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식의 라캉 읽기 - 김종주
자크 라캉(1901∼1981)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 분석가이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문학계에 먼저 소개된 까닭에 문학가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첫 논문이 편집증이란 정신병에 관한 연구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신과 의사이다. 오히려 그의 혁명적인 이론이 문학 동네나 영화 마을 같은 곳에서 너무나 잘 활용되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또한 페미니즘과 정치, 경제, 사회를 비롯하여 미술에 이르기까지 어느 분야에서나 그의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런 만큼 오해도 많다. 그래서 라캉은 제대로 알려져야 하고 제대로 알아야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라캉을 읽어 내는 일이란 까다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멀러와 리차드슨은 라캉의 유일한 논문집인 『에크리럄rits』를 읽는 일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작업이라 했을까! 흔히들 『에크리』를 수수께끼 그림에 비유한다. 수수께끼 그림이란 언뜻 보기엔 무의미한 조각들을 따로따로 이해한 다음 그 조각들을 맞춰 봐야 겨우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라캉의 문체 때문이다. 라캉은 『에크리』의 서문에다 <문체란 우리가 말을 건네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써놓았다. 제인 갤럽도 라캉의 텍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언어에 있어서 <거세>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1960년대 초 카라카스에서 열린 라카니언들의 학술 대회에 참석하여, 당신네들은 지금 라카니언이라고 여기 모인 모양인데 그 자신은 프로이디언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듯이 그의 글에는 항상 프로이트가 따라 다닌다. 거꾸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 같다. 그의 중요한 이론에는 거의 언제나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참조되고 있다. 따라서 라캉식으로 정신분석을 읽어 내는 일은 언제나 프로이트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라캉의 구호처럼 <프로이트에게로의 귀환>이다. 물론 그의 제자들은 국제 정신분석학회로부터 <파문>당한 1964년에 열렸던 라캉의 열한 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서 라캉이 처음으로 라캉답게 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가장 짧게 말해서,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발견에 기초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된 이론이며 임상이다>. 다시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정신분석이란 무의식적 정신 과정을 탐구하는 방법이고, 신경증의 치료 방법이며, 연구와 치료 방법에 나타난 정신 과정에 관한 이론들인 셈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받으러> 오는 환자를 피분석자analys 아닌 분석 실행자analysant로 부른다. 분석을 당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분석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우리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은 무슨 흉측한 본능의 덩어리로 이해되었던 무의식을 대타자le grand Autre와 말을 나누는 자리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을 우리들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긴 뫼비우스의 띠에서 본다면 안과 밖, 윗변과 아랫변이 구분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에게 처음으로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안나 오Anna O.>라는 여인은 그 치료를 <대화 치료>라고 불렀다. 그녀가 앓았던 병은 히스테리라고 알려져 있다. 첫 증상은 심한 기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손발이 마비되어 굳어지고 감각조차 없어진다. 마치 <신경성>이 아니라 진짜 <신경이 고장난> 것처럼 보이는 전형적인 히스테리다. 사팔뜨기에 목 근육까지 마비되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한다. 음식을 거부하다가 브로이어 박사한테 먹여 달라고 한다. 물도 삼키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가끔은 환각에 시달린다. 요즘의 진단 기준으로는 분명히 히스테리성 정신병이다.
프로이트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브로이어 박사가 1년 반 동안 빈의 상류 사회 출신인 그녀를 진료했다. 한때 브람스의 주치의를 맡았을 만큼 브로이어 박사는 그 당시 빈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을 도맡아 치료하는 명의였다. 브로이어 박사는 정말 성실한 의사였다. 하루에 두 번도 마다하지 않고서 안나 오에게 왕진을 다녔다. 치료 방법은 최면술이었다. 그녀는 증상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나면 눈 녹듯이 그 증상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하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후련했으면 그녀가 이 대화 치료를 <굴뚝 청소>라고도 불렀을까. 일종의 <카타르시스>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도 프로이트의 제자를 자처하는 요즘의 분석가들은 <말>을 무시한다. 이 틈새를 노려 라캉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빌려 와 프로이트를 재해석하고 있다.
