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11

2005/07/11 23:32 / My Life/Diary
처방전

보라매병원
2002년 4월 24일

유한짓정 300mg 1정
리포덱스정 450mg 1정
삼일염산피리독신정 50mg 1정
탐부톨정 400mg 1정
한일피라진아마이드정 500mg 3정

7정 * 30일 * 9개월 = 1890정


탐부톨정… 유한짓정… 이름이 멋있지?
황지우의 시 '늙은 아내'에 나오는 그 시어,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 같이 발음이 참 감칠맛 나는. 그러나 실상은 아무런 맛도 없는.

토요일이던가 새벽에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데 서울의 한 결핵촌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교회재단이 회원들에게 기부를 받아 결핵촌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돈과 음식을 나누어주는데 그 대상이 모든 환자가 아닌,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위선을 떠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코에 호스를 꼽고 헐떡대며 밭은 기침을 내뱉고 온 몸에 힘이 없어 흐느적거리는 이들을 보고 있으니 울컥했다. 이제는 병도 아닌 결핵, 그저 병원갈 여유가 없어 병을 깊게 키워 이젠 죽을 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각혈, 종이컵에 담겨지는 그 아픔 없는 절망. 약기운에 힘은 빠지고 소변과 대변이 핏빛으로 붉어져 나오는 야릇한 혐오감. 자신에 대한 무한한 무기력. 9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맹물과 함께 넘겨왔던 1900알의 항생제들. 삶이 한없이 무미해질 수 있음을 깨달은 어느 날. 끝없는 그 무기력의 후유증.

앞 침상 아저씨는 샛노란 항암제가 가득 든 링겔을 맞으며 밤새 구역질을 해댔고, 옆 침상 할아버지는 답답하다며 숨을 쉬러 복도로 나갔다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포위 당한 나는 벽을 바라보고 누웠는데 이윽고 병실의 누군가가 나즈막히 중얼댔고, 내가 누운 자리의 전(前)주인은 이미 세상에 없다고 하는 소리가 잠결에 기도문처럼 들려왔다.
2005/07/11 23:32 2005/07/1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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