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26

2010/11/26 12:26 / My Life/Diary
희망
기형도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출근길에 문득 떠오른 시 두 편. 이 시들을 지금, 다르게 이해해. 기형도가 우리의 어디를 문드러지게 했는지.

기형도에게 희망은 사랑이며, 사랑의 상실은 대상의 상실이 아닌 사랑이라는 관념 그 자체의 상실이다. 사랑이란 수많은 개별 감정을 퍼즐 조각 맞추듯 하나로 만들어 인식하는 일. 그러나 사랑의 상실에 이르게 되면 이 감정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에 실패하게 된다. 감정의 조각들은 반복된 악몽 속에서 날카로운 모서리로 다듬어지고, 찔리고 베인 느낌만 남아 결국 타인에게서 던져지는 모든 감정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의심하고 피하고 도망다니고 숨고. 그러다 보면 “언제부턴가 아무때나 눈물 흘리지 않는다”. 눈물의 동인(動因)을 빈집에 가둬 버렸으니까. 더욱 비극적인 건, 그 빈집에 자신도 같이 갇혀 있다는 사실. 그렇게 함께 썩어 사라지는 거야.

2010/11/26 12:26 2010/11/2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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