벤베누토는 『라캉의 정신분석 입문』에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욕망은 말로 표현된다. 욕망은 분석가라는 타자 앞에서 말로 표현되고 이름이 붙어야 그 인식이 가능하다. 또한 주체가 자신의 역사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도 말에 의해서다. 언어의 존재라는 사실이 과거의 관점을 바꿔 놓는다. 주체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그 사건들을 재구성할 수 있다. 분석 경험을 통해 주체는 자신이 지닌 기억의 흔적들을 끊임없이 재정리하게 된다. 환자는 분석가한테 말하는 동안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는데 이것이 증상을 없애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환자는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꺼내 놓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 사건들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라캉은 오로지 말만이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과거의 사건들이 흔적으로 남겨 놓았던 과거의 권능은 오직 말만이 입증해 줄 수 있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간혹 환자와 의사한테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분석중에 안나 오가 임신했다. 물론 상상 임신이다. 자궁 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생긴 아이다. 물론 그 아비는 그녀가 상상 속에서 사랑했던 브로이어 박사였다. 결국 그녀는 진통 끝에 상상의 아이를 낳는다. 그러니까 진통까지도 히스테리 증상이다. 훗날 안나 오의 치료를 떠맡은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을 <전이의 사랑>이라 불렀다. 브로이어를 향한 전이의 사랑이 브로이어로 하여금 그녀의 치료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이의 사랑은 여성 환자를 많이 보아 온 프로이트에게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벌써 전이는 정신분석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는데, 그때에 전이라는 것은 어렸을 때 중요한 인물에게 붙어 있던 감정이 분석가에게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라캉은 전이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실제로 이 사랑을 분석가가 지니고 있을 것 같은 무의식적인 지식, 즉 본식(本識, savoir)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한다.
그런 말들을 이해하려면 거울 단계와 <아버지의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는, 자가 성애 단계로부터 자기애 단계로 이행해 갈 때 분명 어떤 <새로운 정신 작용>이 끼여드는 것을 감지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라캉은 거울 단계로 해명하고 있다. 거울 단계란 생후 6∼18개월 사이에 거치는 자아의 형성 단계이다. 이러한 거울 단계를 통하여 자아가 말짱 헛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따라서 자아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이 사회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 뿐이다. 자아 심리학에서의 피분석자는 위대한 분석가를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욕망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욕구와 요구와 욕동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2자 관계로부터 3자 관계로 이행할 때 끼여드는 새로운 항목이다. 이러한 부명(父名)에 의해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발전해 가게 된다.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에 부명(父命)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명령과 아버지의 이름을 부명이란 한자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은 <이름nom>과 <안돼non>라는 동음 이의어로 말장난을 시작한 라캉의 흉내를 내본 것이다.
유달리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은 엄마와의 2자 관계 속에서, 다시 말해 아무런 부족함도 없는 상상계 속에서 자라다가 부명이란 기호에 의해 마침내 상징계 속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때서야 인간은 언어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이 지배하는 문화 세계의 일원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니피에를 잃어버린 시니피앙의 지배를 받는다. 아마 최초의 시니피앙이 선악과였던 것 같다. 지혜의 열매를 따먹고 하느님과 비슷한 지혜를 얻으려고 했지만 그 결과는 부끄러운 나체를 지니고서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고 마는 것이다. 그 뒤로 인간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에덴에 대한 향수를 앓기 시작한다. 고국을 떠난 고아로서 영원히 이 세상을 떠돌며 헤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떠도는 시니피앙>이다. 라캉은 『에크리』를 편집할 때 자신의 논문들을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처럼 읽으라는 듯이 그 논문을 제일 앞에 배열했다. 소설 『이어도』를 정신분석한 나의 졸고, <떠도는 능기(能記)>는 이것을 흉내내어 쓴 것이다. 능기는 시니피앙의 번역어이다. 이렇게 라캉의 정신분석은 시니피앙을 위주로 하는 정신분석이다. 우리가 언어를 부리며 사는 줄 알았는데 라캉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언어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중요하면서 혼란을 일으키는 개념이 남근이다. 먼저 말해 둘 것은 이 남근이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라캉이 분명하게 정의를 내려 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부정법으로 일관된 정의를 내렸을 뿐이다. <남근은 환상이 아니다. 어떤 대상도 아니다. 음경이나 음핵과 같은 기관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이 라캉의 이론에 빚을 졌으면서도 라캉을 남근 중심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까닭은 역시 <특권을 지닌 시니피앙>이라는 이 남근 개념 탓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남근이란 개념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남근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핵심이 되는 거세 불안을 푸는 열쇠이다. 남근이 음경의 표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지 갖고 있느냐 아니냐라는 정신적인 표상일 뿐이다. 여기서 음경이 선택된 까닭은 몸에서 유난히 돌출된 기관인 데다가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것 같은 그 신축성 때문이다. 조상들의 무덤 앞에 쑥돌로 잘 다듬어 성석(性石)을 모셔 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리라 상상했던 엄마에게 바로 그 남근이 없음을 알고는 자신도 언젠가는 귀중한 그것이 잘려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거세 불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실제로 거세당한 남자 아이도 없고, 아예 처음부터 갖지도 않은 여자 아이는 거세당할 리가 없다.
