 은합이라는 기물(器物)이 제작된 연대를 지칭하고 있으리라. 태세(太歲)란 목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를 기준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부호다.

목성은 12년마다 태양을 한 바퀴 돈다. 이렇게 되면 희한하게도 12간지(干支)와 대응시켜 연대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은 이 은합(銀盒)이 제작된 신묘(辛卯)라는 해가 하나(卯)는 뚜껑에, 다른 하나(辛)는 몸통에 표현돼 있다는 사실이다. '辛'이 들어간 10천간(天干)은 '卯'가 포함된 12간지에 대해 음양설에서는 양(陽)이 된다.

천간과 간지를 떼어 놓는 수법으로 연대를 표시하는 이런 방식에서 우리는 다시금 경주에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그 시대 신라사회에 음양오행설이 얼마나 깊숙하게 침투해 있었는지를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서봉총 은합에 새긴 명문에 의하면 이 그릇은 천간지지로는 신묘년에 해당되고 연수라는 연호로는 원년이 되는 해 "3월 중에 태왕(太王)이 교(敎.명령)하시어" 제작됐다.

학계의 다수는 이 은합이 고구려에서 제작돼 어떤 경로로 신라에 흘러들어 서봉총에 묻힌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는 없다.

혹자는 '연수'라는 연호가 고구려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한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칭하고, 그의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을 '영락 ●년"이라는 식으로 기록한다 해서 영락(永樂)을 연호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비문 그 자체가 영락이 호(號)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호(號)란 미칭(美稱)이란 기록이 중국에서는 이미 진한(秦漢)시대부터 쏟아지고 있다. 미칭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존칭이라는 뜻. 그 외 다른 고구려 유물에서 연호가 확인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문제가 적지 않다.

이 서봉총 은합이 신라 유물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사실 서봉총이 축조되던 그 무렵 같은 신라 무덤에서 이와 거의 똑같은 유물이 다수 출토됐기 때문이다. 서봉총 은합이 고구려 수입품이라면 다른 신라무덤 모든 비슷한 출토품, 심지어 경산 임당동 고분 출토품도 고구려 수입품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황남대총 유물로는 북분 출토 금으로 만든 등자가 있다. 한데 황금 마구류가 이뿐만 아니다. 여타 소규모 장식품도 금제품이 압도적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말 등자까지 금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례는 검소하게 치러야 한다는 절장(節葬)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외침이 신라에는 전해지지 않았던지, 전해졌다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나 보다.

봉분 두 개를 남북으로 나란히 잇대어 놓은 쌍둥이 무덤인 황남대총 중에서도 여성을 묻었음이 확실한 북분은 남성이 묻힌 남분에 비해 '황금파티'가 더하다. 이곳에서는 각종 금제 그릇이 출토됐다. 그 모양도 굽다리 접시를 흉내낸 것도 있다.

그에 비해 황남대총 남분은 은색(銀色)이 상대적으로 짙다. 이곳 출토 은제 그릇 넉 점이 전시코너를 장악하고 있는데, 북분 금제 그릇이 그렇듯이 이곳 출토 은제 그릇 중에서도 굽다리 접시가 보인다.

같은 경주지역 적석목곽분인 식리총(飾履塚)은 이곳에서 황금신발이 출토됐기 때문에 이런 명칭을 얻었다. 식리(飾履)란 굳이 그대로 해석하면 장식용 신발이란 뜻이지만, 그냥 신발이라고 보면 된다. 한데 이 황금신발은 신발 밑창만 남았다.

이 식리총 출토품으로는 그 마스코트격인 황금신발 한 켤레 외에도 모양이 서봉총 은합과 매우 흡사한 그릇이 있다. 한데 그 재료는 청동이다. 이 역시 서봉총 은합처럼 몸체-뚜껑 조립식인데 뚜껑 복판에는 봉황으로 생각되는 고리를 장식하고 있다. 초두라고 하는 일종의 세 발 솥(혹은 냄비)도 식리총 대표주자로 나온다. 청동인 이 초두가 보통의 솥과 다른 점이라면 다리미처럼 길쭉한 손잡이가 달렸다는 데 있다.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도 두고 두고 음식을 해 드시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이 외에도 적석목곽분 출토품으로는 일일이 수량을 헤아리기도 힘든 각종 구슬류가 꾸러미 상태로 출품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에서 왔을 것으로 보이는 각종 유리제품도 빼놓을 수 없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블로그 2005-8-22) 

<기자수첩> 고구려인은 조선인이 아니다?

