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과의 추억을 더듬으며
이승하
 

  하늘나라에 있는 기형도에게



  형도!

  자네가 세상을 뜬 지도 어언 17년 반이 넘었네. 내가 동기생 남진우의 전화를 받고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헐레벌떡 달려갔던 봄날, 자네는 영정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나보다 백 배는 건강하게 보였던 자네가 나이 서른이 되기 직전에 고인이 되었고, 내가 자네한테 조문을 가서 절을 올리게 될 줄이야. 만날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자네는 너무나 씩씩했고 유쾌했고 말도 참 잘했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말을 꽤 더듬었던 나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영안실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하재봉 씨와 나눴던 대화가 잊혀지지 않네.

  "이형! 최근에 기형도가 발표한 시들 읽어보셨어요?"

  "읽어봤지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전부 자기 죽음을 예언한 시들 아닙니까."

  자네가 시내 파고다극장에서 영화 [뽕 2]를 보다가 절명한 것은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이었네. 계간지가 3월 1일 전후로 출간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발표한 시들, 즉 사망 직전에 발표한 시들의 제목이 '빈 집', '가수는 입을 다무네', '입 속의 검은 잎' 등이었네. 하재봉 씨와 나는 바로 며칠 전에 읽은 그 시편들에 거무튀튀하게 번져 있는 죽음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를 물 마시듯 마셔댔었네. 평소의 자네는 병을 앓기는커녕 건강하기만 했었으니 죽음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네. 아무런 질병의 흔적도 약물 복용의 혐의도 남기지 않은 자네가 도대체 왜? 하지만 희한한 일은 사망 며칠 전에 우리들에게 보여준 자네의 시가 온통 죽음, 죽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했다는 것이었네. 자네는 왜 그 야심한 시간에 남색가들이 파트너를 찾기 위해 들어간다고 하는 그 극장에 들어가서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던 거지? 아무튼 자정 넘어서까지 이어진 영화 상영이 끝나 관객들이 다 나가고 텅 빈 극장 안에 청소하러 들어간 청소부에 의해 자네가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뇌졸중으로 절명한 후였지.

  영안실에서 자네와 절친했던 원재길 씨에게 물어보아도 자네가 죽기 전날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우리는 자네가 왜 그 시간에 그곳에 갔는지, 그곳에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지.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겨울이 아니었나 싶네. 자네는 그 무렵 중앙일보문화부 기자가 아니었던가? 나한테 전화를 해왔었지.

  "이승하 시인이지요? 저 중앙일보 문화부에 있는 기형도라고 합니다."

  "기형도 씨라구요? 반갑습니다. 동아일보 당선작 [안개] 잘 읽었습니다. 시가 참 좋던데요."

  "고맙습니다. 제가 전화를 한 이유는 이형한테서 원고를 하나 받고자 해서입니다. 지금이 이른바 신춘문예의 계절 아닙니까. '나의 신춘문예 체험'이라는 코너를 만들었는데 이 시인께서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당선되던 시절의 이야기를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쓰지요. 몇 매 정도 쓰면 됩니까?"

  원고를 팩스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그때는 아직 E-메일이란 것이 사용되기 전이었네) 자네는 시간이 되면 중앙일보사로 한번 와주기를 원했고, 나도 1985년 동아일보 당선작 [안개]를 쓴 자네를 만나고 싶어 원고를 들고 오랜만에 중앙일보사에 놀러갔지. 우리는 그 날 신문사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었네. 저녁이었다면 술잔을 기울였겠지만 자네를 처음 만난 날 술을 마신 기억이 없으니 만난 시간은 분명히 낮이었네.

  자네는 밥을 먹으면서 나를 한동안 몹시 원망했었다고 말했었지. 1983년 말, 중앙일보사에 [겨울 판화] 연작시 몇 편을 투고하고는 내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자신은 최종심까지 올라가 차점자로 떨어지고 이승하의 [畵家 뭉크와 함께]가 당선되어 부러움과 동시에 질투심이 나서 몹시 괴로워했다고 말했었네. 그럼 자네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은 나 때문에 쓴 시인가?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겠나.

  "이형의 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시가 다 당선이 되었나 싶어 화도 나고 그랬어요. 말더듬이를 하나의 화법으로 삼을 생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하, 제가 말을 꽤 심하게 더듬었거든요.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회의석상에서는 말을 막 더듬습니다."

  자네는 내가 내민 글에 '입대 전 투고… 꼴찌 작품으로 습작 마감'이라는 제목을 붙여 실어주었네. 꼴지 작품이란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투고작 중 제일 밑에 깔려 있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

  그 날 이후 자네와의 만남은 그저 1년 한두 번, 그것도 문인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시상식이나 송년 모임 같은 때였네. 나는 그 무렵 쌍용그룹 홍보실이라는 데 적을 두고서 만원 전철에 실려 출·퇴근을 하는 샐러리맨이었고, 자네는 신문사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치며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민완한 기자였지.