한때 프로이트는 최면이 잘 걸리지 않는 환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주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중요한 생각이든 그렇지 않든, 기분 좋은 생각이든 아니든, 떠오르는 대로 무엇이든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그저 귀기울여 듣기만 했다. 그 결과 환자에게 떠오르는 것은 그 무엇이나 어떤 식으로든 무의식의 갈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최면으로부터 자유 연상으로 옮겨 가는 기념비적인 과정이다. 그러니까 환자는 고통의 주체로서 분석가를 찾아왔다가 자유 연상을 통해 드디어 사유의 주체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식의 <사유=존재>는 아니다. 사유의 주체가 실존일 수는 있어도 그 주체의 본질이나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분석 시간에 분석 실행자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의 꿈 이야기나 그의 실언과 농담, 하물며 그의 망상이나 환청까지도 그의 무의식의 주체를 찾아가는 귀중한 <꽉 찬 말>이다.
필자 역시 이미 죽은 라캉한테 전이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해소할 방편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 무의식의 주체를 체험해 보려고 시도해 왔다. 라캉은 분석가가 되는 첫번째 요건이 문학 수업이라고 봤다. 실은 프로이트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학 작품을 작가의 증후로 보고 그 증후를 분석하여 작가를 진단하는 작가 연구이거나 작품 속의 주인공을 정신 병리적으로 분석해 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라캉식의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문자에 관한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정신분석은 시니피앙을 위주로 하는 정신분석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해석은 욕망과 공격성에 의한 행위이다. 라캉을 해석하는 일도 라캉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라캉을 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해석이란 전이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되고, 독서에서의 해석은 전이의 분석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글쓴이 김종주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기독병원 신경정신과장을 거쳐 현재 김종주 신경정신과 의원 원장이다. 1991년 파리에서 열린 라캉 서거 10주년 학술 대회에 참석했고, <한국 라캉과 현대 정신분석 학회>를 창립한 뒤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라캉 학회 회원이다. 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1993년 『예술세계』 문학평론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캉 정신분석과 문학평론』, 『라캉 정신분석 입문』 등의 저서가 있다.
미메시스(http://openbooks.co.kr/mimesis/), 1999
자크 라캉(1901∼1981)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 분석가이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문학계에 먼저 소개된 까닭에 문학가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첫 논문이 편집증이란 정신병에 관한 연구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신과 의사이다. 오히려 그의 혁명적인 이론이 문학 동네나 영화 마을 같은 곳에서 너무나 잘 활용되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또한 페미니즘과 정치, 경제, 사회를 비롯하여 미술에 이르기까지 어느 분야에서나 그의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런 만큼 오해도 많다. 그래서 라캉은 제대로 알려져야 하고 제대로 알아야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라캉을 읽어 내는 일이란 까다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멀러와 리차드슨은 라캉의 유일한 논문집인 『에크리럄rits』를 읽는 일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작업이라 했을까! 흔히들 『에크리』를 수수께끼 그림에 비유한다. 수수께끼 그림이란 언뜻 보기엔 무의미한 조각들을 따로따로 이해한 다음 그 조각들을 맞춰 봐야 겨우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라캉의 문체 때문이다. 라캉은 『에크리』의 서문에다 <문체란 우리가 말을 건네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써놓았다. 제인 갤럽도 라캉의 텍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언어에 있어서 <거세>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1960년대 초 카라카스에서 열린 라카니언들의 학술 대회에 참석하여, 당신네들은 지금 라카니언이라고 여기 모인 모양인데 그 자신은 프로이디언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듯이 그의 글에는 항상 프로이트가 따라 다닌다. 거꾸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 같다. 그의 중요한 이론에는 거의 언제나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참조되고 있다. 따라서 라캉식으로 정신분석을 읽어 내는 일은 언제나 프로이트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라캉의 구호처럼 <프로이트에게로의 귀환>이다. 물론 그의 제자들은 국제 정신분석학회로부터 <파문>당한 1964년에 열렸던 라캉의 열한 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서 라캉이 처음으로 라캉답게 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가장 짧게 말해서,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발견에 기초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된 이론이며 임상이다>. 다시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정신분석이란 무의식적 정신 과정을 탐구하는 방법이고, 신경증의 치료 방법이며, 연구와 치료 방법에 나타난 정신 과정에 관한 이론들인 셈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받으러> 오는 환자를 피분석자analys 아닌 분석 실행자analysant로 부른다. 분석을 당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분석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우리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은 무슨 흉측한 본능의 덩어리로 이해되었던 무의식을 대타자le grand Autre와 말을 나누는 자리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을 우리들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긴 뫼비우스의 띠에서 본다면 안과 밖, 윗변과 아랫변이 구분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에게 처음으로 정신분석 치료를 받은 <안나 오Anna O.>라는 여인은 그 치료를 <대화 치료>라고 불렀다. 그녀가 앓았던 병은 히스테리라고 알려져 있다. 첫 증상은 심한 기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손발이 마비되어 굳어지고 감각조차 없어진다. 마치 <신경성>이 아니라 진짜 <신경이 고장난> 것처럼 보이는 전형적인 히스테리다. 사팔뜨기에 목 근육까지 마비되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한다. 음식을 거부하다가 브로이어 박사한테 먹여 달라고 한다. 물도 삼키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가끔은 환각에 시달린다. 요즘의 진단 기준으로는 분명히 히스테리성 정신병이다.
