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1.8 전혜린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해도 나는 이미 살아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노라.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노라.
다시 사랑하면서 촛불은 거세게 희망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으리라.
당신을 보기위해 나의 눈은 멍하니 떠 있을지도 모른다.



전혜린은,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나는, 겨울이면 죽고 싶다. 어느 겨울의 눈오는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훈련소에 있을 때, 엄청난 눈보라가 쳐서, 모든 훈련이 중단되고 하루종일 눈을 쓸었다. 눈보라 속에서 치워도 치워도 치워지지 않는데 -- 그래 마치 시지프스처럼 --, 너무나 즐거웠다. 눈이 좋아서, 눈보라여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사방에 눈이 쌓여 있어서, 누구도 아무런 말 없이 바람 소리 속에서 눈만 눈만…. 그대로 서서 죽어버려도 하나도 슬프지 않겠다, 너무 행복하겠다, 어는 건 싫지만, 눈 사람이 된다면, 완벽한 죽음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눈을 좋아한다.

일과 시간을 마치고 작업이 끝났을 때, 불도저가 올라왔다. 젠장, 불도저가 올 양이면 왜 우리에게 작업을 시킨거야, 웅성웅성. 그래도 여전히 눈보라. 내가 싫었던 건 더 이상 눈보라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 아마도 죽음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삶 자체는 싫다. 어짜피 죽을, 삶 자체는 싫다. 그러나 눈보라처럼 펼쳐진 세상, 이 세상을 떠나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봐라, 천상병도 삶이 아름답다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름다울 뿐. 삶 자체는….
2005/12/11 20:39 2005/12/1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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