<기자수첩> '국사'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2007/03/19 02:53 2007/03/19 02:53

 

님  진  녹  

 (국립도서관 소장본)


  각셜1)이라. 죠션국  선조?왕 즉위 십뉵년 셰?2) 무?라. 이? 시화연풍?고 국?민안?야 ?셩이 창?고 시졀이 ?평?더니, 평안도 삭쥬 ?에 한 ?람이 승은 최요, 명언 위공이라. 년장 ?십의 일졈혈육이 업셔 ?일 ?탄?더니, 일일은 남방으로 큰 별이 ?러져 광?찰? ?지라. 부인이 ?다라니 일몽이라. 비몽간의 한 ?람이 ?관죠복3)을 닙고 신장이 십삼쳑이요, 쳥의동?로 ?우션을 들고 부인계 드러와 엿?오?,
...




장경남 교수님

2007/03/19 02:37 2007/03/19 02:37

인천을 정말 미추홀이라 불렀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彌趨忽이라 기록하긴 했어도  이를 미추홀이라고 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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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인천의 옛 지명이 미추홀이었고 그것이 매소홀로 되었다가 나중에는 소성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한자로 된 옛 기록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으니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많이 썼던 이두식 표기의 특성을 잘 모르고 섣불리 판단한 결과로 보이며, 삼국시대의 한자 발음과 현대 한국의 한자 발음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에서 오는 오류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초기에 인천이 백제 땅이었을 때에 백제 사람들은 "彌趨忽(미추홀)"이라고 기록하였고, 얼마 후 고구려 땅이었을 때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買召忽(매소홀)"이라 기록하였으며, 또 얼마 후에 신라 땅이었을 때에는 "邵城(소성)"이라고 기록했던 것은 사실이다.

위에서 괄호 속에 넣은 한자 발음은 당시의 한자 발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현대 한국인의 한자 발음일 뿐이다.

당시 인천 지방 사람들의 한자 발음이 중국 어느 지방과 가장 비슷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21세기 한국인의 한자 발음과는 분명히 다른 발음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위의 세 가지 표기 방식은 현대인들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이두식 표기라는 점이 더욱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이두식 표기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을 기록한 사람만이 그 정확한 발음을 안다는 점이다.

현대 일본어에서 한자 읽는 방식이 옛날 우리 조상들의 이두와 같은 방식이어서, 일본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사람의 가까운 가족과 예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 뿐이다. 이름에 쓰인 그 한자가 뜻으로 읽어야 할지, 소리로 읽어야 할지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그 가족과 친구들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이두가 그랬다.
중국어와 어순도 다르고 어휘도 다른 상황에서 그저 글자만 빌려 와서는 글 쓰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뜻으로도 사용했다가 소리로도 사용했다가 뒤죽박죽으로 쓰는 것이 이두였다.

어차피 남에게 보여 주려고 쓰는 글도 아니고, 나중에 내가 다시 보았을 때에 나만 알아 보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자를 어떤 방식으로 쓰든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똑같은 것이라도 기록한 사람에 따라서 제각기 서로 다른 한자로 기록될 수가 있는 것이 이두였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 쓴 것도 이두식 한자 표기가 다를 수 있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 스님은 신라의 첫 임금 이름을 "赫居世(혁거세)"라고도 했다가 "弗矩內(불구내)"라고도 했다.

하나는 뜻으로 두 글자를 사용했고, 또 하나는 소리로만 세 글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경상도 지방 한자 발음을 정확히 몰라서 당시의 정확한 발음을 알아 낼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들은 그 한자의 현대 한국 발음으로만 읽어서, 그냥 대충 "혁거세"라고 하고 만다.