프로이트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브로이어 박사가 1년 반 동안 빈의 상류 사회 출신인 그녀를 진료했다. 한때 브람스의 주치의를 맡았을 만큼 브로이어 박사는 그 당시 빈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을 도맡아 치료하는 명의였다. 브로이어 박사는 정말 성실한 의사였다. 하루에 두 번도 마다하지 않고서 안나 오에게 왕진을 다녔다. 치료 방법은 최면술이었다. 그녀는 증상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나면 눈 녹듯이 그 증상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하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후련했으면 그녀가 이 대화 치료를 <굴뚝 청소>라고도 불렀을까. 일종의 <카타르시스>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도 프로이트의 제자를 자처하는 요즘의 분석가들은 <말>을 무시한다. 이 틈새를 노려 라캉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빌려 와 프로이트를 재해석하고 있다.
벤베누토는 『라캉의 정신분석 입문』에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체의 욕망은 말로 표현된다. 욕망은 분석가라는 타자 앞에서 말로 표현되고 이름이 붙어야 그 인식이 가능하다. 또한 주체가 자신의 역사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도 말에 의해서다. 언어의 존재라는 사실이 과거의 관점을 바꿔 놓는다. 주체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야 그 사건들을 재구성할 수 있다. 분석 경험을 통해 주체는 자신이 지닌 기억의 흔적들을 끊임없이 재정리하게 된다. 환자는 분석가한테 말하는 동안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는데 이것이 증상을 없애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환자는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꺼내 놓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 사건들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라캉은 오로지 말만이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과거의 사건들이 흔적으로 남겨 놓았던 과거의 권능은 오직 말만이 입증해 줄 수 있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간혹 환자와 의사한테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분석중에 안나 오가 임신했다. 물론 상상 임신이다. 자궁 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생긴 아이다. 물론 그 아비는 그녀가 상상 속에서 사랑했던 브로이어 박사였다. 결국 그녀는 진통 끝에 상상의 아이를 낳는다. 그러니까 진통까지도 히스테리 증상이다. 훗날 안나 오의 치료를 떠맡은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을 <전이의 사랑>이라 불렀다. 브로이어를 향한 전이의 사랑이 브로이어로 하여금 그녀의 치료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이의 사랑은 여성 환자를 많이 보아 온 프로이트에게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벌써 전이는 정신분석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는데, 그때에 전이라는 것은 어렸을 때 중요한 인물에게 붙어 있던 감정이 분석가에게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라캉은 전이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실제로 이 사랑을 분석가가 지니고 있을 것 같은 무의식적인 지식, 즉 본식(本識, savoir)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한다.
그런 말들을 이해하려면 거울 단계와 <아버지의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는, 자가 성애 단계로부터 자기애 단계로 이행해 갈 때 분명 어떤 <새로운 정신 작용>이 끼여드는 것을 감지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라캉은 거울 단계로 해명하고 있다. 거울 단계란 생후 6∼18개월 사이에 거치는 자아의 형성 단계이다. 이러한 거울 단계를 통하여 자아가 말짱 헛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따라서 자아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이 사회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 뿐이다. 자아 심리학에서의 피분석자는 위대한 분석가를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욕망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욕구와 요구와 욕동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2자 관계로부터 3자 관계로 이행할 때 끼여드는 새로운 항목이다. 이러한 부명(父名)에 의해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발전해 가게 된다.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에 부명(父命)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명령과 아버지의 이름을 부명이란 한자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은 <이름nom>과 <안돼non>라는 동음 이의어로 말장난을 시작한 라캉의 흉내를 내본 것이다.
