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연구

2010/12/18 15:30 / My Life/Diary
나는 죽음이 그와 같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위험한 고비에 고비를 거친 뒤 갑자기 한꺼번에 설명되고 정당화되고 구원받는, 인생에 대한 짤막한 비전, 뒤엉킨 두뇌 회로 속에 나타나는 일종의 최후의 심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내가 실제로 얻은 것은, 머리 속의 텅 빈 공동, 완전한 제로, 무(無)였다. 나는 속았던 것이다.

몇 달 뒤 나는, 내 나름대로의 해답을 결국은 얻었음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나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해 간 절망감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절망감, 마치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무분별한 어린애가 느끼는 것 같은 해결 불가능한 절대적인 절망감이었다. 그런데 유치하게도 나는, 죽음이 그러한 절망감을 종식시켜 줄 뿐 아니라, 설명까지 해 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결국, 죽음이 나를 거부했을 때,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은 내가 틀린 어법을 사용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절망감이라는 것을 미국식으로 번역했던 것이다. 너무도 많은 미국 영화, 미국 소설, 그리고 미국으로의 잦은 여행이, 내가 이해하고 있던 것을 낙천적인 낯선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나는 불행하다>를 <내겐 문제들이 있다>로 바꿔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낙관주의적 표현 방법이다. 왜냐하면 문제라는 것은 반드시 해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이란 그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조건, 곧 기후와도 같은 것이다. 어떠한 해답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죽음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나자 놀랍게도 나는, 내 스스로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크게 상관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문제들>도, <문제들의 문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이미 행복의 시작이었다.

자살에 관해서 말하자면, 자살을 하나의 병으로 얘기하는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는, 자살은 가장 악독한 대죄(大罪)라고 부르는 가톨릭교도나 모슬렘 교도만큼이나 나를 당황시킨다. 내가 보기엔 자살은, 그것이 도덕을 초월한 문제인 것과 똑같이 사회학적ㆍ심리학적 예방을 초월한 문제이며, 강요당한, 궁지에 몰린, 어긋난 숙명에 대하여, 우리들이 때로 스스로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그러나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 같다.

그러나 자살은 나의 몫이 아니다. 이젠 아무래도 이전처럼 낙관주의적인 사람은 못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죽음은 그것이 최후로 닥쳐왔을 땐, 어쩌면 자살보다 더욱 불결하고, 틀림없이 자살보다 상당히 더 불편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ㅡ 알프레드 알바레즈, 『자살의 연구』, 청하, pp.283~286
* 행갈이 및 본문 몇 부분을 다소 바꾸었음.
2010/12/18 15:30 2010/12/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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