당시의 신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혁거세가 누군지 아세요?"하고 물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답답한 것은 "赫居世"의 발음이 "혁거세"는 분명히 아니고, "불구내" 비슷한 어떤 발음일 텐데, 그 정확한 발음을 끝내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수 천 년 뒤에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어 내려고 하니까 답답한 것이지, 실제 이두로 기록한 그 분은 별로 답답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두 방식으로 우리 말을 기록했던 그 분들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았던 것이 분명하다. 외국의 글자를 갖고 와서 우리의 말을 기록을 해 보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실로 창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삼국 시대에 중국에서 한자를 안 쓰고 로마자를 썼다면 우리나라 이두의 모양도 이렇게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말 = 나는 학교에 간다
이두 표기 1 = I nun school e go nda
이두 표기 2 = na nun haggyo e ganda
이두 표기 3 = I nun go to school da
이두 표기 4 = ------------------

이 많은 기록들이 모두 같은 말이었다는 사실을 1000년 뒤에 어느 천재가 있어서 알 수 있겠는가?

양주동 박사 정도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요?

글쎄요.... 전혀 아닌데요....

양주동 박사가 해독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99%이다.

신라시대의 이두 표기를 1000년이나 지난 조선시대의 한자 발음으로 해독해 내려고 했던 그 방법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다.

일본 학자 고쿠라 진페이 박사가 조선 시대에 기록된 한글판 고려 처용가와 삼국유사의 향가 처용가를 대조하여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 스님의 이두 표기 특징 몇 개를 발견해 낸 것을 보고서는.... (이것이 이두 해독에 관한 세계 최초의 논문이었다)

양주동이 애국심을 발동하여 무리하게 향가 전부를 해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고쿠라 박사는 그래도 한글판 고려 처용가라도 있어서 신라 처용가와 대조하여 같은 글자가 나오는 다른 이두를 조금씩 알 수 있었지만, 양주동 박사는 그저 용감하기만 했다.

향가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하는 의미 정도는 알아 낼 수 있었겠지만...(이것도 사실은 앞뒤 한문 설명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수준임)

당시의 정확한 발음까지 알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더군다나 기록자도 다른 "균여전"의 향가들은 더욱 알기 어렵다.
아직도 이두식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향가 해독을 맡겨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제시대의 고쿠라 박사는 신라 향가 처용가를 해독한 것이 아니라, 고려 처용가에서 일부 번역되어 있는 일부 기록을 보고 일연 스님의 이두 표기 습관 몇 가지를 발견해 냈을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솔직히 말하면 이두로 쓰여진 신라 향가 중에 제대로 해독되어 있는 것은 신라 처용가 딱 하나 정도이다.

그것도 고쿠라 박사나 양주동 박사가 직접 해독한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신라 처용가를 고려 시대 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에 이두로 기록한 것이 있었고, 같은 노래에 군살이 좀 붙은 고려 처용가를 조선 시대 때에 한글로 기록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해독되었다고 하는 처용가의 노랫말은 사실 원래 내려 오던 노랫말이었고, 누군가가 번역해서 그 내용이 알려진 것은 아니다.

지금 이두 표기의 전통은 일본으로 넘어 갔고 우리 쪽에는 거의 흔적이 없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인천의 세 가지 옛 표기---
彌趨忽, 買召忽, 邵城의 당시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나....
똑같은 지명을 두고 세 나라의 세 사람이 각기 자신의 이두 표기 습관대로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표기 방식만 좀 달라졌을 뿐, 지명이 변경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현대 한국식 발음대로 "미추홀", "매소홀", "소성"이라고 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는데, 그러면 무어라고 읽어야 좋을 지가 고민은 고민이다.

현재로서는 정답이 아닌 게 알면서도 그냥 미추홀, 매소홀, 소성이라고 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정식 한문과 이두 표기로 기록한 책자가 발견되어 이두에 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될 때까지는 별 도리가 없다.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보....
이두 표기 방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알아 두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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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
2007/03/19 02:28 2007/03/19 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