유달리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은 엄마와의 2자 관계 속에서, 다시 말해 아무런 부족함도 없는 상상계 속에서 자라다가 부명이란 기호에 의해 마침내 상징계 속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때서야 인간은 언어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이 지배하는 문화 세계의 일원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니피에를 잃어버린 시니피앙의 지배를 받는다. 아마 최초의 시니피앙이 선악과였던 것 같다. 지혜의 열매를 따먹고 하느님과 비슷한 지혜를 얻으려고 했지만 그 결과는 부끄러운 나체를 지니고서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고 마는 것이다. 그 뒤로 인간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에덴에 대한 향수를 앓기 시작한다. 고국을 떠난 고아로서 영원히 이 세상을 떠돌며 헤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떠도는 시니피앙>이다. 라캉은 『에크리』를 편집할 때 자신의 논문들을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처럼 읽으라는 듯이 그 논문을 제일 앞에 배열했다. 소설 『이어도』를 정신분석한 나의 졸고, <떠도는 능기(能記)>는 이것을 흉내내어 쓴 것이다. 능기는 시니피앙의 번역어이다. 이렇게 라캉의 정신분석은 시니피앙을 위주로 하는 정신분석이다. 우리가 언어를 부리며 사는 줄 알았는데 라캉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언어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중요하면서 혼란을 일으키는 개념이 남근이다. 먼저 말해 둘 것은 이 남근이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라캉이 분명하게 정의를 내려 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부정법으로 일관된 정의를 내렸을 뿐이다. <남근은 환상이 아니다. 어떤 대상도 아니다. 음경이나 음핵과 같은 기관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이 라캉의 이론에 빚을 졌으면서도 라캉을 남근 중심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까닭은 역시 <특권을 지닌 시니피앙>이라는 이 남근 개념 탓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남근이란 개념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남근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핵심이 되는 거세 불안을 푸는 열쇠이다. 남근이 음경의 표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지 갖고 있느냐 아니냐라는 정신적인 표상일 뿐이다. 여기서 음경이 선택된 까닭은 몸에서 유난히 돌출된 기관인 데다가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것 같은 그 신축성 때문이다. 조상들의 무덤 앞에 쑥돌로 잘 다듬어 성석(性石)을 모셔 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리라 상상했던 엄마에게 바로 그 남근이 없음을 알고는 자신도 언젠가는 귀중한 그것이 잘려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거세 불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실제로 거세당한 남자 아이도 없고, 아예 처음부터 갖지도 않은 여자 아이는 거세당할 리가 없다.
한때 프로이트는 최면이 잘 걸리지 않는 환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주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중요한 생각이든 그렇지 않든, 기분 좋은 생각이든 아니든, 떠오르는 대로 무엇이든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그저 귀기울여 듣기만 했다. 그 결과 환자에게 떠오르는 것은 그 무엇이나 어떤 식으로든 무의식의 갈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최면으로부터 자유 연상으로 옮겨 가는 기념비적인 과정이다. 그러니까 환자는 고통의 주체로서 분석가를 찾아왔다가 자유 연상을 통해 드디어 사유의 주체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식의 <사유=존재>는 아니다. 사유의 주체가 실존일 수는 있어도 그 주체의 본질이나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분석 시간에 분석 실행자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의 꿈 이야기나 그의 실언과 농담, 하물며 그의 망상이나 환청까지도 그의 무의식의 주체를 찾아가는 귀중한 <꽉 찬 말>이다.
필자 역시 이미 죽은 라캉한테 전이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해소할 방편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 무의식의 주체를 체험해 보려고 시도해 왔다. 라캉은 분석가가 되는 첫번째 요건이 문학 수업이라고 봤다. 실은 프로이트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학 작품을 작가의 증후로 보고 그 증후를 분석하여 작가를 진단하는 작가 연구이거나 작품 속의 주인공을 정신 병리적으로 분석해 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라캉식의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문자에 관한 해석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정신분석은 시니피앙을 위주로 하는 정신분석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해석은 욕망과 공격성에 의한 행위이다. 라캉을 해석하는 일도 라캉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라캉을 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해석이란 전이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되고, 독서에서의 해석은 전이의 분석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글쓴이 김종주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기독병원 신경정신과장을 거쳐 현재 김종주 신경정신과 의원 원장이다. 1991년 파리에서 열린 라캉 서거 10주년 학술 대회에 참석했고, <한국 라캉과 현대 정신분석 학회>를 창립한 뒤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라캉 학회 회원이다. 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1993년 『예술세계』 문학평론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캉 정신분석과 문학평론』, 『라캉 정신분석 입문』 등의 저서가 있다.
미메시스(http://openbooks.co.kr/mimesis/), 1999
TAGS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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