  자네는 그 시절에 기자로서는 경력을 확실히 쌓아가고 있었지만 시인으로서는 철저히 무명이었네. 자네의 살아생전에 자네의 시에 대해 언급한 문학평론가는 딱 두 사람, 조남현과 최동호 씨였네. 조남현은 [신예들의 저력과 가능성]에서, 최동호는 [80년대적 감성의 자리잡기]에서 80년대에 등단한 여러 유망한 시인을 죽 나열하는 가운데 기형도도 있다는 식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언급했을 따름이었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9년 3월 7일에 작고할 때까지 자네는 철저하게 무명의 시인이었지만 사후에 자네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네.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현 씨가 해설을 써 간행된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문지시선 사상 최고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게 되고 작고 10년 만에 간행된 전집은 발간 사흘 만에 재판을 찍었지. 자네의 시집은 아마도 지금껏 최소 50만 권은 나가지 않았을까? 자네 사후에 자네의 시를 연구한 글이 1백 편이 넘게 발표되었네. 요즈음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자네의 시와 보들레르의 시에 나타난 각종 이미지를 비교 연구하는 석사논문을 쓰고 있다네. 지도교수인 나는 그 학생에게 자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해주지 않았는데 이 편지를 보여주면 무척 놀라겠군.

  나는 자네를 만난 적은 몇 번 없었지만 연세대 출신의 시인 원재길(지금은 소설가지)과 여러 해 동인 활동을 했었기에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수시로 듣고 있었네. 자네의 지독하게 가난했던 유년시절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는 생시의 자네를 사실은 시인으로서보다는 기사를 정직하게 쓰는 기자로 기억하고 있다네. 영화평이나 연예인 평은 침소봉대를 하게 마련인데 자네가 촌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느낀 그대로 써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네.

  자네는 살아생전에 우리 시단의 '카수'였네. 연세대 국문학과에 계신 정현기 교수도 어느 가수 못지 않은 노래 실력을 갖고 있는데 연대 나온 사람은 다 노래를 잘 하나 봐. 자네는 남진우의 결혼식장에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주제가인 [캐플릿 가의 축제]를 정말 멋지게 불렀었지. 시단의 카수 3총사는 자네와 박주택과 장석남인데……. 지금은 누가 노래를 잘 하는지 모르겠네.

  하재봉은 자네 사후 1주기 모임을 주선하였지. 그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네. 남진우에게 부탁하여 예식 행사를 찍은 비디오필름을 빌렸고, 어느 순간 추모 행사장의 불을 끄고 암흑천지로 만든 후에 기형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틀어주었다지. 그 자리에 모인 여성 독자들이 일제히 울먹였다고 하더군. 그 추모의 자리에는 나는 가지 않았지만 자네에 대한 내 마음은 그 때도 지금도 애도, 애석함, 애처로움 등이네. 가난도 무명도 떨쳐버리고 신문기자로서, 또 시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어갔어야 할 자네에게 죽음의 사신이 그렇게 일찍 방문했으니.
 
  형도!

  자네가 간 지도 17년 반, 나는 시집도 몇 권 냈고 문학평론집도 몇 권 냈네. 모교의 교수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 요즈음 시단은 어떻냐고? 아주 조용하다네. 문예지의 폭발적인 증가로 시인이 한 해 수십 명씩 쏟아져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시단의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는 듯하네.

  지금 우리 시단은 빈사지경이라고 할까 아사지경이라고 할까. 서울의 교보문고 등 몇 군데 대형 시점을 제외하고는 문예지와 시집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네. 시집이건 무엇이건 책이 워낙 안 팔리니까 모 출판사에서는 인기 있는 미모의 방송국 아나운서가 책을 번역했다면서 대대적인 사인회를 갖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책 판매에 열을 올리더니 그것이 들통나 출판사와 아나운서가 다 욕을 먹었네.

  교보문고에서 집계한 2005년도 시집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개인의 창작 시집은 한 권도 없네. 번역된 잠언시집이니 누가 편한 애송시집이니 사랑시집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면 도통 나가지를 않는다고 하네. 2006년도 상반기 베스트셀러 10위 안에는 다행히도 김용택의 신간 시집인 {그래서 당신}이 8위에 랭크되어 있지. 상반기 9위를 마크한 시집이 바로 자네의 {입 속의 검은 잎}일세. 자네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지독한 생명력일세. 더더욱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자네의 시가 이렇게 생명력이 긴 이유 중의 하나가 자네가 일찍 작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30대를 거쳐 이제 나처럼 나이가 마흔일곱이면 그 동안 세파에도 시달리고 문단의 구설수에도 시달리며 많은 흠집을 지니게 되었겠지만 자네는 숨을 거둔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방황하는 청춘, 상처받은 영혼, 고결한 청년시인의 상징이네. 윤동주가 우리에게 사각모를 쓴 얼굴로 기억되고 있는 것처럼 자네는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두고 아깝게 죽은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자네의 시는 슬프고 아프지. 암담하고 암울하고…….

  우리 문단에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흘러가던 민중문학이 소연방의 해체와 동구 공산권 사회의 몰락으로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게 된 시점에 자네는 숨을 거뒀던 것이고, 자네의 뼈아픈 내면 일기와 세계에 대한 절망감, 상황에 대한 환멸감은 90년대의 도래와 함께 가장 맞아떨어지는 품목이기도 했었네.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 10대 말과 20대의 젊은이라면 자네 시에 나타난 죽음 이미지, 짙게 깔린 안개, 검은 색 등은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었지. 문학평론가들도 애도와 추모의 마음으로 앞을 다투어 글을 썼었네.

  최근에는 그간 조용하던 시단에 파문이 하나 일어났지. 권혁웅이라는 문학평론가가 몇 명의 시인을 '미래파'라고 명명하면서 옹호하고 나섰는데, 이들의 시는 80년대의 해체시와는 달리 대다수의 독자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지. 게다가 여러 평론가가 반격에 나서 이들 시인이 문학적 공감대 형성에 신경 쓰지 않고 독백조로 쓴다고, 상상력이 자신의 체험 세계에만 갇혀 협소하다고, 운문성을 죄 버렸다고, 깊이가 없고 자동기술적으로 시를 쓴다고 공격하면서 이들의 기세가 한풀 꺾여버린 느낌이 드네. 그리고 80∼90년대에 좋은 시를 썼던 많은 시인이 지금은 붓을 꺾은 상태라네. 인터넷의 발달로 미등단 아마추어 시인과 기성시인과의 차이도 없어진 듯하네. 매년 최소한 100명은 등단하는 듯한데, 그래서 희소가치가 없어졌고, 자연히 시인이 홀대받게 되었지. 자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제는 시를 인터넷상의 카페에다가 올리고, 검색하고, 퍼가고 있다네. 시집을 사지 않아도 컴퓨터를 키면 웬만한 시는 다 볼 수 있지.
 
  우리 시단의 분위기가 이 지경이지만 나는 지금도 시인이고 학교에서 학생들 앞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고 있다네. 자네 시의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매 학기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내 귓가에는 자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네. 자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시를 위한 순교자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있으리라고 믿네. 80년대를 살면서 자네는 그 시대에 대해 절망했었는데 90년대도 2000년대도 이 땅은 여전히 비극적인 상황이네.

  형도!

  하늘나라에서도 시 열심히 쓰고 있겠지만 나는 읽을 수가 없구먼. 다시 한번 자네의 명목을 비네. 아픔도 설움도, 억울함도 부러움도 없을 그곳은 정녕 천국이 아닐까 싶네. 평안하게나.


                                                        2006년 10월 20일
                                                   자네가 묻혀 있는 안성 땅에서
                                                            승하가.


  아래는 '나의 신춘문예 체험'이라는 연재 기획물의 하나로, 기형도 기자의 청탁으로 썼던 글이다.

  일찍 닥친 추위로 손가락이 곱아 원고지에 글씨 쓰기가 힘들었던 1983년 12월 초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에 쓴웃음이 피어난다. 머리맡의 영장은 1월 하순이면 군인이 되어야 함을 명하고 있었으니, 졸업식에는 참석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몹시도 울적하였다. 이제껏 신춘문예 심사평이나 문예지 신인상의 예심 통과자 명단 같은 데서 이름 석자를 여덟 번 발견하기까지 숱하게 응모했던 터라 84년 신춘문예도 전혀 자신이 서지를 않았다.

  외풍 센 방에서 동태가 되어 원고지를 메우는 일은 이래저래 고역이었다. 부엌에 가 파지를 양동이에 넣고 태우며 손을 녹이곤 했다. 겨우겨우 시 15편과 소설 1편을 마감 전날까지 정서할 수 있었다. 연례행사였던 투고와 낙방이라 대학시절에 모은 재산을 여러 신문사에 나누어 헌납하고 입대하자는 심정이었다.

  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첫째 이유는 중앙일보사에서 당선 통지와 왔기 때문이었고, 둘째 이유는 뽑힌 작품이 [畵家 뭉크와 함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신춘문예는 심사위원의 취향을 염두에 두고 투고하게 마련인데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그래도 가장 희망을 걸었던 조선일보에서는 종무소식이었고 괜찮은 작품을 보냈다고 생각한 한국일보에서는 심사평에 이름이 나와 있었다. 중앙일보에는 스스로 별 신통치 않은 것을 묶어 보냈는데 당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선작도 결과가 거꾸로 나왔다. 다섯 편 가운데 맨 밑에 깔려 있던 짧은 시여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소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차점자로 떨어졌다.)

  어쨌거나 시상식 바로 다음날 나는 머리를 시원하게 깎았다. 뭉텅뭉텅 잘려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나름대로 힘들었던 습작시절도 그렇게 끝이 났다. 훈련소의 겨울, 그 춥던 밤의 '팬티 바람에 집합'이라는 것도 추운 줄 모르게 했던 4년 전의 의욕과 열정이 새삼스럽다.

 

 

 

  ⊙ 발표일자 : 2006년11월   ⊙ 작품장르 : 글쓰면서만난사람들
  ⊙ 글 번 호 : 208849   ⊙ 조 회 수 : 167
 

http://www.poet.or.kr/poet_asp/smp07/sch_read.asp?name=poet&page=1&no=208849&find1=이승하&find2=기형도&find3=titlek&mn=search
2007/11/19 18:38 2007/11/1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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